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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수영복을 입을 수 있는 몸이야”
연말연시를 조금 더 즐겁게 해줄 영화 <덤플링>
※ 기사에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화장 안 한 얼굴과 노브라로 다니는 게 일상이 된 나에게 아직도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내 몸을 바라보는 일이다. ‘살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몸이 움츠려 들고, 먹는 거나 옷 입는 것에 바짝 신경이 쓰인다. ‘내 몸을 해치는 다이어트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뒤로 무리한 다이어트는 그만뒀지만 여전히 스트레스가 쌓이는 걸 막을 순 없다. 이런 나의 상태에 대해 누군가를, 특히 엄마를 탓하고 싶진 않지만 내가 나의 몸을 싫어하게 된 큰 원인 중 하나를 엄마가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어렸을 때 꽤 왜소했던 난 사춘기를 지나면서 급격히 살이 붙었다. 마른 몸을 가진 가족들 속에서 나의 몸은 유독 눈에 띄기 시작했다. 엄마의 잔소리와 내게 상처가 된 말들은 아마도 ‘걱정’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들을 들으며 난 나를 ‘뚱뚱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몸과 관련된 자존감은 늘 바닥이었다. 가족들 사이에서 난 ‘뚱’이라 불렸다. 그 말에 악의적인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유쾌하진 않은 별명이긴 했다.
여기에 그와 유사한 별명인 ‘덤플링’(dumpling, 동글동글한 형태의 물만두)이라고 불리는 소녀가 있다. 그런데 그를 덤플링이라 부르는 건, 학교에서 그를 괴롭히거나 놀리는 학생들이 아니라 바로 엄마다. 지역 미인대회에서 우승했던 과거의 영광을 안고 살면서 지금은 그 행사를 주관하는 일을 하는 엄마와 ‘뚱뚱한’ 딸의 관계를 그린 영화 <덤플링>(앤 플래처 감독, 2018)은 나에게 더할 나위 없이 위로가 되는 작품이었다.
▶ 영화 <덤플링>(앤 플래처 감독, 2018) 중에서. ⓒNetflix
‘미인대회’를 부수는 자들
<덤플링>은 작가 줄리 머피(Julie Murphy)가 2015년에 발간한 동일 소설이 원작이다. 10대 소녀 윌로우딘(다니엘 맥도날드 역, 이하 ‘윌’)은 자신을 ‘덤플링’이라 부르는 엄마가 짜증나고 싫지만, 그 별명에 기가 눌리진 않는다. 윌에겐 어떤 몸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알려준 이모 루시가 있고, 꼬마일 때부터 친구인 든든한 동지이자 베프 엘렌이 있고, 그리고 그들 셋이 함께 좋아하고 동경하는 가수 돌리 파튼(Dolly Parton)이 있기 때문이다. 윌은 오히려 ‘전형적인 아름다움’에 목메는 엄마 로지(제니퍼 애니스톤 역)를 이해하지 못하며, 엄마가 하는 일들이 의미 없는 거라 여긴다.
하지만 이모 루시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윌의 세계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언제나 자기에게 필요한 조언을 주었고 이 세상을 아름답고 빛나게 느낄 수 있게 보호막을 쳐 준 존재가 사라진 탓이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복귀한 개학 첫 날, 윌은 ‘뚱뚱하다’는 이유로 친구 밀리를 괴롭힌 남학생의 ‘거시기’를 힘차게 차 버리고 징계를 받는다. 이 일로 윌과 엄마 로지가 다투게 되는데, 로지는 ‘정상적인 몸’을 가지는 것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루시가 죽은 것은 비만인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말까지 뱉어버린다.
윌과 로지의 관계는 계속 삐거덕거리고, 이모를 그리워하던 윌은 루시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16살인 루시가 쓴 미인대회 참가서를 발견한다. 제출하지 못한 그 참가서를 보면서, 윌은 어떤 전의를 불태우게 된다. 금발의 날씬한 몸매와 예쁜 얼굴을 가진 여성들만 참가하는 미인대회에 나가기로. 그 ‘정상적’이고 ‘전형적’인 아름다움에 맞서기로 말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 액션엔 함께 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베프 엘렌은 윌을 지지하기 위해, ‘뚱뚱한’ 밀리는 어린 시절 꿈을 이루기 위해, 성별 이분법에 저항하는 캐릭터로 나오는 한나(벡스 테일러-클로스 역, 실제로 이 배우는 자신을 논-바이너리로 정체화하고 있다)는 저항의 목적을 가지고 윌과 함께 미인대회에 참가한다.
