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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고통에 감응하는 법

일레인 스캐리 作 <고통받는 몸>의 사유를 확장하기(1)


고통, 고문, 전쟁, 언어, 창조성에 관한 독창적인 사유를 통해 인간의 문명을 고찰한 일레인 스캐리(하버드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의 <고통받는 몸>(1985) 한국어판이 나왔습니다. <이미지 페미니즘>의 저자이자 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연구활동가 김영옥 님이 스캐리의 사유를 안내하고, 더 깊이 확장하는 글을 4편 연재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고통받는 몸: 세계를 창조하기와 파괴하기

일레인 스캐리의 <고통받는 몸: 세계를 창조하기와 파괴하기>(1985)는 체화된 경험(felt-experience)이나 체화된 지식(embodied knowledge) 등, 몸 정체성(corporeal identity)에 입각해서 고통과 자아, 언어, 세계와의 관계를 파악하려는 사람들에게, 특히 고통과 파괴를 ‘생산하는’ 고문의 실상을 고발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뛰어난 참조가 되어 왔다.


여성들이 당하는 성폭력의 실상을 파악하는데도 이 책은 유효하다. 성폭력이 여성들에게 어떤 고통과 상해를 가하는지, 그 고통으로 인해 그녀들의 자아와 세계가 얼마나 훼손되는지를 고려할 때, 성폭력은 일종의 고문이기 때문이다.


고통의 표현 불가능성과 공유 불가능성은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의 자아와 언어, 그리고 세계를 부순다. 그래서 고통을 언어화하는 것은 그 불가능성만큼이나 필연적이다. 고통을 지각 가능한 대상/사물로 만드는 것은, 인류 문명사의 관점에서 볼 때, 몸으로 살아야 하는 인간이 자신의 취약성과 그로 인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인공물을 ‘창조하는 행위’ 일반으로 확장된다. 고문이나 전쟁 등은 그것의 반대인 ‘파괴하기’의 대표적인 예다.


인류의 역사는 취약한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는 ‘창조하기’의 예들뿐만 아니라 그 반대인 ‘파괴하기’의 예도 너무나 많이 보여준다. 창조하기를 통해 인간은 고통 중에 있는 자신과 타자를 구원으로 이끈다는, 창조하기는 근본적으로 아름답고 선한 행위라는 스캐리의 주장은 그래서 더욱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 일레인 스캐리 <고통받는 몸>(메이 옮김, 오월의봄, 2018)


창조하기: 고통에서 해방된 몸들의 세계


이런 세상을 한번 상상해본다. 통증과 고통에서 해방된 몸들이 인성과 지성이 넉넉한 도구들에 둘러싸여 서로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며 함께 어울려 사는 세상, 밝고 환한 몸들이 이어지고 이어지고 또 이어져 평화로운 상호의존과 여유로움이 넘치는 공존의 생태계를 이루는 세상 말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손과 마음과 지능을 사용해 무언가를 만들고, 아낌없이 나누며, 각자의 자아를 세상의 품으로, 아니 세상을 넘어 우주의 드넓은 품으로 확장시킨다. 내가 상상하고 만든 무엇인가가 몸의 물리적 한계 너머 풍요로운 삶으로 나를 이끌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삶에도 안전과 충족의 기쁨을 선사하는 이 생태계는 아름답고 건강한 세계, 궁극적으로 정의로운 세계이다.


스캐리의 <고통받는 몸: 세계를 창조하기와 파괴하기>는 바로 이러한 세상을 꿈꾼다. 꿈꾼다는 말이 적합하지 않을 정도로 그 가능성을 강하게 믿는다. 통증과 고통의 표현 불/가능성을 논하는 서론에서부터, 고문과 전쟁에서 벌어지는 창조하기의 역행, 즉 ‘파괴하기’의 문제를 다루는 1부와, 유대-기독교 성서와 마르크스 저작에 나타난 ‘창조하기’의 시도를 다루는 2부에 이르기까지. 책 전체는 세계를 만들면서 자신을 개조하고, 자신을 개조하며 더 나은 세계를 창조하는 인간의 창조 능력에 관한 믿음과 기대로 충만하다.


고문과 전쟁에서 너무나 명백하게 드러나는 파괴하기의 현실, 마르크스의 저작이 직면하고 있는 창조하기의 파행적 전개를 재구성할 때조차 스캐리의 믿음과 기대는 흔들리지 않는다. 창조 활동의 전체 구조 안에서 주기적으로 탈구가 일어나지만, 창조하는 노동은 창조하는 노동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함께 나란히 계속 전진할 것이라 확신한다. 이야기의 전통과 학문적 탐구, 거의 종교적인 확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글쓰기의 양식과 태도, 위치를 보여주는 이 책이 ‘담대하라’는 청유형 명령으로 끝나는 것은 그래서 전혀 이상하지 않다.


고통의 고립시키는 괴로움에 맞서, 정신·물질 문화는 감응력(sentience)을 공유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문화는 그 내부에 “용기를!”이라는 앰네스티의 속삭임을, 이 만국 공통의 인사를 담고 있으며, <이사야>에 나오는 고대 숙련공들의 암호를 우리에게 전한다. “담대하라!”(이사야 41:6) -일레인 스캐리 <고통받는 몸>


용기를 잃지 말고 담대하게, ‘만드는 노동’의 아름답고 가슴 벅찬 정의의 행렬에 가담하라는, 아니 가담하자는 이 청유형 명령은 멀게는 유토피아를 향한 인류의 오랜 소망을, 가깝게는 근대의 계몽주의적 기획을 환기시킨다. 스캐리가 믿고 강조하듯이 이 기획은 과연 오류가 아니라 미완에 머물고 있을 뿐인 것인가, 그렇다면 완수의 가능성은 과연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인가.


