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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문화예술 비평’의 학교

김영옥의 <이미지 페미니즘─젠더정치학으로 읽는 시각예술>


※ 이 기사의 필자 오혜진 님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공저), <그런 남자는 없다>(공저), 「퇴행의 시대와 ‘K문학/비평’의 종말」 등의 책과 평론을 쓴 문화연구자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페미니즘 문화비평이 할 수 있는/없는 것


근래 나는 ‘페미니즘 문화비평이란 무엇일까, 가능할까, 어떻게?’라는 질문에 거의 강박적으로 사로잡혀 있다. 이를테면 이런 문제들 때문이다. 최근 각성된 독자/관객들에 의해 문화예술계 전반에 만연한 남성 중심적 권력 관계와 미적 기율 등이 폭로되자 취해진 가장 손쉬운 대응은 ‘가해 등의 문제가 있다고 고발된’ 창작자의 작품을 발 빠르게 삭제・철회・취소해버리는 것이었다.


작품의 특정 문구나 장면의 묘사를 들어 해당 작품의 여성혐오 혐의를 고발하는 사례들이 줄이었고, 문학사의 정전으로 간주돼온 (남성작가들의) 작품들에서 남성인물을 여성인물로 바꿔 ‘다시 쓰기’하는 시도도 행해졌다. 혹은 아예 기존 문화예술이란 결국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된 것일 수밖에 없으니, ‘여성들의 작품으로만’ 이루어진 페미니즘 문학사・문화사를 기획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이것은 페미니즘 문화비평인가?


지금 언급한 이 모든 시도들을 예술에 대한 ‘단선적’이고 ‘표피적’인 해석일 뿐이라거나, ‘극단적인 정체성 정치’ 혹은 ‘정치적 올바름’에 사로잡힌 결과라고 매도하는 일군의 반동적인 해석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시도들이 페미니즘 문화비평일 수 있는 가능성을 선험적으로 기각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늘 조금 더 묻고 싶었다. 이것은 최선인가.


‘생물학적 여성-임’(기실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것조차 자명한 실체가 아니다. 인간의 성이 ‘남성’과 ‘여성’ 두 종류만으로 뚜렷하게 구분된다는 점을 증거하는 ‘표준형’ 성기 모양이라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 최근 연구에서 밝혀진 바 있다. -루인, ⌜남성 신체의 근대적 발명⌟,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 교양인, 2017)이 곧 ‘페미니스트’임을 보증할 리 없고, 정전에 설정된 인물의 성별을 기계적으로 바꿔보는 일이 가부장제의 미적 기율들이 구성되는 원리와 심급에 대한 발본적이고 정교한 질문 방식이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물론 아무리 ‘기계적인’ 성별 스위칭이라 하더라도, 단순하고 기계적인 전환 그 이상의 효과가 산출될 수 있다).


무엇보다, 특정 창작자가 ‘가해자’로 지목되는 순간 가해자와 연루된 창작물들이 마치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문화예술장에서 삭제될 때, 나는 죄 지은 것은 ‘그’인데 형벌을 받게 된 것은 ‘나’라고까지 느꼈다. ‘무지에의 강요’라는 형벌.


나는 그 작품들이 고양된 페미니스트 의식을 장착한 독자-대중에게 이전과는 다른 의미의 지적 자원이 되기를 바랐다. 이전과는 다른 독자대중의 새로운 문제의식과 감수성으로 인해 해당 작품은 기존의 안정적인 미적 지위에서 이탈해 전혀 다른 의미망에 놓이게 될 테고, 바로 그런 현상들과 상호 영향 관계를 형성하며 갱신될 페미니스트 독자-대중의 지적 궤도를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창작물들을 가해자와 연루됐단 이유만으로 모조리 삭제해버린다면, 우리는 우리의 지성이 갱신되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그것들의 소멸은 우리의 사유를 나아가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멈추게 한다. 이것이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문화예술에 페미니즘 비평이 개입하는 유일한 방식일까. 더 나은 방식이 있을 것 같았다.


