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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여성 디자이너들이 생존하는 방법이다!
2019 페미니스트 ACTion! ⑥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 클럽
※ 혐오와 차별을 멈추라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온라인에서 결집되어 거리에서도 울려퍼지는 시대, 지금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의 액션을 기록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 2018년 여름 발족한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 클럽(FDSC, Feminist Designer Social Club) ©사진: 라야
여성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왜 사라지는가?
언제부턴가 궁금해졌다. 서른다섯 살이 지난 여성 디자이너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기에 모두 사라지는 거야? 보통은 직장에 들어가면 선배를 보고 나의 다음 스텝을 가늠할 수 있다고들 하는데, 필드에 남아서 실무를 하고 있는 선배 여성 디자이너의 모습을 보기가 어려웠다.
대학의 ‘여초’ 학과 학부 때부터 시작해 직장에서 사원급까지 높은 비율을 차지하던 여성 디자이너들은 어느새 회사를 떠나고, 남성 디자이너들이 남아 업계의 임원급 자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월간 디자인 2019년 5월호, “2019 그래픽 디자인계 임원 성비 설문 조사: ‘진짜’ 실력이 중요한 세상을 위해” 참고)
여성 디자이너들은 왜 사라지며 어디로 가는가?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친구들에게 물어보아도 다들 자조 섞인 농담조로 “무슨 일이 생기는지 내가 직접 겪어보고 알려줄게”라고 말할 뿐, 상황은 어딜 가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도 궁금했던 서른다섯이 되기 전, 나는 퇴사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같은 영역에서 일하던 또래 친구들 대부분이 직장을 그만뒀다. 퇴사의 이유만큼이나 각자에게 놓인 상황도, 이후의 행보도 다양했다. 나는 당분간 1인 규모-프리랜서나 1인 스튜디오의 형태-로 일을 해 보기로 했다.
같은 고민을 하는 동료 디자이너를 찾고 싶어!
2018년 여름, 트위터를 통해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 클럽>(FDSC, Feminist Designer Social Club)이 발족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신인아, 김소미, 우유니게, 양민영 디자이너가 모여 만든 이 소셜 클럽이 표방한 “페미니스트 디자이너가 더 활발히 활동하고, 더 많이 벌고,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서로 돕는 소셜 클럽”이라는 문구가 마음에 들었다.
▲ 2018년 7월 15일에 밀리언아카이브에서 열린 FDSC의 첫 설명회. ©사진: 라야
클럽의 운영 계획을 발표하고 회원 모집을 위한 첫 번째 설명회를 연다고 했다. 나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직접 가서 보는 사람이었으므로, 고민 없이 신청서를 작성했다. 200여 명의 디자이너가 신청했고 분야와 연차를 고려해 60여 명이 초대되었다는데 운 좋게도 거기에 내가 포함되었다. 7월 15일, 설명회가 열렸고 그 자리에 참석했던 모든 디자이너가 FDSC에 가입했다.
회원 모집은 오프라인 설명회를 통해서만 이루어지지만, 우리의 베이스 캠프는 ‘슬랙’이라는 툴을 활용해 온라인 커뮤니티의 형태로 존재한다. 커뮤니티에는 공지 채널(게시판)을 비롯해 여러 개의 채널이 열려 있는데, 회원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곳은 “FDSC 지식인”이다. 이곳에서 디자인 프로그램의 오류나 숨은 기능에 관해 묻기도 하고 제작 공정, 프로젝트의 견적이나 계약서의 세부 항목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눈다. 그 어떤 황당하거나 실없는 문제일지라도 누군가가 이미 같은 문제를 겪었으며, 그러므로 그 누군가는 항상 답을 알고 있다!
나를 포함해 많은 여성 디자이너들이 공통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사회적으로 교육받은 ‘여성성’으로 인해 질문하기를 꺼린다는 것. 디자인 비용에 대해 디테일하게 이야기한다든지 돈을 좇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멋없는’ ‘속물’로 치부하기도 한다. 간혹 버젓이 많은 일을 맡게 될 경우에는 ‘나 같은 게 이렇게 큰돈을 받고 일해도 되나?’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몸을 사린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터놓고 말하기를 두려워함으로 인해 현실(금전)적인 부분과 거리를 두게 되고, 그 결과 임금에서도 뒤처지게 되기도 한다.
