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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이주민, 퀴어’는 더 이상 들러리가 아니다

쿠바 이민2세대 싱글맘 가족 시트콤 <원 데이 앳 어 타임>



영상 콘텐츠 홍수의 시대다. TV를 켜도 수십 개의 채널이 있고, 넷플릭스나 왓챠 같은 플랫폼이 생겼고, 유튜브도 있다. 예전처럼 한 손에 꼽히는 공중파 채널을 돌려가며 리모콘을 누가 쥐느냐 눈치 볼 필요도 없이, 스마트폰이나 컴퓨터가 있으면 내가 볼 스크린은 내가 장악할 수 있다.


시청자의 선택이 폭이 넓어졌다는 건 사실 창작자에게도 그만큼 기회가 열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빤한 스토리와 빤한 캐스팅를 넘어서 지금껏 주목 받지 못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새로운 이야기를 쓰고 만드는 일에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다.


라틴 여성 캐릭터는 ‘갱의 여친’이거나 ‘가정부’거나…


넷플릭스에서 만든 시트콤 <원 데이 앳 어 타임>의 제작자이자 프로듀서, 감독, 작가인 글로리아 칼데론 켈렛(Gloria Calderon Kellett)도 ‘새로운’ 이야기에 목말라 하던 사람이었다. 쿠바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부모를 둔 이민 2세대인 그는 연극, 방송 등에서 연기를 하면서 라틴 여성인 자신에게 오는 역할이 ‘갱단의 여자친구’거나 ‘(백인 가정의) 가정부/유모’거나 ‘섹시한 내연녀’로 한정돼 있다는 걸 깨닫는다. 글로리아는 ‘제대로 된 역할이 없다면, 내가 (시나리오를) 쓰겠다’는 생각으로 작가에 도전했다.


▶ <원 데이 앳 어 타임>에 직접 출연하기도 한, 제작자이자 작가 글로리아 칼데론 켈렛(오른쪽) ⓒNetflix


12년 후, 글로리아는 TV 역사상 가장 진보적이면서도 재미있는 가족 시트콤을 만들어 냈다. 바로 올해 3시즌으로 접어든 <원 데이 앳 어 타임>(One Day At A Time)이다. 갱단이나 범죄에 연루된 쿠바인이 아닌, 지금껏 방송에서 보여지지 않았던 ‘평범한’ 쿠바 이민 가족의 이야기를 그려낸 이 시트콤은 자신들이 홍보하는 대로, 이제는 이게 ‘미국 가족 쇼’(American Family show)라는 걸 보여준다.


그렇다면 미국과는 상황이 다른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우리도 이 시트콤에 공감하고 웃을 수 있을까? ‘친절한 페미니스트’답게 <원 데이 앳 어 타임>의 매력을 어필해 본다.


싱글맘 가족, 여성 삼대(三代) 이야기


<원 데이 앳 어 타임>은 완전 새로운 작품은 아니다. 1975년부터 1984년까지 미국 CBS에서 방송된 원작은 싱글맘이 딸을 키우면서 겪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었다. 당시에는 싱글맘이 주인공이라는 이유로 방송이 무산될 뻔 했을 정도로 파격적인 시도였다.


2017년에 새롭게 시작한 버전에서도 여전히 주인공은 싱글맘이다. 하지만 그 싱글맘은 이제 백인 여성이 아니라 쿠바 이민2세대 여성인 페넬로페로 바뀌었다. 그에겐 딸(엘레나)과 아들(알렉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먼저 보내고 혼자가 된 엄마(리디아)도 있다. 그러니까 싱글맘 이야기일 뿐 아니라 ‘할머니-엄마-딸(과 아들)’이라는 모계 중심의 ‘비-정상적인’ 4인 가족 이야기가 된 거다.


▶ 3시즌으로 접어든 시트콤 <원 데이 앳 어 타임>(One Day At A Time) 포스터 ⓒNetflix


그 중심을 이루는 캐릭터들을 차례로 들여다보자. 리디아는 1962년 ‘오퍼레이션 페드로 판’(Operation Pedro Pan, 가톨릭 교회가 쿠바 카스트로 정권을 피해 쿠바 아이들이 미국으로 이민 올 수 있도록 운영했던 프로그램)을 통해 15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와서 자신의 가정을 꾸린 이민1세대다. 온 집안을 교황 사진으로 도배할 만큼 열혈 가톨릭 신자이고, 여전히 자신이 쿠바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또 자랑스럽게 여긴다.