▶ 김영옥 지음 <이미지 페미니즘>(젠더정치학으로 읽는 시각예술, 미디어일다, 2018)


이런 곤경 앞에서 김영옥의 글을 자주 떠올렸다. 그가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 연재한 ‘오지 않는 미래의 발견’ 시리즈로부터 배웠던 것들. 예컨대 김훈의 소설 「언니의 폐경」(2005)에서 엉뚱하게 묘사된 ‘월경’의 순간, <공터에서>(2017)에서 유아여성의 성기에 대한 도구적인 천착 등이 김훈 특유의 ‘유물론적 미학주의’라거나 “여자를 생명체로 묘사하는 것은 할 수 있지만 어떤 역할과 기능을 가진 인격체로 묘사하는 데 나는 매우 서툴러요.”(「김훈 “여성을 인격체로 묘사하는 데 서툴지만 악의는 없다”」, 뉴스1, 2017년 6월 7일)라는 작가의 위선적인 변명으로 설명될 때, 혹은 그런 사례들이 김훈의 여성혐오를 인증하는 강력한 증거로서 운위될 때, 페미니즘 문학비평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문제는 필연성이다. 꼭 벗어야 하는가. 벗는다면 어떤 벗음이어야 하는가. 누드 포즈인가 아니면 실존적 헐벗음인가. 실존적 헐벗음이어도 꼭 성기를 노출시켜야 하는가. 노출시킨다면 그때 카메라 앵글은 어때야 하는가. (중략)


보여준다, 무엇을 어떻게? ‘항문의 괄약근이 열려서 수시로 똥물이 흘러내리는 환자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닦아주는 장면’을 ‘보게’ 하려면 카메라를 어디에 맞춰야 하는가. 그 통제 불능의 와중에도 수치심에 떨면서 울면서 ‘미안해’라고 말하는 ‘그녀’의 실존적 고통과 그런 그녀를 지켜보며 씻기는 ‘그’의 실존적 고통 둘 다를 보여주려면 무엇을, 어디를 어떻게 보여줘야 하나. 혹은 무엇을, 어디를 ‘보여주지 않아야’ 관객들이 더 통렬하게 더 깊은 ‘봄’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누구의 고통에 더 윤리적으로 섬세하게 감응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다.> (김영옥, 「‘철들지 않은 남자들’이 나이듦을 논할 때: <오지 않은 미래의 발견> 「화장」의 남자들②」, 일다, 2016년 11월 30일)


적어도 나는 그때 김훈을 배척해야 할 ‘한남소설가’의 명단에 추가하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좀 더 있기를 바랐다. 만약 그때 우리가 ‘리얼리티’의 반영을 위해 ‘투병하는 아내의 똥을 싸는 성기를 보여주어야만 했다’고 주장한 영화 <화장>(임권택, 2014)과 김훈의 원작소설 「화장」(2004)에 대해 김영옥이 제기했던 위와 같은 정교하고 구체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면.


김영옥의 글은, 타당하고 진정성 있지만 끝내 교조적이고 당위적인 구호로 귀착되곤 하는 페미니즘의 ‘진리’ 혹은 페미니스트라면 응당 가져야 할 ‘입장’이나 ‘결론’ 같은 것을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대신 그의 글이 내게 알려준 것은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질문을 만들고 던지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언젠가 여성학자 정희진이 김영옥을 “한국사회에서 몇 안 되는 자기만의 문체를 가진 지식인”(정희진, 「무연(無緣) 사회」, 한겨레, 2017년 4월 7일)이라고 소개했을 때, 내 나름의 이유로 망설임 없이 동의할 수 있었다. 김영옥이 지닌 “자신만의 문체”란, 그가 제대로 된 ‘질문’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라면 대사상가의 이론, 필부의 한마디, 자신의 주관적 체험 등 모든 이론적・정서적 자원들을 편견 없이 호출함으로써 위화감 없이 망라하게 된 다채로운 문장들을 일컫는다고 생각했다.


