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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67세 호주 할머니와 달리기

[최하란의 No Woman No Cry] 골드코스트 마스터스 육상경기 참가기


여성을 위한 자기방어 훈련과 몸에 관한 칼럼 ‘No Woman No Cry’가 연재됩니다. 최하란 씨는 스쿨오브무브먼트 대표이자, 호신술의 하나인 크라브마가 지도자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달리는 것이 삶의 일부가 되기까지 


8년 전, 지인의 추천으로 <젠틀 러닝>(Gentle Running, 루돌프 나길러, 빌렘 뤼지퍼스 공저)이라는 책을 읽었다. 무엇보다 “부드럽게 달리기”라는 책 제목이 마음에 쏙 들었다. 책의 내용은 더 빨리 달리자는 것도, 더 오래 달리자는 것도 아니었다. 고통이 희열이 되는 순간을 묘사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의 위대함을 말하지도 않았다. 몸을 느끼고, 호흡을 느끼고, 우리가 원래 지니고 태어난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달리자고 말하고 있었다.


▶ 그리스 코로니에서 <젠틀 러닝>의 뷤 선생님과. ⓒ최하란


3년 동안 집 근처 공원에서, 그리고 한강변을 따라 달리는 연습을 한 다음 2013년 8월, 저자의 젠틀 러닝 세미나에 참가하기 위해 그리스 남서쪽의 바닷가 작은 마을 코로니로 떠났다. 몸으로 하는 것은 몸으로 배워야 하니까. 10세부터 40대 후반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했다. 교회로, 산으로, 골짜기로, 바닷가로 다니며 유의 사항을 듣고, 자세를 교정 받고, 필요한 운동법을 추천 받고, 맨발로 뛰어다녔다.


2014년에는 무에타이를 배우러 태국으로 떠났고, 4년 동안 매년 2주씩 무에타이 선수들과 생활하면서 매일 한 시간 이상 달리고 아침저녁으로 두 시간씩 함께 훈련했다. 그때 부드럽게 달리는 것이 그들이 가진 폭발적인 파워의 토대라는 것을 배웠다.


▶ 무에타이 선수들과 함께 달리기 ⓒ최하란


한국에서도 틈만 나면 짧은 거리라도 달렸다. 그리고 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와 삶을 찾아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호주의 육상 클럽 홈페이지에서 만75세 할아버지의 100m 기록을 보게 됐다. “75세 할아버지가 100m를 달린다고? 그것도 14초!” 너무 궁금했다. 이 분들은 뭘 하는 분들이지? 이게 4년 전 일이었다. 나는 ‘언젠가 꼭 가서, 함께 달려볼 것이다’ 라고 마음먹었다.


호주 동네 육상경기에 참가하다


4년 만에 마음먹은 일이 이루어졌다. 크라브 마가(Krav Maga, 자기방어 무술) 엑스퍼트 캠프에 참가하기 위해 간 호주 골드코스트에서, 캠프가 끝난 다음날 골드코스트 마스터스 육상 클럽의 경기가 열리는 것이다.


세계 마스터스 육상경기(World Masters athletics) 조직에 속한 골드코스트 마스터스 육상경기 클럽은 만31세 이상의 사람들이 트랙과 필드 경기를 연습하고, 경쟁하고, 기록을 측정하는 모임이다. 클럽 회원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참가비만 내면 참가할 수 있다는 친절한 안내 글을 보니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그런데 막상 크라브 마가 캠프에서 일주일 동안 하루 8시간씩 훈련하고 10시간 동안 승급 시험까지 보고나니 ‘아… 가지 말까? 나 스파링 하다가 부상입어서 다리도 잘 쓰질 못하는데… 내일 비 온다는데… 나 감기 걸렸는데, 비 맞고 더 나빠지면 한국 가서 일 어떻게 할라고?’ 하는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러나 결국, 달리지 않으면 보기라도 하자는 마음이 이겼다.


“비가 와도 경기는 한다”는 공지를 봤는데, 날씨는 화창했다. 아침 6시에 숙소를 나섰다. 세상 참 편해져서 인터넷이 되고, 지도만 볼 줄 알면 처음 가는 곳도 어려움 없이 찾아갈 수 있다.


경기장인 그리피스 대학 트랙 볕 좋은 곳에서 사람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계시고, 아빠와 함께 온 어린 소녀도 있고, 엄마는 원반을 던지고 십대인 딸은 300m 경기를 준비했다. 여기저기서 남녀노소 스트레칭을 하고, 요가도 하고, 스타트 연습도 하고, 조깅도 하고 있었다.


