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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장애’가 낯설지 않은 사회면 좋겠어
자립하고, 함께 살기 위해 읽는 책 <나, 함께 산다>
기억 하나. 내가 사는 동네에서 20분 정도 걸어 조금 먼 곳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려, 또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들어간 곳에 내려, 주소는 서울시였지만 주위에 온통 밭뿐이던 곳을 지나 한참 걸어서야 보이는 건물. 수위 아저씨에게 머뭇머뭇 다가가 더듬더듬 ○○이 면회 왔다고, 오늘 오라고 했다고 얘기해서 들어가면, 짧은 머리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들던 그곳, 그 사람들.
기억 둘. 그 후로 3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한 인권단체의 보조강사 역으로 1주일에 한 번 인권교육을 하러 다닌 서울 변두리 지역의 한 장소.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사회복지사들에게 그냥 ‘애들’이라고 불리는 게 어색하지 않아서 불편한 기억으로 남아 있던 그곳, 그 사람들.
꽤 많은 시간을 장애여성으로 살아왔음에도, 내가 ‘시설’이라는 곳을 직접 경험한 것은 저 두 기억이 다인 것 같다. 아니, 더 있었는데 기억에 담아놓지 않았을 수도 있다. ‘시설’이란, 내가 장애를 가진 몸으로 살아가는 것에 너무나 지쳤을 때, 그렇다고 해서 생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을 때 택하는 마지막 보루 같은 것이었으니까.
어쩌면 다행이었을지 모르는 나의 이 무지는 주변에서 탈시설 장애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깨졌지만, 장애인 거주 시설이란 이름이 주는 두려움은 그 실제를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내게도 무척이나 큰 것이었다.
▶ <나, 함께 산다>(부제: 시설 밖으로 나온 장애인들의 이야기, 서중원 기록, 정택용 사진,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기획, 오월의봄, 2018)
<나, 함께 산다>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탈(脫)시설’.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탈시설 과정의 이야기는 인권 감시 제도가 없을 때, 시설을 빠져나오려면 정말 탈출을 각오해야 했던 시기의 이야기들이라, 책 표지의 밝은 느낌에도 첫 장을 넘기기가 겁났다. 마음을 다잡고 목차를 살펴보았다. 아, 그렇구나. 이 책은 ‘극복기’가 아니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생겼다. 그리고 곧 등장인물들이 사는 모습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어떤 책을 읽을 때, 특히 논픽션의 경우에는 그에 관해 글을 쓰기가 녹록치 않은 경우가 있다. 내 개인적인 경험이나 입장과 너무 절절하게 맞아떨어지는 책에 대해 쓸 때가 그중 하나다. 이런 책은 내 개인적인 이야기가 여기저기 묻어있어서, 나는 어느새 그 책 속의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같이 만들게 된다. 요즘 들어 나는 다시 물리적인 독립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고, 부모님이라는 보호막(?)이 없는 삶을 준비하고 있으니, 탈시설과는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이 책 또한 나에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었다.
‘선택’이 있는 삶을 살고 싶다
<나, 함께 산다>는 시설에서 벗어나 지역 사회에서 살아가는 장애인들의 이야기이다. 가족에 의해, 또는 그런 기억조차 없이 ‘어쩔 수 없다’와 ‘너를 위해서야’라는 말을 들으며 시설에 내동댕이쳐져 몇 년 혹은 평생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그곳을 나와서 지역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이야기.
발달장애, 지체장애, 중도장애 등 다양한 장애만큼이나 그 사람이 살아가는 모양새는 각각 다른 모습을 지닌다. 그들 하나하나는 ‘개인’이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것을 할 권리와 싫어하는 것을 안 할 권리는 누구한테나 있는 보편적인 인권이라고 여겨지지만, 이 기본적인 인권 개념은 ‘시설’에서 살다 보면 없는 것이 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더 이상 ‘원생 ○○○’이 아닌 ‘개인 ○○○’이 되고 싶어서 시설을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인권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길게는 몇 십 년, 혹은 기억하는 평생을 시설 속에서 순응하면서 살아오다 더 이상 자신을 잃기 싫어서 나온 사람들이지만, 정작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또 다른 적응이 필요했을 것이다. 책에서도 이야기하다시피 한국 사회에는 나이와 장애, 그리고 성별에 따라 커다란 차별이 존재하므로.
이를테면 장애여성은 중증의 장애남성보다 자신이 더 차별 받기 쉬운 사회라는 것을 알고, 나름의 적응법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출퇴근 버스에서, 길거리에서, 가게에서 심지어 가볍게 나온 산책길에서도 위협을 받는 것이 장애여성들이다. 모르는 이들의 차갑고 날 선 시선이나, 아이를 다루듯 하는 반말, 지역 사회의 은근한 따돌림까지-사실 특수학교가 들어서는 걸 지역주민들이 반대하는 등 직접적인 차별도 많다- 그저 견디는 법이 아닌 맞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걸 알아야 했을 것이다.
그런 난관에 부딪히고 어려움을 느꼈을 때조차, 그래도 시설보다는 나은 삶을 산다고 그들은 말한다. 유달리 폭력적인 시설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말이 아니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그 안’에서 나름 좋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다. 익숙한 공간과 익숙한 보살핌을 뒤로 하고 그들은 ‘선택해야 하는 자신’이 있는 사회로 나왔다. 그리고 시설이라는 게 사라져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생각하고 선택할 자유가 없어진다는 것.
어떤 이는 아직 주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체험홈에서 살고, 활동보조 문제가 걸려 장애 진단을 제대로 못 받거나 활동보조인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등의 문제도 있지만, 그런 문제조차 자신의 선택으로 해결해야 하기에 오히려 자신을 느낄 수 있는 것이 탈시설인들이 아닐까 싶다.
제일 약한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사회
애초에 이들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시설에 가게 된 이유는 개인과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와 제도의 문제였다. 장애를 개인의 문제로 봐왔던 국가, 건강한 비장애 남성의 기준에 맞춘 사회의 모든 것들…. 그 속에서 이들은 낯선 존재가 되어갔다. 하지만 이 책 첫 인터뷰이로 등장한 상분씨의 말처럼 ‘제일 약한 사람이 살 수 있는 사회가 다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닐까.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떤지 뒤돌아보게 하는 얘기다.
이 책을 읽기 얼마 전에 일본에서 나온 <주문을 틀리는 요리점>(오구니 시로 지음, 김윤희 번역, 웅진지식하우스, 2018)이라는 책을 봤다. 치매노인들이 살고 있는 요양보호시설에서 프로젝트 형식의 식당을 여는데, 주문한 음식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이 요리점의 컨셉이므로 손님들은 이해하며 오히려 즐긴다. 치매 환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지역 사회에서 이들을 낯설지 않은 존재로 다가가게 하려는 노력을 담은 실제 이야기다.
내가 본 그 식당의 역할은 이해와 배려도 있지만, 무엇보다 치매 환자들도 지역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요양소라는 별개의 삶이 아닌, 그저 삶의 한 형태로 같이 살아가는 것임을 보여준다는 것. 치매 환자뿐 아니라 다양한 장애인들이 지역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도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모습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이희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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