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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개의 이름표를 가진 여성들이 만날 때
제7회 디아스포라 영화제 상영작 <이지를 위하여>
낯선 사람과 만나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을 마주했을 때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소개다. 살면서 수십 번은 했을 일인데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학교 다닐 땐 ‘X학년 X반 누구’라고 소개하거나 ‘XX학과 XX학번 누구’라고 하면 쉽게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큰 이름표(Tag)가 사라지자 어디부터 어디까지 날 소개해야 하는지, 그 범위를 정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졌다.
이 사람 앞에서 날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해도 괜찮을까? 퀴어라고 커밍아웃해도 괜찮을까? 무슨 일을 한다고 이야기해도 괜찮을까? 어떤 단어는 단어만 얘기하는 걸로는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부가설명을 첨삭해야 할 때도 있다.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정형화된 이미지가 너무 강하거나 잘못된 인식이 많아서 오해를 불러오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구구절절 설명할 수도 없고 그 부분을 빼고 날 소개하면 왠지 날 속이는 것 같고,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또 어떤 이름표는 나라는 존재 자체에 그냥 따라붙기도 한다. 나의 외향적 생김새로 인해 분류되는 건데 해외, 특히 서구권에 가게 되면 생기는 이름이다. ‘아시안’(Asian)이라는 것, 물론 나의 경우엔 ‘여성’이라는 말이 하나 더 따라오니까 ‘아시안 여성’이 된다. 그리고 이 말엔 굉장히 서구중심적 시선의 이미지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아이처럼 귀여움, 미성숙함, 수동적, 예의 바르고 고분고분함 등등.
입 한번 떼지 않았는데 나에게 자동으로 부여되는 이름표가 있는가 하면 입 아프도록 설명해서 겨우 붙일 수 있는 이름표가 있다. 그런 과정을 알아버린 탓에, 자기소개를 하는 건 종종 굉장히 어렵고 날 움츠러들게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 5월 24일부터 28일까지 인천 중구 아트플랫폼 일대에서 열린 제7회 디아스포라 영화제(Diaspora Film Festival)에서 상영된 영화 <이지를 위하여>(For Izzy, 알렉스 추 감독, 2018) 포스터 ©For Izzy
그래서일까? 약이 떨어져 정신이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약 처방을 안 해준 의사에게 화를 내며 “내 성은 ‘차우’가 아니라고! 내 이름은 ‘디디 청’이야!!”라고 외치는, 자신의 존재를 명확하게 표출하고 있는 ‘앵그리’ 아시안 여성의 모습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며 영화가 시작되었을 때, 난 이 영화 <이지를 위하여>(For Izzy, 알렉스 추 감독, 2018)을 좋아하게 될 거라고 직감했다.
복잡한 이름표를 가진 여성, 디디와 로라의 만남
디디의 자기소개는 이렇다. 미국 LA에 산다. 홍콩 출신의 부모가 있지만 이혼했고 아빠와는 이제 연락이 되지 않는다. 사진작가로 일을 했지만 지금은 무직이다. 약물중독이 되었다. 그래서 동거 중이던 약혼녀에게 차였다. 어쩔 수 없이 자존심을 접고 엄마에게 돈을 빌리기로 했다. 그러자 엄마가 홍콩에서 날아왔다. 어쩔 수 없이 엄마와 살게 되었다.
소개로 눈치챘겠지만 디디에겐 여러 이름표가 있다. 아시안 여성, 이민자, 레즈비언, 예술가, 실업자, 약물중독자, 비혼. 디디의 삶은 누군가에겐 그저 ‘실패한 밀레니얼’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디디는 자신의 정체성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정체성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과정이다. 아직 매끄러운 방법을 찾지 못했을 뿐.
그런 디디의 삶에 로라가 들어온다. 디디와 엄마가 이사 온 첫날, 카메라를 들고 무작정 돌진해 와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로라 또한 여러 이름표가 있다. 아시안 여성, 이민자, 예술가, 고기능 자폐증(high-functioning autism)을 가진 장애인, 비혼/비독립. 로라의 삶 또한 누군가에겐 그저 ‘끊임없는 돌봄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로라는 확실하게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세계를 보지 못할 뿐.
▲ 영화 <이지를 위하여> 중. 디디(미셸 앙)와 로라(제니퍼 수)는 LA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진과 영상을 찍는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났다. 디디는 로라의 그 세계를 볼 수 있으며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었고, 로라는 디디가 덜컹거리는 삶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되는 사람이었다. 이들의 관계는 표면적으로 쉽게 설명하자면 여성 간의 연대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설명이 충분치 않아 보이는 이유는 각각의 캐릭터가 다층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그들은 단지 여성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에 머무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다각도로 보여준다. 그림을 그리는 로라의 표현대로 동그란 원이 아니라 각이 있는 세모처럼.
그렇기에 디디와 로라의 관계는 일차원적이지도 일방향적이지도 않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는 불균형할까?