‘여성/주의 미학’의 문제 설정과 방법론


십여 년에 걸쳐 쓴 글들을 모은 김영옥의 노작 <이미지 페미니즘─젠더정치학으로 읽는 시각예술>(미디어일다, 2018)을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만났다고 생각한 것은 그 때문이다. 서문에서 저자는 이 책을 “문화연구의 방법론으로 이미지들에 다가간 글들”이라고 소개한다. 그간 제도화된 학적 영역으로서의 ‘미학’이 지닌 “고립된 문법체계”로부터 탈주해 “‘미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그리고 ‘윤리적인 것’”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선택된 비판적 지지대가 “페미니즘 입장”과 “젠더 관점”이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여성/주의 미학”의 가능성을 모색한다는 이 책의 문제 설정을 위해 저자가 염두에 둔 인식론적 전제는 두 가지다. “모든 담론이 남성 중심의 의미경제 체계 안에 갇혀 있다면 그 안에서 여성에게 부여된 그 어떤 주체적 위치성도 유효하지 않다”는 것과, “그래서 역설적으로 여자는 수많은 여자들로, 즉 하나가 아닌 주체로 존재한다”는 것. 이 책에 등장하는 작품들에 대한 저자의 판단을 가늠해보면 드러나겠지만, 저자는 이 두 명제에 대한 사려 깊은 통찰을 통해 해당 작품이 지닌 전형성과 전복성을 동시에 짚어낸다.


이 ‘동시에’라는 점이 중요한데,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김영옥의 비평에서 작품들은 페미니즘의 목적의식 아래 일방적으로 동원되는 질료로 취급되거나 위계화되지 않을 수 있었다. 모든 좋은 비평이 그렇듯, 저자가 관심 있는 것은 특정 작품이 여성/주의 미학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판별하는 일이 아니다. 어떤 조건과 맥락에서 작품과 관객이 수행하는 미학적 상상력의 급진성과 임계가 드러나는지를 설명하는 일이다.


저자는 작품들이 (무)의식적으로 기대거나 벗어나려 한 담론적・인식론적 전선을 섬세하게 복원함으로써 작품들이 최대한 풍성한 의미망을 거느릴 수 있도록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작품들이 작가 개인의 자기만족적 결과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시공간에 놓여 다양한 사회적・역사적 담론과 호환 가능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저자의 이런 성실하고 애정 어린 작업 덕분이다.


이 책이 다룬 작품이나 전시를 거의 보지 못했고 미술(계)에 과문한 내가, 그럼에도 ‘보지 못한’ 작품세계에 접속하고 이 책에서 뭔가 배울 수 있었던 것 또한 그렇다. (나처럼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작품들을 접하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이 책은 논의에 꼭 필요한 작품들의 도판들을 적재적소에 과도하지 않을 정도로 배치해두었다.) 이 모든 배려는 저자가 미술을 사랑하는 방식에 힘입은 것이다.


▶ 김영옥의 <이미지 페미니즘: 젠더정치학으로 읽는 시각예술>은 작품을 접하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논의에 꼭 필요한 작품들의 도판을 책 속에 배치해두었다.


이 책은 총 6부에 걸쳐 “장소/성과 타자/성, 포스트 모더니티, 포스트 콜로니얼의 시공간, 디지털 구술문화호서의 스토리텔링,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성미학의 가능성”을 구명한다. 책을 통독해보면 ‘전통’적이고 ‘정통’적인 인문교양 지식부터 최근의 사회적 이슈와 현안들까지 망라하는 저자의 폭넓은 시야와 교양에 감탄하게 되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것의 ‘넓이’라기보다는 ‘깊이’다. 저자는 해당 사안에 대해 현재까지 제출된 ‘견해’들이 도달한 가장 급진적인 지점과 함께 그것들이 멈춘 곳 또한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바로 그곳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이를테면 ‘동두천’을 기반으로 수행된 정은영・김동령의 작업을 비평하면서 저자는 “한국인과 미국인, 다시 말해 포주/업주 및 지역민, 기지촌 여성, 미군이 함께 만들어낸 다인종・다문화 지역이었던 동두천은 이제 지구/지역 차원에서 계층의 차이를 신체로 드러내는 장소가 되었다”며 전 지구화된 후기 식민주의 성정치의 한 단면을 포착해낸다.


