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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은 안 되고 위계폭력은 당연한가요
<그냥 청소하는 것도 필모그래피가 되나요?> 극단 Y를 만나다
오디션 탈락 소식에 의기소침해 있는 수진은 카페에 앉아 있다가 작가로 잘 나가는 ‘남자’ 선배와 마주친다. “너 내 작품에 출연할래? 하나는 모성애에 관한 얘기고, 하나는 창녀 얘긴데. 어때, 뭐할래?” -연극 <필모그래피> 중에서
연극, 영화, TV 드라마 등에서 ‘한정적이고 대상화된 여성 캐릭터’가 재현되는 방식에 대해서 꾸준히 문제 제기되어 오고 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반복되는 걸까? 그런 캐릭터를 만드는 작가나 연출이 문제인걸까? 그렇다면 연기를 하는 배우나 스태프와 제작진들은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는 걸까? 관객들은?
연극 현장에서 이러한 문제를 시원하게 꼬집어 낸 연극을 발견했다. 지난 달 9일(일)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는 카페 FLOCK에서 상연된 <그냥 청소하는 것도 필모그래피가 되나요?>(성폭력반대청주대연극학과졸업생모임 주최, 극단 Y 주관, 한국여성인권진흥원 & 여성가족부 후원)이다.
▶ 배시현 작, 강윤지 연출, 연극 <필모그래피> 중 (백혜경, 이재남 배우) ⓒ극단 Y 제공
약 15분 분량의 세 편의 단편을 모은 작품인데, 첫 이야기는 여성인 배우가 마주하게 되는 ‘한정적이고 대상화된 여성 캐릭터’를 지적하는 <필모그래피>(배시현 작)이다. 두 번째는 연극인의 ‘권리장전’을 만들어 제작 환경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여성 조연출과, 그녀의 노력이 과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남성 연출이 부딪히는 이야기 <청소하는 조연출>(강윤지 작)이다.
세 번째 이야기 <그냥요>(강윤지 작)에는 연습 후 회식 자리에 가지 않겠다며 ‘그냥 술 마시기 싫어서요.’ 라고 하는 후배와,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술자리에 참석하길 강요하는 선배가 등장한다. 후배에게 위계폭력을 행사하면서도 한편으론 ‘너 없으면 난 혼자 선생님들 사이에서 어떻게 해…’라며 약자의 위치에 놓이기도 하는 여성의 상황을 담아냈다.
이처럼 연극 <그냥 청소하는 것도 필모그래피가 되나요?>는 하이퍼-리얼리즘(극사실주의)이라 할 만큼 연극계, 아니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한 젠더폭력과 위계폭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연극계 내부에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문제들을 공연으로 만든 것도 대담한 시도라고 느껴졌지만, 연극을 보면서 자칫 과하게 폭력적인 장면이 재현되거나 자극적인 전개로 인해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공을 맞을까 우려되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는 점도 놀라웠다.
연극이 상연되기까지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작품을 만들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2018년의 끝자락, 강윤지 연출가와 백혜경 배우를 만나 <그냥 청소하는 것도 필모그래피가 되나요?>가 만들어진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위계폭력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많아
이 연극을 주관한 극단 Y는 불법촬영 피해자를 조명한 <출구는 없다>, 몸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낸 <미의 기준> 등을 무대에 올리며 꾸준히 여성들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져왔다.
“제가 논문을 써야 할 시점이 와서 뭐에 대해서 쓸지 고민하다가 ‘내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되돌아볼 기회가 있었어요. 생각해 보니까 계속 여성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더라고요. 그런 이야기를 해 왔고, 또 하고 싶어 한다는 걸 깨달았죠. 그런 즈음에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이 생겼어요. 이후 책을 읽고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페미니즘과 연결된다는 걸 알게 되었죠. 내가 지향하는 바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는데, 그 단어가 페미니즘이었던 거예요.”
여성과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강윤지 연출은 극단 Y를 만들었다. 하지만 행정적 처리 등을 하기 위해 극단이 필요해서 만든 것이지, 실제로 극단 자체에 큰 무게를 두고 있지는 않다고 했다. 고정된 멤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작품을 할 때마다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이 뭉쳐서 프로젝트를 진행한 후 흩어진다. 그가 집중하는 건 어떤 이야기를 할지, 어떤 작품을 올릴지, 어떤 사람들과 함께 만들지에 대한 것이다.
<그냥 청소하는 것도 필모그래피가 되나요?>에서는 위계폭력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지난 해 10월 개최된 “10분희곡 페스티벌”에서 <필모그래피>를 공연했는데,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서 재공연을 재안해왔다. 이런 기회라면 좀 더 이야기를 덧붙여 보자 싶어서 두 편의 단편을 더 완성한 것이다.
