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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은 지극히 사소하게 간주되는 성고문이다

일레인 스캐리 作 <고통받는 몸>의 사유를 확장하기(3)


고통, 고문, 전쟁, 언어, 창조성에 관한 독창적인 사유를 통해 인간의 문명을 고찰한 일레인 스캐리(하버드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의 <고통받는 몸>(1985) 한국어판이 나왔습니다. <이미지 페미니즘>의 저자이자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연구활동가 김영옥 님이 스캐리의 사유를 안내하고, 더 깊이 확장하는 글을 4편 연재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성고문 당하는 ‘여성’의 자아분쇄


고문과 고통, 몸, 그리고 인공물을 다루는 스캐리의 책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특별히 성애화된 폭력인 성고문이 언급되지 않는 것은 의아하다. 고문이 고문을 당하는 사람에게서 언어를 비롯해 모든 창조 행위의 가능성, 즉 탈체화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빼앗고 오로지 몸만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이라면,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고문은 이중적 의미에서 고문의 핵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 일레인 스캐리 <고통받는 몸: 세계를 창조하기와 파괴하기>(메이 옮김, 오월의봄, 2018)


‘여성’은 자연과 정신의 이분법에 기초한 인식틀 안에서 자연에 속한다고 여겨졌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고문은 그녀에게서 정신과 언어를 빼앗는 것이라기보다는, 여성 자신은 언어적 존재가 아니라 언어적 존재인 남성의 자아 구성에 필요한 성적 교환물일 뿐이라는 가부장제 젠더의식을 거듭 각인시키는 폭력 행위다. 이것은 고문과는 무관해 보이는 ‘평온한’ 삶의 환경 속에서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는 성폭력과 동일한 젠더 구조 속에 놓여있다.


이렇게 볼 때, 일반적으로 고문이 특정 시공간에서 특정 정치 사건으로 ‘구성’된다면 여성에게 가해지는 성고문은 언제 어디서나 특별할 것 없는 우연적 일상의 사건으로 무수히 재/발생한다. 이때 우연은 젠더 구조에 내재한 필연성의 그림자일 뿐이다. ‘행위자’인 나와 연관된 그 어떤 이유도 없이 ‘나’에게 일어나는 성폭력은 일상이 되어 버린, 그래서 지극히 사소하게 간주되는 성고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빼앗을 언어가 이미 없는 젠더인 ‘여성’에게 가장 ‘적합한’ 고문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확인시키는 고문, 즉 성고문이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고문 중에 최후/최악의 것으로 (혹은 고문을 위한 충분한 시간이 없을 때 최우선적으로) 성고문이 선택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성고문은 여성의 몸이 남성의 나르시즘적 자아상의 팽창을 위해 언제든 동원될 수 있다는 남성 판타지의 좀 더 극적인 대상화이다. (이 대상화는 스캐리가 도덕적 정의의 관점에서 거듭 전면에 부각시키는 창조 활동의 두 단계, 즉 상상하기와 그 상상을 형태로 구현하기가 얼마나 치명적인 비도덕, 비정의의 상태로 추락할 수 있는지에 관해 역사가 목격해온 가장 오래된, 가장 빈번한, 가장 추악한 예다.)


성고문을 당하는 여성에게서 자아와 세계, 언어는 ‘통상적’ 고문을 당하는 남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분쇄된다. 성고문 당하는 여성이 ‘자백’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녀가 시민사회를 위협할 수 있는 ‘무질서’의 존재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시민 개인이 아닌, 남성 시민 개인과 성적 계약을 맺은 (이것은 근대 시민사회가 자신을 정초하며 고안한 의미에서의 사회계약이 아니다) ‘여성’으로서만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성고문 당하는 여성의 자아 분쇄는 그래서 단독자의 어떤 고유한 자아의 분쇄가 아니라 ‘여성’의 자아 분쇄로 이어진다.


성폭력 고통의 언어화는 아직도 더디게 진행 중


1986년 ‘부천 성고문 사건’의 피해-생존자가 기록한 ‘자필수기’는 여성들에게 성고문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총체적으로 잘 보여준다.