그런데 해당 장소와 “심리적 애착관계를 이루고 살아온 사람들의 구체적 삶”을 소외시키지 않는 것이 “지역(문화)운동”으로서 예술실천이 지닌 윤리적 심급이라고 할 때, 그렇다면 ‘동두천’과 같은 장소에서 ‘인종화・프롤레타리아화된 섹슈얼리티 노동(이진경 저, 나병철 역, <서비스 이코노미─한국의 군사주의, 성 노동, 이주 노동>, 소명출판, 2015 참조)을 수행하는 여성들의 이동과 그 (비)주체성은 어떻게 설명돼야 할까.


이 대목에서 ‘성매매’를 둘러싼 페미니스트들의 분분하고도 첨예한 논의를 떠올릴 수 있을 텐데, 바로 그것을 염두에 둔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여성들이 경계를 넘을 때, 그러한 경계 넘기는 많은 경우 몸/섹슈얼리티를 매개로 해서 이루어진다. (…) 여성들이 떠남과 이동, 움직임을 스스로 선택하는 주체의 위치에 있다고 해도 그 선택은 전 지구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저자의 이런 견해는, 이후 단순한 가시화나 임파워링이 아니라 “독해 불가한 ‘소리들’로 이루어진 이미지”를 통해 동두천 ‘언니들’의 “불확실한 삶”에 깃든 “인간적인 것”을 재현하려 한 정은영의 작업에 한층 입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한다.


이처럼 페미니스트들의 치열한 논쟁을 일으킨 결정적 모먼트를 회피하지 않고 끝내 작품의 선택과 자신의 견해를 설득해내려는 저자의 노력은 다른 글에서도 발견된다. 저자는 ‘노동사’를 남성화하는 데 일조한 그간 미디어운동의 몰성성을 비판하면서, 여성노동 현장에서 운위되는 ‘아줌마’라는 호칭의 딜레마와 이를 둘러싼 전략들을 차분하게 점검한다.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아줌마’라는 호칭을 통해 여성노동자의 주체성을 삭제하거나 부차화하려는 일체의 시도에 대해 ‘응답하기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방식으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아줌마’라는 명명이 정확하게 이들을 향해 발화되고 있다면, 이들은 그 호명에 대해 고개를 돌려 응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응답하면서 자신들이 지금 펼치고 있는 행동의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일종의 전유이고 가면극인 것이다. 응답하지 않는다면 ‘아줌마’라는 기표가 담고 있는 이데올로기를 무시할 수는 있겠지만 대화나 협상, 저항의 가능성 또한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이 ‘아줌마들’은 제대로 잘 알고 있다.”라며 다큐멘터리 <외박>(김미례, 2009)이 기록한 이랜드 기혼/여성/비정규 노동자의 전략적 선택을 신중하게 지지한다.


▶ 이랜드 비정규노동자의 저항을 담은 김미례 감독의 다큐멘터리 <외박>(2009)


오랜 도그마로 간주돼왔으면서도 일종의 “아방가르드”(박찬경)이기를 꿈꾸는 ‘포스트 민중미술’의 전통과 가능성을 심문하는 장면도 인상 깊다. 일단 저자는 어떤 에두름도 없이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 궁극적으로 문화민족주의로 수렴하는 결과를 막지 못했다”는 것이야말로 민중미술의 패착임을 간명하게 진단한다. 그러고는 “새로운 문화적 통합성의 전달자로서 민중미술 생산자들이 생산한 ‘역사’ 이미지들은 독재적 통치성의 합리화를 위해 국민국가의 관제 민족주의가 만들어낸 역사 이미지의 대안일 수 있었는가?”라고 신랄하게 따져 묻는다. 이 질문야말로 ‘포스트-민중미술’ 시대에 제출되는 작품의 정치성을 판단하는 저자의 ‘인식의 기준’임을 확인하게 되면, 이후 신학철・고승욱・김상돈의 작업에 대한 저자의 비평적 판단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게 된다.