FDSC는 그 많던 여성 디자이너가 ‘어디로’ 사라지는지보다 ‘왜’ 사라지는지에 주목한다. 앞서 나열한 문제는 여성 디자이너들이 사라지게 되는 이유들 중 일부다. 야근과 격무가 미덕으로 여겨지는 문화, 처음에는 고생 좀 해야 한다는 인식, 남성·학연·지연 위주의 네트워크, 성폭력에 노출되는 상황, 성차별 관행 등을 개인만의 문제로 치부할 수는 없다. 많은 여성 디자이너들이 사회적 구조에 의해 사라지며, 우리는 이 구조를 뒤집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기 위해 모였다.
▲ FDSC 소개 전단 ©사진: 강희주
각자의 생존방식과 노하우를 공유하다
당연히 FDSC의 모든 활동이 온라인에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온라인에서 그때그때 필요한 정보를 즉각적으로 공유한다면, 소모임의 형태로 열리는 오프라인 모임에서는 조금 더 ‘날 것’의 ‘진짜’ 정보를 공유한다.
소모임을 여는 데는 특별한 권한이 필요하지 않다. 그때그때 의견을 나누고 싶은 주제가 있는 사람이 소모임을 열기 때문에 매번 주제가 달라지지만, 결국은 우리가 잘 살아가기 위해 각자의 생존방식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다. 다양한 필드, 다양한 연차, 다양한 형태, 다양한 위치에서 일하면서도 같은 문제점을 공유하는 디자이너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다.
FDSC에서 연 첫 소모임은 “견적서 소모임: 비교견적서 2부 부탁드려요^^”이었다. 참가자들은 ‘사연이 있는 견적서’와 ‘가장 보통의 견적서’를 한 부씩 준비해 와야 했는데, 일의 표준 단가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업계 특성상 다른 디자이너들의 견적서를 본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자리였다.
그런데 막상 소모임에서 다른 이들의 자료를 한자리에 모아놓고 보니, 견적서 상의 금액보다도 더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디자이너들의 저마다 다른 견적서 양식 디자인이었다. 편의와 효율을 중시해 엑셀로 견적서를 작성하는 사람과, 디자인 프로그램을 이용해 한 차례 더 양식을 가공하는 과정을 거쳐 보다 ‘디자이너다운’ 룩을 만들어내는 사람, 세부 항목을 절대 공개하지 않는 사람과, 항목을 최대한 세분화해서 보여 주는 사람, 세로 판형의 양식을 사용하는 사람과, 가로 판형의 양식을 사용하는 사람…. 그리고 그 형식을 사용하는 데에는 저마다의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 2018년 8월 11일에 열린 FDSC의 포트폴리오 리뷰 현장. ©사진: 우유니게
우리는 견적이 조정되었던 과정과 결과를 가감 없이 보여 주기도 하고, 내가 받아야 하는 정당한 임금이 얼마인지 계산하는 방법이나 클라이언트로부터 인건비를 지켜내기 위한(=견적이 깎이지 않도록 하는) 최소한의 장치를 견적서의 항목에 은밀하게 녹여내는 방법 같은 것들을 공유했다.
이맘때 즈음에 나는 개인사업자 등록 신청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스튜디오의 이름을 정하는 것도 큰 고민이었지만, 접해본 적 없는 낯선 용어와 대면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다. 신청하는 과정에서 실수하면 어떻게 하지? 뭔가 잘못되면? 아마도 많은 여성들이 그렇겠지만, 실수하거나 실패했을 때 수습할 수 있다거나 바로잡으면 된다는 옵션을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FDSC라는 인적 네트워크가 있었고, FDSC에는 나와 같은 과정을 이미 겪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비록 실수할 배짱은 없었지만- 그들에게 멍청이 같은 질문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간 했던 걱정이 허탈하게 느껴질 정도로 나는 아무 문제 없이 개인사업자등록증을 발급받았고, 그 기세를 몰아 “초보 1인사업자 소모임”을 열기도 했다.
사업자등록증 없이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거나 곧 사업자등록을 신청할 예정인 이들도 함께 모였다. 작업을 하는 공간이나 사용하는 장비에 대한 개인적인 소견, 그리고 절세에 대한 팁과 제도적으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부분들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비슷한 상황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꽤 큰 시너지 효과를 가져온다.