고통의 언어화: 고통으로 결속되는 몸


스캐리의 <고통받는 몸: 세계를 창조하기와 파괴하기>는 주로 고통 혹은 고통의 표현(불)가능성을 다루고 있는 서문으로 독자들에게 알려져 왔다. ‘고통받는 몸’의 부제가 ‘세계를 창조하기와 파괴하기’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고통에 관한 스캐리의 논의는 매우 정동적이며, 동시에 치밀하고 설득력 있는 통찰을 제시한다. 온 존재가 부서져 내리는 통증이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이라면, 있는지 없는지 의식할 필요도 없었던 몸이 갑자기 날카롭게 자기 존재를 주장하며 다른 모든 의식을 불가능하게 만들 때 자기(것)인 줄 알았던 바로 그 몸의 ‘배신’에 완전히 어리둥절해진 사람이라면, 스캐리의 고통 받는 몸에 관한 설명에서 위로와 탈주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만성통증 환자들이 보내준 그림 등 미술작품 사진을 전시하는 사이트 painexhibit.org에서 <고통의 자화상> 온라인 전시 이미지들


고통의 근본 속성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로써 조금이라도 고통을 견뎌낼 수 있게 되고, 더 나아가 고통을 소통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고통에 사로잡혀 있거나 갇혀 있는 모든 사람의 갈망이다. 고통이 심할수록, 그래서 고립의 벽이 높을수록 이 갈망은 타는 듯 강렬해진다. 몸의 고통 못지않게 이 심리적·언어적 갈망 또한 크나큰 고통이다.


모든 실존 영역을 몸이라는 장소로 축소시키고 ‘자기’라는 존재를 ‘단지 아픈 몸’으로 동결시키는 통증을, 마치 몸 안에 있는 어떤 독이나 무기인양 바깥으로 끄집어 내 다른 사람들도 지각할 수 있게 만든다면! 그렇다면 아픈 몸은 더 이상 ‘단지 아픈 몸’이 아니라 ‘아프면서, 아파도, 아파서 살고 있는 나 누구’의 정체성으로 통합될 수 있다.


스캐리가 대상화라고 부르는 이 언어화는 ‘고통 중에 살고 있는’(living in pain) 이들에겐 그 어떤 의료적 처치나 치료보다 중요하다. (만성통증 환자들이 보내준 그림 등 미술작품 사진을 전시하는 사이트 painexhibit.org에 올라오는 이미지들은 바로 이 대상화/언어화의 핵심 의미를 놀랍도록 선명하게 증거한다.) 이 갈망은 필요를 넘어 필연성을 띠고 솟구친다. 몸 안에 든 독이나 무기는 몸 밖으로 끄집어 낼 수 있을 때 어떤 선물이 되기도 한다.


고통의 변증법이 빚어내는 이러한 역설이야말로 ‘아픈 몸을 살아내는’ 사람들이 ‘몸의 뜻(the will of the body)을 따를 때’ 경험하는 범속한 트임이다.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At the Will of the Body, 메이 옮김, 봄날의 책, 2017)는 이에 대해 정서와 분석 모두에서 감동을 주는 뛰어난 증언이다.)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화가 프리다 칼로에게 그것은 ‘영감’이라는 선물이었다. 17살에 치명적인 교통사고를 당해 47살 삶을 마칠 때까지 (본인의 말을 인용하자면) ‘아픈 몸’이 아니라 ‘부서지는 몸’을 살아내야 했던 프리다 칼로는 <부서진 기둥 La Columna rota>(1944)을 비롯해 놀라운 자화상을 여럿 남겼다.


▶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 <부서진 기둥 La Columna rota>(1944)


<부서진 기둥>은 쩍쩍 갈라진 대지 한 가운데 서 있는 한 여자를 보여준다. 여자의 상체는 수직으로 갈라져 있다. 상체를 지탱시키는 척추 대신 그 안에 세워진 기둥조차 무너져 내리고 있고, 그 기둥과 상체를 흰색 가죽 붕대 띠가 함께 묶어주고 있다. 얼굴에도 몸에도 온통 못들이 박혀 있고,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떨어지고 있는 이 여자는 그러나 절망이 아닌 어떤 살고 있음(living)을 전하고 있다.


‘부서진 척추-기둥’에 지탱해서도 똑바로 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여자를, 고통 중에 살고 있는 한 존재를 만나게 된다. 그녀의 고통을 만지고 느끼게 된다, 아니 적어도 만지고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간절히 희망하게 된다, 만지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윤리적으로 각성하게 된다. 직면하게 된다.


그녀에게서 심지어 힘이 느껴지기에 이 직면은 경솔하고 표피적인 동정을 넘어선다. 고통으로 ‘결속되는’ 몸들의 세계를 향해 우리의 몸을 틀게 된다. 우리는 이제 이런 경험이 너무나 드물게만 일어나는, 가상현실보다 더 가상적인 현실을 살고 있다지만, 몸의 고통을 중심으로 맺어지는 이런 결속을 아직까지는 기적이라 부르고 싶지 않다. (2회에서 계속)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이 글은 일레인 스캐리의 <고통받는 몸>(메이 옮김, 오월의봄, 2018)에 쓴 발문을 조금 수정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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