페미니즘 지식이 특정 작품의 미학과 만날 때


무엇보다 이 책의 백미는 기존 페미니즘 지성사에 등재된 지식과 교양이 특정 작품의 미학적 기획과 만나 충돌하거나 변주되는 장면을 포착하는 데 있다. 우리는 여성성, 남성성, 퀴어, 젠더수행성, 공사분리, 에코페미니즘 등에 대해 조금씩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에서 독자는 그 개념들이 특정 작품들을 만나면서 불투명해지는 경험을 하거나, 혹은 그 개념들로 세계를 설명하려 할 때에는 훨씬 더 신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컨대, “전신에 과도하게 문신을 새김으로써 군대에 가지 않은/못하는 남성들과 작업한” 작가 김준에 대한 비평은 독자들로 하여금 ‘문신-군대-국가/아버지’ 등으로 이어지는 ‘남성성’과 관련된 일련의 연쇄적 이미지들에 대한 정형화된 독해를 조금 비틀어볼 것을 요청한다. 흔히 ‘과도한’ 문신은 ‘과도한’ 남성성/마초성의 과시적 표현으로 간주되기 쉽지만, 저자가 포착하는 것은 “과도한 남성성에 토대를 둔 가부장제 사회에서 군대에 가지 ‘않는다/못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규율화된 남성성의 ‘거세’를 함축”하게 된다는 역설이다.


“전신에 문신을 새김으로써 ‘군대에 가지 않는 것을 선택’한 이들”을 “‘아버지의 아들’이, 국가의 일등국민이 되는 것을 거절한 남성들”로 재의미화해내는 이 독해는 남성성을 작동하게 하는 ‘장치’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남성성’이 그 자체로 균열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신화임을 간파하도록 단련된 “페미니스트 호기심”(신시아 인로)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 배찬효, 2007, Existing in Costume 5


제1세계 영국에서 ‘아시아-남성-이주민’으로 분류되자 ‘남성’이라는 자신의 헤게모니적 정체성의 자명성을 ‘복장 도착’이라는 장치를 통해 실험해보는 배찬효의 작업에 대한 저자의 독해는 그야말로 절창이다. 중세 영국 귀족 여성의 복장을 입은 자신을 찍은 배찬효의 사진이 자아내는 ‘기이한’ 정조는 언뜻 느끼기에 매우 ‘퀴어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런 감각은 독자로 하여금 곧 그의 사진을 ‘남성’이나 ‘여성’, 혹은 ‘귀족’이나 ‘노동자’와 같은 ‘정체성 신화’의 수행성과 인위성을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간편하게 이해하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서 판단을 그치기를 부드럽게 거절하며, 이 작품이 돌파하고 있는 의미망을 점검하기 위한 질문들을 하나씩 만들어나간다. 우선 저자는 배찬효의 사진이 유발하는 ‘퀴어한’ 정서가 “갈등을 일으키는 젠더(gender trouble)” 혹은 “퀴어”와 무관하다는 점을 분별해낸 다음, 그 정서는 모종의 ‘불편함’임을 감지해낸다. 그 ‘불편함’은 배찬효의 사진이 “일반적인 복장도착의 법칙”을 따르면서도 그것을 슬쩍 거스르는 데서 온다. 이 법칙에 의하면 “권력구조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위장하면 웃음을 자아내고, 그 반대의 경우면 비장함이나 그에 못지않은 긴장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배찬효의 사진은 ‘아시아-이주민’이 ‘유럽-귀족’의 복장을 했다는 데서는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분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남성이 여성의 복장을 입었다는 점에서는 그 반대다. 따라서 그의 사진은 크게 비장하지도 웃기지도 않다.


저자는 어느 쪽에도 수렴되지 않는 이 ‘불편함’을 유발하는 것이 사진 속 “하얗게 분칠된 얼굴”과 “명백한 남자 손”임을 알아낸다. 전자가 그의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을 지울 뿐만 아니라 성적 욕망도 지우기 때문”에 불편함을 자아낸다면, 후자는 이런 ‘소수자-되기’가 일종의 “유희”임을, 즉 이 모든 것을 남자-배찬효의 “이 손이 연출했음”을 알리는 기호다.


그리하여 저자는 “젠더정치학은 여성과 남성에 관한 것이 아니다. 여성/성이나 남성/성이 상징적 가치체계 내에서 즉 권력구조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관한 것”이라는 명제를 상기하면서, “남성/성에 대한 환상을 (혹은 신화를) 100% 완성시키는 남자는 그 어느 곳에도 없지만, 남성/성은 쉽게 여성/성으로 전환되기도 하지만, 또 그렇게 쉽게 여성/성으로 전환된 남성/성은 손상된 상태에서도 (그 전환이 강제적인 것이었을 경우 더욱더) 절대 남성/성이기를 포기하지 않고 자기 존재를 과잉으로 드러낸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새롭게’ 가르쳐준다.