▶ 나이는 문제가 아니다. ⓒ출처 Gold Coast Masters Athletics Club 페이스북


나는 100m와 300m 경기를 신청했다.


스파이크 신발도 없고, 크라우칭 스타트는 할 줄 모르고, 25년 전에 서봤음직한 100m 출발선에 섰다. 총성이 울린다. 최선을 다해 뛰는데 몸이 무겁고 힘들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나를 쏜살같이 앞서간다.


‘할머니다. 할머니잖아. 이 할머니는 아까 계속 홀로 열심히 스타트 연습을 하던 그 할머니? 아 모르겠다. 최대한 할머니를 따라가자.’

그런데 할머니, 빨라도 정말 빠르다. 기록 담당 할아버지가 외친다. “하란 초이, 16초66!”

‘그럼, 저 할머니 기록은 몇 초일까?’


만67세 할머니, 100m 기록은 14초61


올해 만67세인 할머니의 이름은 캐롤 데이비스. 마스터스 육상경기는 5세 단위로 그룹을 나누는데, 캐롤은 65세 이상 60m, 100m, 800m 여자 호주 기록 보유자다. 참가하고 관람하고 싶던 경기를 찾아온 것도 좋았는데, 게다가 기록 보유자와 함께 뛰는 영광을 누렸다. 그의 60m 기록은 9초12, 100m 기록은 14초61, 800m 2분50초54.


▶ 100m 경기를 뛰고 있는 만67세 캐롤과 만41세의 나. ⓒ최하란


트랙 경기를 끝내고는 필드에서 창을 들고 창던지기 연습을 하셨다. 그를 인터뷰하고 싶었지만, 미리 약속도 하지 않은 내가 훈련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 멀리 캐롤을 보면서 ‘저 분은 달리지 못할 때까지 달릴 분이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한국에서 성인에게 육상이란 거의 두 가지다. 하나는 경찰 등등 시험을 위한 달리기, 나머지는 대개 마라톤으로 통한다. 거의 4~5세부터 ‘산업전사’ 양성이 시작되는 한국에서는 track & field 즉 이름 그대로 트랙과 필드에서 즐기는 육상의 기회가 거의 없다. 불행이다. 왜냐하면 플라톤도 말했듯이 달리기를 비롯한 ‘도약’의 욕구란, 인간을 포함해 어린 동물들의 기본 욕구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생리적 정서적 욕구가 우리는 너무 일찌감치 억압되고 있다. 그리고 성장기 내내 아예 큰 단절이 있다.


그러나 4년 전에 호주에선 다른 문화를 찾아볼 수 있었다. 그곳에 오래 거주하며 배울 계획까지 세웠지만 결국 실행하지 못했고, 이번에 잠시 확인할 수 있었다. 만약 누구든 호주에서 살아볼 기회가 생기면 동네 육상 클럽을 찾아보길 바란다. 내가 조사한 곳은 3개월 단위로 1년에 3번씩 온갖 육상 종목들을 배우고 즐길 기회를 거의 무료에 가까운 싼 비용으로 동네에서 누릴 수 있었다. 기록을 살펴보면 60대, 70대 남녀 어르신들이 장대높이뛰기도 하고, 3단 뛰기, 투포환, 창던지기 등 한국 사람이라면 평생 구경도 못할 종목들을 동네에서 즐기고 있었다.


부드럽게 달리기 위한 조언


부드럽게 달리기는 중력을 이용하는 효율적인 움직임이다. 몸이 앞으로 기울기 때문에 바닥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골반이 절로 움직이면서 달리게 된다. 그래서 발뒤꿈치는 거의 착지하지 않는다. 이런 달리기가 어떤 사람의 발명품은 아니다. 거의 모든 미취학 아동들이 이렇게 달리고, 청소년들도 상당수 이렇게 달릴 수 있고, 달리기를 정기적으로 하는 운동부 학생이라면 거의 이렇게 달린다.


그러나 달리기가 몸매, 경쟁, 보여주기, 다이어트 같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된다면 금세 재미없는 활동이 되기 쉽다. 마음이 고립되고, 관심이나 호기심도 없이, 심지어 생각과 의도도 없이 기계적으로 움직임을 반복한다면 더는 순간에 몰두할 수 없고 그저 끝나기만 바랄 뿐이다. 그 순간, 거기, 나 자신도 없는 것이다.


빨리 달리지 못해도 오래 달리지 못해도 괜찮다. 몸을 스치는 바람, 흐르는 땀, 쿵쾅거리는 심장을 느끼는 것이 달리기의 즐거움이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달린다.” ―에밀 자토펙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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