그러더니 나에게 소리쳤다. ‘발가벗고 저 책상 위에 올라가, 빨리!’ 그때 나의 머리에는 역시 공장에 다니던 대학 친구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김근태 씨 고문 폭로 유인물을 나눠 읽은 후였던가. 우리 주변에는 고문에 대한 이야기가 간간이 들려오곤 했다. 참으로 남의 얘기일 수 없는 얘기를 들으며, 우리는 자기의 경우를 상상해 보면서 가슴을 조이기도 하고 당한 이에 대한 아픈 마음을 갖곤 했었다. 그때 그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다른 고문은 다 참고 버틸 수 있어도 만약에 발가벗기면 나는 다 불고 말 것 같아.’ 그때 나는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여자가 비굴해져도 이해될 수 있는 유일한 최악의 경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권인숙, <하나의 벽을 넘어서 - 부천서 성 고문 사건 주인공의 자필 수기> 거름, 1989)


이 자필수기는 성고문 당한 사실을 폭로하는 일도, (199명의 변호사가 함께 했음에도) 재판 과정을 거치는 일도, 감옥에서 나와 다시 사회로 복귀해 정치활동에 동참하는 일도 ‘극도의 수치심’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음을 생생히 전한다.


자신이 겪은 일을 수치심과의 싸움 속에 한 줄 한 줄 써 내려가며 ‘수기 집필자’는 피해자에서 피해자-생존자가 되고, 스스로 목격자와 증언자가 되며, 그녀 자신의 생애사(herstory)와 동시에 역사의 기록자가 된다. 이 모든 과정은 철저하게 부서져버린 자아와 언어와 세계를 다시 복원하(려)는 피투성이 안간힘의 투쟁이다. 이 투쟁의 한가운데에서 소용돌이치는 수치심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저 복원은 미완으로 남을 것이다.


저지른 행위에 관한 괴로움과 반성을 의미하는 죄책감과 달리, 수치심은 존재 전체에 해당하는 총체적 부정否定의 감정이다. 성고문이나 성폭력으로 인한 수치심은 그래서 파괴와 분쇄 이후에 자아와 언어와 세계의 복원이 치열하게 진행되는 과정 중에도 ‘사람들은 나를 단지 성고문을 당한/성폭력을 당한 몸으로만 여길 것’이라는 절망의 무저갱으로 피해자를 빨아들인다. (이것은 2018년 전 충남 도지사 안희정 씨의 수행비서 김지은 씨가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고발하고 난 뒤 지속적으로 겪은 고통을 토로할 때에도 핵심이 되고 있다.)


▶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 서울 청계광장에서 2018년 3월 22~23일 계속된 2018분의 이어말하기 현장에서. 미투 운동은 성폭력 피해자의 고통을 소통의 대상으로 만드는 운동이다. ⓒ일다(박주연 기자)


외부가 아닌 자기 스스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게 만드는, 몸에 새겨진 수치심의 감정은 여성이 고문에서, 그리고 지금 여기 일상에서 겪는 성적 폭력(에 의한 고통)의 언어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 중요성에 비해서 그러나 얼마나 미미하게만 사회적 의미를 확보하게 되는지 깨닫게 만든다. 인공지능까지 가능할 정도로 인공물의 발명은 진화했지만, 여성이 겪는 성폭력/성고문과 그로 인한 고통의 언어화는 여전히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문명의 행보를 특징짓는 이러한 젠더 편향성에 반기를 들고 현재 지구촌 곳곳에서 여성들이 분노하며 몸을 일으키고 있다. ‘나도 고발한다’(MeToo) 운동은 성폭력/성고문 피해자의 고통을 제대로 된 소통의 대상으로 만드는, 다시 말해 ‘누구든 같이 느낄 수 있는’ 고통으로 만드는 운동이다. 이 운동의 도도한 흐름이 문명의 왜곡된 창조활동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것이다. (4회에서 계속)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이 글은 일레인 스캐리의 <고통받는 몸>(메이 옮김, 오월의봄, 2018)에 쓴 발문을 조금 수정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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