이처럼 자명해 보이는 ‘시각-이미지’를 젠더정치에 관한 일종의 수수께끼로 만들어, 그것으로 하여금 독자가 제도화된 지식을 기계적으로 적용해 내리는 “속단”을 유유히 비껴나가게 만드는 것. 작품을 이렇게 흥미진진한 질문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 이것은 비평이 할 수 있는 가장 흥미진진한 일이 아닌가.


▶ 윤석남, 2008, 1025;사람과 사람없이


한편, 이 책을 대표하는 글을 꼽으라면 나는 윤석남의 ‘나무-개’ 작업과 김미루의 ‘동물-미메시스’ 연작에 대한 글을 꼽겠다. 이 두 편의 글은 함께 읽으면 더욱 좋을 맞짝인데, ‘동물(권) 우화/정치’에 대해 일관되고 타협 불가능한 저자의 철학을 읽을 수 있을뿐더러, 저자가 상상하는 근본적인 ‘세계혁명’에 대한 상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윤석남의 ‘나무-개’ 작업에 대한 글 「손들의 공동체: 예술가의 직관, 페미니즘과 공명하다」는 자신의 작업이 싸우려는 가치가 뭔지 잘 알고 있는 지혜로운 작가와 눈 밝은 비평가가 나누는 행복한 대화처럼 여겨질 정도로 이상적이고 아름답다. 이 글에서 저자는 1천여 마리의 유기견을 돌보는 이애신의 ‘개 농장’을 보고 5년을 바쳐 1025마리의 ‘나무-개’를 조형해낸 윤석남의 작업이 부딪칠 수 있는 함정을 먼저 점검한다.


저자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우화를 비롯해 ‘동물의 인격화’를 시도하는 대부분의 표상과 플롯은 기실 “복잡하게 얽힌 정신적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이 추구하는 어떤 원형적 ‘천진함’에 대한 향수를 반영하고 그로써 인간과 동물, 두 종 모두의 자율성을 침해하기 십상”이라는 것, 즉 그것은 언제나 ‘인간을 위한 은유로 소비’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윤석남의 ‘나무-개’가 결코 “목가적 교훈담”이나 “소비자본주의 사회 문화산업의 스펙터클”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작가 또한 “결국은… 사람들이 버려진 개에 대해 측은지심을 느끼고, 그 정도에 불과한 거야. 더 깊은 게 안 보이는 거야.”라는 회고에서 보듯, 자신의 작업이 관객의 자기만족적인 위안을 호출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닌지 조심스럽게 검토한다.


그리하여 저자의 관심은 “동물과의 공생을, 은유의 세계가 아닌 현실 속에서, 동물과 인간 두 종 모두에게 가장 공정하고, 두 종 모두의 자율을 허용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함께 거주하는 동물에 대한 개념을 애완동물(pet)에서 반려동물(companion animal), 그리고 더 나아가 반려 종(companion species)으로 확장하는 것”이 에코페미니스트들이 시도하는 가장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기획일 수 있는 것은 그래서다.


▶ 김미루, The Pig Therefore I Am


저자가 “돼지우리에 들어가 돼지와 함께 피부를 맞대고 엎드리거나 기”는 자신의 모습을 찍은 김미루의 사진 작업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도, 그 사진에서 “돼지는 ‘인간의 무엇’을 위한 은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가 자신과 오랜 기간 함께한 고양이에게 물려 염증으로 부어오르는 손등을 보며 실감한 것도 그것이었다. “녀석이 나와는 다른 종의 동물”이라는 점, 즉 “메꿔질 수 없는 타자/성의 절대적 낯섦”. “타자와 소통하고 교감하며 ‘하나’가 되어 울고 웃는다는 것은 바로 그 절대적 낯섦과 다름의 배경 하에 가능 아니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도달하는 저자의 이 서늘한 사유는 마치 정해진 노래처럼 어떤 조건에 대한 고려도 없이 ‘화합’과 ‘연대’, ‘공감’을 최종 결론으로 내세우는 진보적 내러티브들의 최근 경향에 비해 얼마나 믿음직한가.


