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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맞서는 힘에 대하여
사람이 한번 다치면, 다음 번에는 다치지 않기 위해서 몸조심하게 됩니다. 한번 속으면, 또 속지 않기 위해서 사람을 살피게 됩니다.
지속적으로 차별을 경험했거나 피해를 겪은 사람은 훗날 나쁜 일이 일어나거나 피해를 입을 가능성을 보다 높게 예측하게 됩니다. 인종, 민족, 성별, 나이, 외모, 장애, 혹은 “성적 지향”을 이유로 차별을 겪은 사람이 이후 피해에 더 몰두하게 되었다는 연구들도 있습니다.
‘피해경험’과 ‘피해의식’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차별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피해의식’이라는 오명을 덮어씌웁니다. 만약 특정 피해를 입은 경험과 무관하게 피해를 입는데 대한 경계심이 과도하게 높고 타인을 지나치게 의심하려 한다면, 이를 일컬어 ‘편집증적이다’고 말합니다.
‘편집증’이라고 했을 때에는 전혀 그럴법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을 피해자로, 상대를 가해자로 만들어 버리는 왜곡된 관점과 비논리적인 사고 양상이 기저에 깔려있음을 내포합니다. 즉, 외부 세계와 무관하게 자기 안에 있는 적개심이나 수치심에 기반해서 타인이 자기를 해하려 한다고 곡해한다면 소위 ‘피해의식’이라는 말이 틀리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만약 피해경험이 실제로 있으면, 우리는 여기에 대고 ‘편집증적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즉, ‘피해의식’이라는 말이 맞지 않는 것이지요. 피해를 입었던 사람이 또 다른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 경계하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가 보이는 의심은 그 내면의 적개심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외부 세계가 그에게 부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소위 ‘피해 의식’이란 피해의 결과가 되겠지요.
피해의 역사를 고려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피해의식’이라고 이름 붙이는 실수는 많이 일어납니다. 때로는 피해의 역사와 그 결과를 연결 짓지 못하는 경우도 일어납니다. 그러한 경우에 우리는 “피해의식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고 문제를 제기해야 하며, 피해의 역사가 어떻게 현재를 야기했는가를 풀어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피해의식’이라는 말을 써서 피해자가 처한 구조와 역사와 더불어 피해자에게 가한 행위를 교묘히 은폐합니다. 경계해야 당연한 환경에 처했던 사람에게 ‘피해의식’ 운운한다면 문제를 개인에게 떠넘기며 ‘피해자 비난’을 범하게 되는 셈입니다.
쉽게 범하게 되는 ‘피해자 비난’
만약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힘이 우리를 파괴하였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이라도 지키고자 경계를 늦추지 않으려 애쓰게 됩니다. 일종의 생존 전략이지요.
사람이 조장한 폭력으로 삶이 뒤바뀌어 버렸다면 특히 사람에게 다시 한번 마음을 터놓고 믿음을 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믿음이 위협당하기도 했지만, 우선 상대방을 의심해보아야 하고 작은 단서에도 예민하게 대응하는 태도는 두 번째의 폭력에 대비하기 위해서 필요한 행동이겠지요. 경계심이란 생존을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차별과 폭력에 맞선다 하면, 불신과 경계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단절되기 전에, 그가 뻗은 손을 누구 하나 잡아주었던가를 우리는 고려해야 합니다. 그가 아무도 믿지 못하고 경계하게 되기까지 우리는 그의 말을 믿어주었던가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뒤늦게라도 그에게 다가가려면, 더 노력하기를 애써야 합니다.
또한 폭력과 차별이 단지 일시적인 여파를 남기고 끝나지는 않는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차별과 폭력은 늘 차별과 폭력을 예상하게 만드는 굴레에 인간을 붙잡아 두고, 단지 가해자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로 경계심과 불신을 조장하면서 일반화되고, 뿌리깊은 차별과 폭력을 영속화합니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침해를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무력한 상황에 처해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두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살피지 않을 수 없고, 결국에는 마음을 닫고 아무도 믿지 않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과의 관계 자체에 대한 믿음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아 결국 사람들로부터 단절시킴으로써 폭력은 인간 안에 흔적을 남깁니다.
서로에 대한 믿음과 지원을 통해 저항하는 사람들
만약 우리 외부에서 누군가가 폭력을 가한다면, 폭력의 주된 목적이 우리를 뿔뿔이 흩어놓고 서로를 경계하는 데에 놓여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폭력이 어떤 집단을 흐트러뜨렸다면, 그것은 폭력이 목표한 바였음을 고려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폭력의 피해를 보상하려 한다면, 다시 믿을 수 있는 마음을 보상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폭력의 역사를 쉽게 잊는 대중은, 다시 믿는 마음을 결코 보상해줄 수 없습니다.
만약 폭력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대항하는 집단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힘이겠지요. 이제 대중에게 잊혀졌을지 모를 매향리 주민 몇 분을 얼마 전에 뵈었습니다. 지금은 마을의 빼앗긴 역사를 재건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계셨습니다.
이 분들은 “나는 이런 모임이 있는 자리는 어디든 따라 나서야 한다. 내가 있어야 마을 사람들이 힘을 낸다”고 말씀하시고, 서로에게 서로가 없었으면 오늘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폭력은 여전히 몸 깊이 새겨져 있었지만 서로를 향한 믿음과 지원은 더없이 강해 보였습니다.