특이하게도 그녀는 (딸 엘레나를 제외한) 가족 누구도 리디아의 민낯을 본 적이 없을 만큼 완벽한 ‘여성스러움’을 유지하고자 하며 그걸 자신의 미덕으로 여긴다. 결혼해서 남편에게 사랑 받는 것이 여성의 행복이라 여기는 리디아는 어떤 일에서든 손자인 알렉스를 우선으로 두는 사람이다.


리디아의 딸이자 19살 나이에 의무병으로 아프간에 참전했으며 현재는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페넬로페는 가톨릭 신자가 많은 쿠바인들에게 굉장히 치욕스러운 일로 여겨지는 ‘이혼’을 선택한 싱글맘이다. 리디아와 달리, 여성도 강할 수 있고 가족을 책임질 수 있다고 믿으며 그걸 증명해 내는 캐릭터다.


또한 페넬로페는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고 얘기하면서도, 동료 남성 간호사의 맨스플레인에 항의하고 경력이 낮은 남성 간호사가 자신보다 더 높은 시급을 받는다는 걸 알고 퇴사를 선언할 만큼 차별이나 불의를 참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다.


페넬로페의 장녀, 10대인 엘레나는 온갖 시위에 참여하고 사회 이슈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페미니스트다. 시즌1에서 엘레나는 킨세네라(Quinceanera, 히스패닉 문화권 전통 중 하나로 여자 아이가 15세가 되는 생일을 큰 파티로 축하하는 일)를 두고 ‘여자 아이가 이제 결혼할 수 있는 여성이 되었다’는 의미의 가부장제 전통 행사를 축하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할머니 리디아는 일생 최고의 경험이라고 하면서 둘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데, 이것만 봐도 엘레나의 성격과 가치관이 드러난다.


이렇듯 이 여성 삼대(三代)는 너무 다르다. 가족이라고 하지만 각자 살아온 삶과 경험이 다르고 세상을 보는 시선도 다르다. 그건 세상이 변하는 만큼 필수적인 결과인지 모른다. 그렇기에 리디아-페넬로페-엘레나를 보고 있으면 여성들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그 파라노마의 한 장면을 목격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을 뿐만 아니라 한발 더 나아가 변화하고 있는 여성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노인여성은 언제까지 ‘할머니’여야만 해?


등장인물들 중에 가장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진 리디아이지만, 사실 그는 단연 돋보이는 캐릭터다. 리디아를 현실에서 만난다면 아마 선뜻 말 섞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어떤 부분에 있어선 목소리를 높이고 다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손자인 알렉스만을 “우리 빠삐또”라고 부르는 리디아가 얄밉지만은 않은 건, 그가 단순히 ‘손자바라기인 할머니’라는 일차원적인 캐릭터가 아니라는 점과 리디아를 연기하는 배우 리타 모레노(Rita Moreno) 때문이다.


▶ <원 데이 앳 어 타임> 리디아 역을 맡은 만87세의 리타 모레노. ⓒOne Day At A Time 페이스북 페이지


리타 모레노는 1931년생으로 현재 만87세의 배우다. 푸에르토리코에서 태어났지만 1936년에 엄마와 함께 미국 뉴욕으로 이민 온 후, 댄서이자 배우로 지금까지 활동해왔다. 현재 전 세계에서 15명밖에 안 되는 EGOT(방송/음악계 최고 시상식으로 꼽히는 에미, 그래미, 아카데미, 토니 어워즈 모두 수상한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배우 리타 모레노는 비(非)백인에게 좀처럼 무대에 설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시절부터 배우, 뮤지컬 배우, 댄서로 꾸준히 활동하며 지금까지의 경력을 쌓아왔다.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안긴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가 그의 대표 작품인데, 정작 이 뮤지컬 영화를 찍을 때 할리우드가 가지고 있던 인종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에 매일 자신의 피부색을 더 어둡게 칠하는 화장을 해야 했던 고통을 이후에 고백하기도 했다.


히스패닉들도 밝은 피부색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조차 고려되지 않았던 그런 시절부터 배우로 일하며 차별을 맞닥뜨려온 리타는 이번에 리디아 역을 제안 받았을 때 제작진에게 딱 한 가지 요구했다고 한다. “그 할머니 캐릭터를 섹슈얼하게 만들어 준다면 할게요” 라고.


시트콤에서 리디아는 가부장제에 억눌린 나이 든 여성이 아니다. 자신의 매력을 잘 알고 있으며 노년에도 얼마든지 남자들을 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면에서는 남성들을 비꼬며 이용하는 여성 캐릭터로 만들어졌다. 자신의 성적 매력을 어필하는데 주저함이 없는 노년여성 캐릭터임에도, 리디아의 모습은 ‘나이 값 못하는’ 혹은 ‘주책맞은 할머니’로 그려지지 않는다.