▶ 영화 <덤플링>(앤 플래처 감독, 2018) 중에서. ⓒNetflix
그러나 미인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다. 윌은 여전히 자신을 거부하는 것 같은 엄마를 보며 힘겨워 한다. 또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훈남 보와의 키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윌이 몸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 되는 계기가 된다.
미인대회를 전복시키겠다던 의지도 사라지고 한없이 작아져 가던 윌이 기댈 수 있는 건 여전히 죽은 루시 뿐. 루시의 유품에서 “돌리 파튼 나잇”이라는 홍보 전단지를 발견한 윌은 밀리, 한나와 함께 그 행사가 열리는 장소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 클럽에서 돌리 파튼 음악과 함께 열리는 드랙퀸 쇼를 보게 된다. 새로운 세상을 본 것 같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윌 앞에 나타난 드랙퀸 리는 루시와의 인연을 말해주며 자신을 무대 위로 오르게 한 루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털어놓는다.
윌이 친구들의 도움을 얻고 함께 성장하며 미인대회에 참가하고 대회를 끝내기까지 과정 속에서, 영화는 소소하지만 세심한 부분에서 ‘전형적’ 미인대회의 모습에 균열을 낸다. 그 발견의 과정 또한 큰 재미임으로 그 부분은 보는 이의 몫으로 남겨둔다.
여성들의 우정과 사랑이 가득한 영화
영화의 엔딩이 미인대회가 엉망이 되거나 박살이 나는 내용이 아니라서 아쉬움을 느끼는 관객도 있을 것 같다. 그랬다면 통쾌했을 것 같지만, <덤플링>의 주요 관계의 축이었던 윌과 로지의 관계 또한 엉망으로 끝이 났을 거다. 엄마와 딸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한 채 서로에게 등을 돌렸을지 모른다.
▶ 영화 <덤플링>(앤 플래처 감독, 2018) 포스터. 줄리 머피의 동명 소설(2015)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Netflix
<덤플링>은 사회가 원하는 여성으로서의 삶과 아름다움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던 시절, 거기에 순응했던 여성들과 그 사회의 통념에 저항하며 어떤 모습이든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여성들의 대립이 아닌 화해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다름에도 서로 다가갈 수 있다고 말이다.
나에게는 그 부분이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미덕으로 보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영화엔 다양한 여성들의 우정과 사랑과 관계가 나온다. 윌과 로지(딸과 엄마), 윌과 루시(조카와 이모), 루시와 로지(자매), 윌과 엘렌, 윌과 밀리 그리고 한나, 윌과 드랙퀸들. 이 관계는 서로를 완성시키며 조화를 이룬다.
또한 ‘틴에이저물’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일명 ‘예쁜데 싸가지 없고 질투 많은 여왕벌’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을뿐더러, 미인대회에 참가한 다른 여학생들 중 그 누구도 윌이나 밀리, 한나를 괴롭히거나 놀리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건, 원작자인 줄리 머피, 감독 앤 플래처(Anne Fletcher), 극본을 쓴 작가 크리스틴 한(Kristin Hahn)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과 분명 관련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배우이자 프로듀서로 영화에 참여한 제니퍼 애니스톤은 작가 크리스틴 한과 실제 베프인 걸로 유명하다. 두 사람은 함께 상업영화를 작업한 일이 없었지만 이 영화를 계기로 첫 합작영화를 남겼다. 영화의 안과 밖의 여성들의 우정이 이 영화를 만든 토대인 것이다.