“사람들이 성폭력/성희롱이 나쁘다는 건 이제 좀 하는데, 상대적으로 위계폭력도 나쁘다는 건 잘 몰라요. 그걸 너무 당연하게 느끼는데, 그런 잘못된 부분들을 좀 짚어내고 싶었어요. 사실 많은 경우 성폭력이 생기는 것도 위계폭력이 존재하기 때문인데, 성폭력을 하지 말자고 하면서 위계폭력에 대해선 말들이 별로 없잖아요. 여전히 어린 여성에게 반말하고, 막내에게 물 떠오라 시키고…. 더 이상 그런 ‘선택’을 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강윤지 연출)
‘권리장전’ 읽고 닉네임을 부른 연습, 무엇이 달랐나
그렇게 시작된 연극의 제작 과정, 연습 과정은 조금 달랐다. 사실 남달랐다고 표현하는 게 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일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 극단 Y에서 작성한 ‘권리장전’ 내용. 한국여성의전화 내규를 참조해 만들었다. ⓒ극단 Y 제공
<청소하는 조연출>에서는 조연출이 ‘권리장전’을 적어와 연습실에 붙이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이 권리장전은 이들이 연극을 준비하면서 공유했던 것이다. 강윤지 연출이 한국여성의전화 자료를 참조해 만든 권리장전을 모든 제작진이 처음 모인 날 함께 읽으며 수정하거나 추가하고 싶은 부분이 있는지 확인했고, 그렇게 완성시켰다.
먼저 서로를 어떻게 부를 것인지 호칭부터 정했다. 결과적으론 ‘닉네임’을 부르기로 했다.
“그냥 ‘윤지’, ‘혜경’ 이렇게 이름만 부를까, ‘혜경배우님’ 이렇게 부를까 여러 이야기가 나왔는데 닉네임을 부르기로 했어요. 아는 사이거나 친분이 있는 경우도 있는데, 어떻게 하면 개개인이 서로 창작자로서 존중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새로운 닉네임으로 부르면 기존의 사적인 관계를 지우는 효과가 있을 것 같았어요. 그리고 다들 존댓말을 쓰기로 했고요.”
서로 닉네임을 만들어주는 과정도 거쳤다. 본인이 정한 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이미지나 사연 등을 토대로 닉네임을 추천해 주는 방식이다. 백혜경 배우는 ‘해피’, 강윤지 연출은 ‘나무’라고 불렸다. ‘앵두’, ‘틸틸’, ‘루피’…. 닉네임이 만들어진 사연도 각각 다양했다.
‘선배’나 ‘선생님’ 호칭이 아니라 서로가 지어준 닉네임으로 부르는 걸 시작으로, 서로 존중하면서 편안한 연습 과정이 될 수 있도록 세세하게 신경 썼다. 자신들이 겪는 현실의 이야기를 재현하는 작업이다 보니, 연습 과정은 배우나 제작진에게 어떤 피해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도화선이 될 수도 있었고 상처를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연습 과정 중에 해당 장면을 멈추고 의견을 낼 수 있었으며, 다른 방향으로 진행을 해보기도 했다. 이 장면을 보게 될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지에 대한 고민도 많았다. 그리고 그 고민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연극을 본 관객 중에 조연출을 하는 분이 피드백을 주시면서 ‘현실보다 덜 폭력적’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지점이 아직 어려운 것 같아요. 당사자 입장에선 좀 약하다고 느낄 수 있을 테고, 또 다른 관객들에겐 강도가 좀 세다고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요.” (강윤지 연출)
“문제 제기를 하기 위한 연극이지만, 연기를 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심리적 내상을 덜 주려고 고민했다”는 연습 과정. 백혜경 배우는 “권리장전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권리장전에 나는 실수할 권리도 있고 완벽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말이 있어요. 어떤 의견이나 아이디어가 있어도 연출에게 말하기 어려웠고, 배우 입장에서 나의 주장을 펼치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권리장전을 읽고 또 그렇게 하자고 약속하고서 연습을 시작하니까 마음이 편해졌어요. 항상 이 작품, 이 연극이 나보다 더 중요했는데, 나에게 주체성이 생기고 내가 중요해지니까 느낌이 달랐어요. 늘 연극에 치이는 수동적인 배우였는데, 한 명의 ‘창작자’로 대우를 받으니까 연습 과정이 재미있었고 이런 저런 생각도 많이 하게 되고. 내가 한 명의 창작자로 존재하게 되더라고요. ‘배우가 도구가 아니’라는 말에 동의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의문이 있었는데, 이제 깨달았어요.”
예민한 건, 능력 아닌가요?
<그냥 청소하는 것도 필모그래피가 되나요?>의 세 개 에피소드를 끌어가는 이들은 모두 여성이다. 피해자의 위치에 놓이기도 하고, 피해자와 연대자,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에 놓이기도 하는 이 캐릭터들은 쉽게 만들어진 것 같지 않은, 고민의 흔적이 보였다.