흔히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를 생각하면 일방적인 무언가를 생각하게 된다. 특히 돌봄에 있어서 장애인은 늘 ‘받는’ 쪽이고 비장애인은 늘 ‘주는’ 쪽이라고 말이다. 그렇기에 이 관계는 불균형하고 불평등한 일이 되어버려서 많은 이들이 꺼리곤 한다.
디디와 로라의 관계도 언뜻 보면 그냥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로 보이기도 한다. 디디가 로라를 얼떨결에 자신의 프로젝트 인턴으로 고용하게 됨으로써 둘은 함께 일을 하게 되는데, 디디가 로라에게 카메라 작동법을 알려주거나 사진 찍는 방법을 알려주며 로라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라에게 일방적으로 무언갈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는 디디는 로라와의 작업을 통해 점점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책임감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과 꿈을 로라에게 털어놓는다. 그건 로라가 ‘아이처럼 순진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소중한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꿈을 꿀 수 있게 된 건 로라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이 ‘세상에 필요 없는 실패자’가 아니라 ‘누군갈 돌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영화 <이지를 위하여>(For Izzy, 알렉스 추 감독, 2018) 중. 그림을 그리는 건 로라의 일상 중 하나다.
로라가 디디의 자기 각성을 위해 도구화되는 건 아니다. 로라는 자신의 카메라를 놓지 않을 정도로 뚜렷한 주장을 가졌다. 자신의 생각을 그림으로 그려내고, 사랑과 증오의 의미를 열심히 검색해서 그게 어떤 건지 알아낼 정도의 의지도 가지고 있다. 로라에겐 분명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다.
영화 후반부, 로라가 다시 한번 실패를 겪은 디디에게 “내가 네 옆에 있어 줄게, 널 혼자 두지 않을게. 난 너의 친구니까.”라고 말하는 장면은 로라가 자신의 존재를 매우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렇다고 그 모습이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관계’를 전복시키는 대단히 극적인 걸로 그려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장면은, 극적인 무언가가 있어야 로라가 돌봄의 주체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로라는 언제나 할 수 있었다. 단지 로라의 돌봄을 받고자 하는 이가 없었을 뿐이다. 로라 옆에 로라에게 마음을 연 디디라는 존재가 생기자 그 사실이 드러난 거다.
차이와 묶음, 그리고 ‘연대’에 관한 이야기
영화엔 디디와 로라뿐만 아니라 디디의 엄마인 안나와 로라의 아빠인 피터의 이야기도 비중 있게 담겨있다. 일찌감치 싱글맘, 싱글대디가 되어 홀로 양육을 담당해 오면서 자신의 삶 일부를 뒷전으로 해 온 그들이 뒤늦게 풋풋한 사랑을 시작하는 모습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은 이국땅에서, 자녀와는 하지 못하는 자신들의 모국어로 대화를 나누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디디와 안나, 로라와 피터의 부모자식 간의 관계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 영화의 재미다. 유교권 문화의 국가들이란 어쩜 다들 그런지…. 속으로 박수를 치며 공감을 하다가 하나 더 생각하게 되는 부분은 ‘각자의 모국어(및 문화)가 다른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란 어떨까?’ 라는 궁금증이었다. 사실 한국에서도 모국어가 다른 부모와 자녀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들의 이야기는 어디 있을까?’ 라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 영화 <이지를 위하여>(For Izzy, 알렉스 추 감독, 2018) 중. 안나와 피터는 홍콩 출신으로 광둥어를 쓰며 대화한다.
영화는 픽션 임에도, 디디가 자신의 프로젝트를 위해 로라, 안나, 피터를 인터뷰하고 로라와 디디가 각자 카메라를 들고 서로를 담는 모습이 나오는 탓에 종종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진다. 그런 구성 덕분에 누구 하나가 대상화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꽤 흥미롭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부분은 기술적으로도 영화의 약점을 보완하지만, 자폐증을 가진 로라의 이야기가 전달되는 중요한 매개체로써 역할을 해낸다.
영화 속 캐릭터와 영화의 구성 모두 복합적이고 다양해서 소소한 재미가 끊이지 않는 것에 비해 영화의 결말은 다소 심심하고 ‘가족중심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지막에 디디와 로라, 안나와 피터 모두에게 ‘재혼가정’을 비롯한 또 하나의 새로운 이름표가 생기는 게 흥미로웠다.
자기소개를 할 때 어떤 이름표를 꺼내 들지 고민할 만큼 나에게 여러 개의 이름표가 있다는 건 새로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린 종종 다른 사람에게도 여러 개의 이름표가 있다는 걸 잊어버리고 쉽게 하나의 이름으로 호명해 버린다. 여성, 퀴어, 장애인, 이주민, 난민…. 묶어버리기 쉽지만 사실 그 묶음들은 끊을 수 없이 연결되어 있고 한편으론 그 안에서도 다양한 차이를 드러내는데 말이다.
<이지를 위하여>는 때때로 우리가 잊어버리는 그 사실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그리고 로라와 디디의 관계를 통해 어떤 이름표를 가졌든 간에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옆에 있어 주기로 한 사람들의 연대가 어떤 모습인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박주연)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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