서로를 향한 신뢰를 바탕으로 폭력의 끈질김에 맞서고 있는 이 분들을 우리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최현정 ▣ 여성주의 저널 일다는 어떤 곳?
사람이 한번 다치면, 다음 번에는 다치지 않기 위해서 몸조심하게 됩니다. 한번 속으면, 또 속지 않기 위해서 사람을 살피게 됩니다.
지속적으로 차별을 경험했거나 피해를 겪은 사람은 훗날 나쁜 일이 일어나거나 피해를 입을 가능성을 보다 높게 예측하게 됩니다. 인종, 민족, 성별, 나이, 외모, 장애, 혹은 “성적 지향”을 이유로 차별을 겪은 사람이 이후 피해에 더 몰두하게 되었다는 연구들도 있습니다.
‘피해경험’과 ‘피해의식’
2003년 울산 '성폭력 없는 세상을 위한 아름다운 동참'
‘편집증’이라고 했을 때에는 전혀 그럴법하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을 피해자로, 상대를 가해자로 만들어 버리는 왜곡된 관점과 비논리적인 사고 양상이 기저에 깔려있음을 내포합니다. 즉, 외부 세계와 무관하게 자기 안에 있는 적개심이나 수치심에 기반해서 타인이 자기를 해하려 한다고 곡해한다면 소위 ‘피해의식’이라는 말이 틀리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만약 피해경험이 실제로 있으면, 우리는 여기에 대고 ‘편집증적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즉, ‘피해의식’이라는 말이 맞지 않는 것이지요. 피해를 입었던 사람이 또 다른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 경계하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가 보이는 의심은 그 내면의 적개심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외부 세계가 그에게 부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소위 ‘피해 의식’이란 피해의 결과가 되겠지요.
피해의 역사를 고려하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피해의식’이라고 이름 붙이는 실수는 많이 일어납니다. 때로는 피해의 역사와 그 결과를 연결 짓지 못하는 경우도 일어납니다. 그러한 경우에 우리는 “피해의식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고 문제를 제기해야 하며, 피해의 역사가 어떻게 현재를 야기했는가를 풀어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피해의식’이라는 말을 써서 피해자가 처한 구조와 역사와 더불어 피해자에게 가한 행위를 교묘히 은폐합니다. 경계해야 당연한 환경에 처했던 사람에게 ‘피해의식’ 운운한다면 문제를 개인에게 떠넘기며 ‘피해자 비난’을 범하게 되는 셈입니다.
쉽게 범하게 되는 ‘피해자 비난’
만약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힘이 우리를 파괴하였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이라도 지키고자 경계를 늦추지 않으려 애쓰게 됩니다. 일종의 생존 전략이지요.
사람이 조장한 폭력으로 삶이 뒤바뀌어 버렸다면 특히 사람에게 다시 한번 마음을 터놓고 믿음을 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믿음이 위협당하기도 했지만, 우선 상대방을 의심해보아야 하고 작은 단서에도 예민하게 대응하는 태도는 두 번째의 폭력에 대비하기 위해서 필요한 행동이겠지요. 경계심이란 생존을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차별과 폭력에 맞선다 하면, 불신과 경계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단절되기 전에, 그가 뻗은 손을 누구 하나 잡아주었던가를 우리는 고려해야 합니다. 그가 아무도 믿지 못하고 경계하게 되기까지 우리는 그의 말을 믿어주었던가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뒤늦게라도 그에게 다가가려면, 더 노력하기를 애써야 합니다.
또한 폭력과 차별이 단지 일시적인 여파를 남기고 끝나지는 않는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차별과 폭력은 늘 차별과 폭력을 예상하게 만드는 굴레에 인간을 붙잡아 두고, 단지 가해자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로 경계심과 불신을 조장하면서 일반화되고, 뿌리깊은 차별과 폭력을 영속화합니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침해를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무력한 상황에 처해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두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살피지 않을 수 없고, 결국에는 마음을 닫고 아무도 믿지 않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과의 관계 자체에 대한 믿음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아 결국 사람들로부터 단절시킴으로써 폭력은 인간 안에 흔적을 남깁니다.
서로에 대한 믿음과 지원을 통해 저항하는 사람들
만약 우리 외부에서 누군가가 폭력을 가한다면, 폭력의 주된 목적이 우리를 뿔뿔이 흩어놓고 서로를 경계하는 데에 놓여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폭력이 어떤 집단을 흐트러뜨렸다면, 그것은 폭력이 목표한 바였음을 고려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폭력의 피해를 보상하려 한다면, 다시 믿을 수 있는 마음을 보상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폭력의 역사를 쉽게 잊는 대중은, 다시 믿는 마음을 결코 보상해줄 수 없습니다.
만약 폭력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대항하는 집단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힘이겠지요. 이제 대중에게 잊혀졌을지 모를 매향리 주민 몇 분을 얼마 전에 뵈었습니다. 지금은 마을의 빼앗긴 역사를 재건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계셨습니다.
이 분들은 “나는 이런 모임이 있는 자리는 어디든 따라 나서야 한다. 내가 있어야 마을 사람들이 힘을 낸다”고 말씀하시고, 서로에게 서로가 없었으면 오늘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폭력은 여전히 몸 깊이 새겨져 있었지만 서로를 향한 믿음과 지원은 더없이 강해 보였습니다.
서로를 향한 신뢰를 바탕으로 폭력의 끈질김에 맞서고 있는 이 분들을 우리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최현정 ▣ 여성주의 저널 일다는 어떤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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