특별히 여성이기 때문에 고민했다기보다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점에 더 신경을 썼다고 말하는 강윤지 연출은 “궁극적으론 성별 이분법적인 캐릭터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 권리장전을 들고 온 ‘예민한’ 조연출이 등장하는 연극 <청소하는 조연출> ⓒ극단 Y 제공
“사람들을 획일적으로 구분하는 사회 시스템 구조 안에선 아주 쉽게 누군가를 무시하고 혐오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저는 타인을 혐오하는 내용을 담은 게 어떻게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거든요. 소수자를 비난하고 혐오하는 시선을 담지 않고도 충분히 예술을 만들 수 있는데, 그걸 모르는 무지함에서 나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또 사회가 용인하고 암묵하니까 쉽게 예술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강윤지 연출은 그래서 더 예민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건 혼자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좋은 동료들을 만나는 게 필요하다며, 이렇게 덧붙인다.
“저 또한 예민하다는 말을 어렵게 생각했던 때가 있어요. 하지만 그 예민함이 능력이더라고요. 사회를 바라볼 수 있는 힘이 그만큼 있다는 거고, 동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이잖아요.”
자신을 “왕예민하다”고 밝힌 백혜경 배우는 강윤지 연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그런 자신의 예민함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줄었다고 말했다.
“전 불편한 지점에 대해 발화하려고 노력해요. 지금도 여전히 미투(#MeToo)로 농담하는 사람들을 마주하는데, 그럴 때 ‘지금 미투로 농담하신 거예요?’ 라고 한 마디 하거든요. 반응은 제각각이긴 하지만, 그래도 말은 하려고 하죠.”
미팅이나 회의 자리에 가면 ‘미투(#MeToo) 위드유(#WithYou)’ 스티커가 붙어있는 수첩부터 꺼내놓는다는 백혜경 배우는 자신의 예민함을 능력으로 잘 소화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어떤 프로젝트 연극을 하게 되었는데, 전혀 일면식 없는 사람들과의 작업이었거든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호칭을 정하고 불편한 일이 생겼을 땐 ‘불편하다’는 말을 하기로 하자고 제안했고, 그렇게 작업을 진행했더니 서로 아이디어도 자유롭게 낼 수 있었고 작업의 집중도가 높아지더라고요.”
▶ 작업 중인 강윤지 연출의 모습. “연극을 하면서 행복하지 않다면 그만둘 수도 있다”고 말한 그의 단호함에서 예술에 대한 맹목적 사랑이 아닌 건강한 사랑이 느껴졌다. ⓒ극단 Y 제공
관객들의 목소리가 정말 중요해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극계가 변화의 물꼬를 트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설레기 시작했다. 이렇게 변화를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는 연극인들이 있다는 것은 희망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이 확대되기 위해선 더 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예민해지고 신경 쓸 게 더 많아지면서 같이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일이 더 어려워졌다는 강윤지 연출은 “연극계의 변화를 위해 관객들의 목소리가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연극인들은 관객의 말에 신경 쓸 수밖에 없어요. 일반 관객이 한 마디 평 남겨주는 게 동료 창작자들이 뭐라고 하는 것보다 훨씬 그 영향력이 커요. 좋은 작품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 해주시고, 소비해야 할 작품을 소비하고 소비하지 말아야 할 작품을 소비하지 않는 것. 그런 일들이 변화를 이끌 수 있어요.”
인터뷰를 마치며 강윤지 연출과 백혜경 배우에게 연극인으로서의 비전과 꿈을 물어보았다.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다는 두 사람.
“연출로서 현장 속에 어떻게 존재할까에 대한 고민이 많아요. 위계폭력을 행하지 않기 위해 어떤 권력들을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렇다고 연출이 권력을 다 내려놓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 아니더라고요. 특히 여성인 연출이 그렇게 했을 때 생기는 문제들이 있어서, 앞으로 계속 고민해봐야 할 것 같아요.” (강윤지 연출)
“나 자신보다 연극이 먼저였는데, 이젠 연극을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연극에서나 삶에서나 좋은 부분은 좋았다고 주저 없이 말해줄 수 있는 풍요로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서로 눈과 귀의 감각을 좀 더 열고,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같이 그 고민을 짊어졌으면 좋겠어요.” (백혜경 배우)
“언제까지나 즐겁고 행복하게 연극을 하고 싶다”는 강윤지 연출과 “딱히 하고 싶은 배역이 있다기보다 ‘여성의 몸’으로 할 수 없다고 인식되는 일들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백혜경 배우. 2019년엔 이들처럼 ‘예민한’ 연극인과 창작자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앞으로 좋은 동료들을 만나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면 좋겠다. 벌써 두 사람을 새로운 연극으로 만나는 날이 기다려진다. (박주연 기자)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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