‘불완전한 사랑’으로서의 비평


물론 저자의 이런 마법과도 같은 사랑의 비평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작품들을 다 사랑하게 되지는 않았다. 예컨대 우리가 흔히 ‘전형적인 여성성’이라고 간주하는 가치들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간직하게 되는 어떤 저항성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나는 “물의 성스러움에 감염”됐다든지,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여자의 시간이 자연의 시간과 마찬가지라는 거다. 신비롭고 영적이다.”와 같은 창작의도를 ‘여성/주의’적인 것으로 스스로에게 설득할 의욕이 없다. ‘여성국극’에 대한 정은영의 재해석을 젠더의 수행적 성격을 포착하고 이를 ‘페미니즘 아트’의 새롭고도 강력한 레퍼런스 기입 의지로 읽은 바 있는 저자가 ‘잉태와 출산’을 매개로 여성(성)을 자연화하는 작가 류준화의 기획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좀 더 들어보고 싶었다.


또한 저자는 ‘좋지도 나쁘지도 이상하지도 않은 비평’을 통해 “전시장에서 관람객 사이에 있는 ‘창녀’를 찾으면 현상금을 주겠다”고 제안함으로써 ‘창녀와 성매매여성 사이의 간극(없음)’을 질문하려 했던 전력이 있는 김홍석의 작업에 대해 매우 유보적으로 서술하기도 했다. 저자는 끝내 김홍석 작가가 “견해를 촉발”한다는 점에서 “아티스트가 맞다”는 것으로 글을 끝맺었지만, 그가 아티스트인지 아닌지는 나에게 의미가 있는 물음은 아니기에, 나는 여전히 김홍석 작업에 제기된 미학적 상상력의 부주의한 폭력성 혐의를 거두지 못했다. 이 작품들은 저자의 사려 깊고 아름다운 문장들에도 불구하고 나를 미학적으로 설득해내는 데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것들이 바로 저자와 우리 모두가 만나게 되는 미술적 ‘곤경’임을 알려줬다는 점에서는 유익했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가졌던 의구심 중 하나는 ‘이미지 페미니즘’이라는 제목에 대한 것이었다. 고백하건대 이 제목을 처음 본 순간, 한 번에 기억되는 멋진 제목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조금 넌센스라고 여겼던 것 같다. ‘이미지 페미니즘’이 뭐지? 이미지에는 시각・청각・미각・후각・촉각 등 다양한 이미지가 있는데 이 책은 대부분 “시각예술” 텍스트만을 다루면서 어째서 ‘이미지’의 이 광활한 스펙트럼을 고려하지 않았나. 혹은 그림이나 영상 같은 이미지를 대상으로 ‘페미니즘 비평’을 시도하는 것이 곧 ‘이미지 페미니즘’이라면, 소설이나 평론과 같은 문자언어를 비평의 대상으로 삼아온 나는 지금까지 ‘텍스트 페미니즘’을 연구해온 것이었나? 혹은 ‘이미지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을 바에야, 이 책은 차라리 ‘페미니즘 이미지’, 그러니까 ‘여성/주의 미학’에 도전하는 이미지들에 대한 이야기로 인식돼야 하지 않을까 등의 잡감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 책을 덮는 순간, ‘이미지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반드시 캐묻고야 말겠다는 의지는 사그라졌다. 어차피 ‘이미지 페미니즘’은 규범적 언어로 에누리 없이 설명될 수 없을 테다. 내겐 ‘이미지’와 ‘페미니즘’의 관계망 안에서 이렇게나 풍성한 작품들이 포착되고, 이렇게나 치열하고 사려 깊은 미학적・정치적 독해가 가능함을 확인하게 해준 것만으로도 이 제목의 가치는 충분했다. 그리고 바라게 됐다. 이제 나도 우리 시대의 ‘여성/주의 미학’에 도전하는 열렬하고 용감한 작품들을 많이 만나게 되기를. 부디 ‘내 몫의 언어’가 남아 있기를.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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