▲ 2018년 11월 30일에 팩토리2에서 열린 FDSC의 두번째 설명회. ©사진: 강희주
혼자 푸념하거나 자책하지 말고 “갑자기 모여보자”
혼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녹록지 않았다. 회사에 소속되어 일할 때는 겪지 않았거나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문제들이 짧은 기간 동안 연달아 생겼다. 대부분이 클라이언트와의 소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마찰이었다. 나는 이것이 내 개인의 문제가 만들어낸 상황인지 혼란스러워졌고, FDSC의 온라인 커뮤니티에 가볍게 글을 올렸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경험담을 댓글로 공유해 주었다. 무리한 요구를 받았거나 수정 사항을 황당한 방법으로 전달받은 ‘을’의 입장의 디자이너들도 있었고, 클라이언트 측의 입장이지만 기본적으로는 본인도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같은 디자이너들에게 요청 사항을 전달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와중에 신인아 디자이너가 한번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자리를 열면 재미있겠다고 했고, 곧장 이지선 디자이너가 말 그대로 “갑자기 모여보자 소모임: 이미지 제작자와 함께 일하는 법”을 열었다. 급하게 만든 자리였던 만큼 깊은 내용을 다루지는 못했지만, 고민을 토로하고 다른 입장에서 일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해소되는 부분들이 있었다. 메일이나 전화상으로 이야기하는 것과 직접 대면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이 소모임은 이후에 “클라이언트와 첫 메일 모임”이라는 후속 모임으로 발전했다. 제목처럼 클라이언트에게 보내는 첫 번째 메일을 앞으로 소통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게 만드는 도구로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는 모임이었다. 물론 디자이너들 간의 한두 차례의 모임만으로 문제가 되는 구조를 바꿀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현상에 대한 자책이나 푸념에 머무르지 않고 개인 선에서 실천할 수 있는 해결 방법을 공유한다.
목이 굽은 디자이너들이여, 목을 펴라
우리가 항상 심각한 주제로만 모이는 것은 아니다. 제작업체로부터 이유에 대한 별다른 설명 없이 “안 된다”는 말을 듣는 데에만 익숙해져 있는 디자이너들이 제작 샘플을 들고 다이어리 전문 제작업체인 한주다이어리를 방문해 제작 공정에서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기도 했다. 지난 4월에는 “FDSC 운동해”를 열어 모니터 앞에만 앉아있던 디자이너들을 밖으로 끌어냈다.
▲ 2019년 4월 20일에 열린 “FDSC 운동해” ©사진: 강희주
신청자의 대다수가 설문지의 “운동을 못한다” 항목에 체크하고, 참여 종목의 출전 여부를 묻는 질문에 “지원하는 사람이 없다면 생각해 보겠다”라거나 “비출전”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도 모두가 밖에 나와서 다른 디자이너들과 만나고 싶어 했고, 함께 몸을 움직이고 싶어 했다. 청군과 백군 대신 FDSC 로고에서 색을 따와 “팀 검정”과 “팀 노랑”으로 팀을 나누고, 2인3각이나 OX 퀴즈 같은 레크레이션 종목부터 이어달리기나 박 터트리기 같이 제법 운동회 분위기가 나는 종목까지 모두가 웃으며 즐겼다.
회원들끼리의 모임 외에도, 우리는 언제나 FDSC 밖의 여성들과 함께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첫 설명회 당시 “뒤에서 여러분들을 보고 있으니 모두 목이 굽어 있다”고 말한 이예연 디자이너는 현재 여성 트레이너에게 주기적으로 운동을 배우는 내부 소모임을 이끌고 있다. 페미니즘 출판사 봄알람에서 디자인을 담당하는 우유니게 디자이너는 일러스트 위인전 <꿈을 그리는 여자들>(2018)에 참여를 의뢰할 여러 명의 여성 일러스트레이터를 FDSC 회원들의 추천을 통해 찾을 수 있었다.
나는 포트폴리오 사진이 필요한 디자이너들을 모아 여성 사진가에게 촬영을 의뢰하는 소모임을 열었다. 그리고 물론, FDSC의 모든 행사 현장 사진 촬영도 여성 사진가에게 의뢰하고 있다.
여성 작업자를 새롭게 알게 되는 일은 항상 우리를 들뜨게 한다. 선배 여성 디자이너의 작업실을 찾아가기도 하고, 취업을 준비 중인 학생들과 현직 디자이너들을 매칭해 포트폴리오를 리뷰하기도 하고, 우리가 적정한 단가로 일을 하고 있는지와 협업자들에게 적정한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지에 대한 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곧 공개될 FDSC의 팟캐스트에서는 다양한 필드에서 일하고 있는, 사라진 듯 보였지만 사라지지 않은 여성 디자이너들의 일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우리는 조금씩 나아갈 것이고, 더 많은 여성 디자이너를 만날 것이고, 더 단단해질 것이다. (양으뜸)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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