살아있는 전설, 돌리 파튼에 대한 헌사
영화에 직접 등장하진 않지만 수많은 노래들로 함께하는 돌리 파튼은 <덤플링>을 이끌어 가는 인물 중 하나다. 올해 나이 만 72세, 여전히 활동 중인 컨트리 가수 돌리 파튼은 1967년 발매한 첫 번째 솔로 싱글 <Dumb Blonde> 이후 수많은 상과 기록을 남긴 살아있는 전설이다. (관련 기사: 네 개의 팝송으로 듣는 1960년대 팝 페미니즘 http://ildaro.com/7986)
“넌 날 멍청한 금발이라 부르지. 하지만 난 어떻게든 살아왔어. 그리고 내가 금발로 살면서 배운 게 뭔지 알아? 금발들이 인생을 즐길 줄 안다는 거야”(Dumb Blonde)라며 ‘멍청한 금발’ 여성에 대한 미국 사회의 통념을 비꼬고, “내가 실수한 거 알아, 하지만 한번 생각해봐. 내 실수는 네가 한 실수보다 더 심한 게 아냐. (그렇게 여겨지는 건)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지”(Just Because I'm a Woman)라는 노래를 1960년대부터 쓰고 불러 온 돌리 파튼은 그 시대 페미니스트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인물이기도 하다.
▶ 영화 <나인 투 파이브>(콜린 히긴스 감독, 1980) 포스터 ⓒ20th Century Fox
또한 성차별적인 회사와 성희롱을 일삼는 남성 상사에 맞서는 내용을 유쾌하게 담아 내 많은 여성들의 공감을 산 코미디 영화 <나인 투 파이브>(Nine to five, 콜린 히긴스 감독, 1980)에서 릴리 톰린(Lily Tomlin), 제인 폰다(Jane Fonda)와 함께 주연을 맡아 배우로서의 능력을 보이기도 했다. 돌리 파튼이 부른 영화의 주제곡 <나인 투 파이브>(Nine to Five)가 페미니스트들의 사랑을 받았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영화 시작 후 얼마 되지 않아 등장하는, 차 안에서 윌과 엘렌이 신나게 <Dumb Blonde>를 부르는 장면에서 이 10대 소녀들에게 돌리 파튼이라는 가수와 이 노래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드러난다. 영화 내내 돌리 파튼의 말이 인용되고 그의 명곡 플레이리스트가 울려 퍼지는 이 영화는, 테네시 주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노동자 계층의 12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그 시절 여성들이 겪어야 했던 차별과 역경을 이겨내고 자신의 꿈을 이룬 돌리 파튼에게 존경과 사랑의 메시지를 보낸다.
힘이 절로 나는 <덤플링> OST
최근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브라이언 싱어 감독, 2018)가 음악영화의 매력을 과시하며 크게 흥행하고 있는 시점이라, 그러한 흐름을 타고 이야기해보자면 <덤플링> 또한 매력적인 음악영화다. 컨트리 음악인 돌리 파튼의 노래가 국내에선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워낙 명곡들이 많기 때문에 완전히 낯설진 않을 거다. ‘어디선가 들어봤는데…’ 싶다가 어느 순간 노래를 같이 흥얼거리게 될지 모른다.
▶ 영화 <덤플링>(앤 플래처 감독, 2018) 중에서. ⓒNetflix
영화 공개와 함께 이번에 발매된 <덤플링>의 OST엔 돌리 파튼의 명곡들뿐만 아니라 시아(Sia), 엘르 킹(Elle King), 미란다 램버트(Miranda Lambert) 등 현재 활발히 활동하는 팝/컨트리 여성 가수들이 돌리 파튼과 함께 작업한 곡들이 담겨있다. OST마저도 여성들의 연대로 가득하다. 영화를 본 뒤 OST를 계속 반복해서 듣고 있는데, 노랠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힘이 난다.
이제 한 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내년을 준비하는 많은 이들에게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덤플링>은 이 시기에 혼자 혹은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봐도 손색이 없는 영화다. 미인대회 무대에서 수영복을 입은 윌과 엘렌이 함께 서서 보여줬던 “모든 사람은 수영복을 입을 수 있는 몸이야”라는 메시지가 더 많은 소녀들과 여성들에게 전달되기를. 그래서 새해엔 몸과 관련된 여성들의 더 많은 이야기들이 나올 수 있기를 바래본다. (박주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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