리디아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자신의 결정권을 오롯이 쓸 줄도 안다. 가족을 엄청 아끼지만 희생만 하지는 않는다. 할머니라고 부르면 안 되고 리디아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할 것 같은 캐릭터다. 그런 당당함과 자신감은 미디어에 등장하는 여성노인 캐릭터에게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모습이어서, 자꾸 눈길이 간다. 리타 모레노는 정말 묘한 매력을 가진 배우다.


금기시된 것들을 다루며 다양성의 폭을 넓히다


‘알탕영화’(남자들만 드글거리는 영화), ‘알탕방송’이 주를 이루는 사회에서 다양한 여성들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드문 작품이라는 점이 이 시트콤의 매력 전부는 아니다. <원 데이 앳 어 타임>의 가장 큰 장점은 지금 사회에서 논의되어야 함에도 제대로 거론되지 않은 주제들을 대담하게 시트콤이라는 장르 속에 담아낸다는 거다.


▶ 시트콤 <원 데이 앳 어 타임>(One Day At A Time) 장면 중에서 ⓒNetflix


가톨릭 신념이 강해서 이혼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정상가족’ 중심의 쿠바 문화를 배경으로 하면서 ‘가부장제 타파’를 외치는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청소년 엘레나를 주인공 중 한 명으로 내세웠다는 건 꽤 파격적이다. 미국 공중파 방송에 등장하는 LGBTQ 중 남성 동성애자의 비율이 높고, 또한 백인 비율이 높다는 걸 고려하면 엘레나의 등장은 더욱 의미가 있다. (2017년 기준, 미국 공중파 방송 드라마/시트콤 캐릭터 중 8.8%가 LGBTQ 캐릭터이고, 그 중 남성 동성애자가 42%, 인종으론 백인이 50%를 차지한다. -GLAAD ‘2018-2019 Where we are on TV’ 참고)


그 뿐만 아니라 이민 가족, (심지어 같은 인종 안에서도 일어나는) 피부색에 따른 차별, 참전군인 지원 문제, 청소년 성소수자의 커밍아웃과 연애, 성차별, 한부모 가정, 젠트리피케이션, 약물(알코올) 중독 그리고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우울증까지. 아직 사회적으로 충분히 논의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다루기 어렵고, 많은 이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다루기 꺼려하는 주제들, 금기시되는 이야기를 과감하게 끌어온다.


“보여지는 건 중요하다”(Representation Matters)


<원 데이 앳 어 타임>의 스토리텔링은 트럼프 시대가 도래한 이후 TV 등 플랫폼에서 그의 보수정치에 대한 반격으로 ‘다양성’을 내세운 쇼들이 나오기 시작한 흐름의 하나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그 전에도 다양성을 말하며 여성, 비非백인, 퀴어 등의 소수자 캐릭터를 ‘껴주는’ 방식이 있어왔지만, 어디까지나 들러리 혹은 구색 맞추기에 가까웠다.


하지만 ‘반反 이주민, 반反 퀴어, 성차별주의자’인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자 위기감을 느낀 창작자들이 이제 정말 미디어가 제대로 된 이야기로 ‘다양성’을 보여줘야 할 때라며 움직였다. 많은 이들이 “보여지는 건 중요하다”(Representation Matters)는 말을 반복해서 하기 시작했다. 배우들의 다양성 비율뿐만 아니라 제작하는 작가와 감독도 다양해져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런 움직임과 자각이 있었기 때문에,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우울증을 겪는 여성 참전군인들이 그룹 상담을 받는 장면과 그 속에 장애여성과 트랜스젠더퀴어가 포함된 모습을 볼 수 있는 <원 데이 앳 어 타임> 같은 작품이 나올 수 있게 된 거다. 이 시트콤은 다양성의 폭을 넓히고자 하는 창작자들의 도전 최전선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놀라운 점은 에피소드들이 여전히 웃기고, 재미있다는 거다.


예전에 재미있게 봤던 <프렌즈>가 더 이상 웃기지 않고 <섹스 앤 더 시티>가 큰 공감을 불러오지 않는다고 말하면, 누군가 ‘그건 네가 재미없는 페미니스트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난 이렇게 물을 거다. ‘그럼 페미니스트는 어떤 일에 웃을 것 같아? 페미니스트가 웃을 수 있는 세상은 어떨 것 같아?’


영상 콘텐츠 홍수의 시대, 쏟아지는 콘텐츠 속에서 우리는 ‘누가’ 웃고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만들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전히 어떤 이야기가 비었고, 누가 더 끼어들어 와야 하는지도 찾아야 한다. 웃음(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처럼, 함께 더 많이 웃을수록 좋은 세상일 테니까.  (박주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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