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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가슴해방물결여행 출렁출렁~’을 따라가다

폭염에도 노브라는 권하지 않는 사회에서



“보지!!” “찌찌!!” “뭐!” 너나 할 것 없이 앞 다퉈 소리치는 이 단어들이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안에 울려 퍼졌다. “찌찌가 먼저였어요!!” “아니에요, 보지 보지!” 시끌벅적한 이 광경은, 지난 5월 페이스북 코리아 본사 앞에서 “우리는 음란물이 아니다” 라고 외치며 상의 탈의 시위를 벌였던 불꽃페미액션이 주최한 <가슴해방물결여행 출렁출렁~>의 한 장면이다.


유난히 무더웠던 올해 여름의 끝자락인 8월 26일 일요일 아침 서울여성플라자 앞, 가슴해방물결여행에 참여하는 여성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초면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너나 할 것 없이 짐을 같이 나르고 차례차례 버스에 탔다. 여행 이야기를 더 흥미롭게 하는 사연인 ‘지금 일어났다는 한 분’의 소식을 들었을 때, ‘이제 여행이 시작되는 구나’ 싶었다.


가슴해방여행은 불꽃페미액션(이하, 불펨)의 ‘찌찌해방’ 퍼포먼스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퍼포먼스 이후 가진 인터뷰에서 ‘더 길게 찌찌해방을 해 보고 싶다’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또 뭔가를 기획할 줄 몰랐다. (관련 기사: 페미니즘의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http://ildaro.com/8232) 거기다 웃통 까고 해수욕이라니!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 가슴해방물결여행 출렁출렁~ 참여자들이 해변에 모여 시원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일다 (박주연)


버스가 강릉을 향해 출발하자 참여자들은 자기 소개를 했다. 불펨 활동가도 있고, 친구 따라 온 사람도 있고, 결혼을 앞두고 있다며 ‘가부장제의 부역자가 되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 중’이라고 밝힌 사람도 있었다. 그 사이, 지각생을 픽업하기로 한 장소에 도착했고 버스 안 사람들은 과할 정도의 박수로 맞이해 주자고 입을 맞췄다. 헐레벌떡 뛰어와 죄송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이다가 자리에 앉은 지각생의 모습에 한 번 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등 뒤에 “시급하다 시급만원”이 크게 쓰인 티셔츠를 입고 있는 그 모습이 절묘했다. 이 여행에 참여하는 이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는 매력적인 사람들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참여자들은 강릉으로 가는 긴 시간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도록 게임을 했다. 나란히 앉은 사람들끼리 한 팀씩 짜고 나니 총 다섯 팀, 팀 이름은 ‘목동’, ‘보지’, ‘왜’, ‘찌찌’, ‘불’로 정해졌다. 퀴즈를 풀기 위해선 먼저 팀 이름을 외치고 답을 말하는 걸로 규칙을 정했다.


먼저 초성게임(예를 들어 영화 <아가씨>가 답인 문제를 내고 싶으면 ‘ㅇㄱㅆ’라고 알려주고 참여자들이 답을 맞추게 한다)을 했다. 문제를 낼 수 있는 범위는 영화로 한정했다. 상품은 물놀이를 할 때 도움이 되는 물품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화제 상품은 단연 참여자가 직접 만들어 온 ‘복숭아 타르트’였다. 모두들 열의에 타올랐다. 초성게임은 어렵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너무 쉽게 정답을 외치는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팀들이 돌아가면서 문제를 냈고, 여성영화로 분류될 법한 영화 제목들이 계속 나왔다. ‘여성영화로 하니까 다들 너무 잘 맞추는 것 같다’며 ‘알탕영화를 문제로 내라’는 항의 아닌 항의가 나오기도 했다.


‘불’팀이 가장 먼저 다섯 문제를 맞추며 1등을 차지했고, 그렇게 열띤 게임을 이어가던 중에 휴게소에 도착했다. 점심으로 떡볶이, 감자, 옥수수 등을 나눠 먹고 버스에 탑승한 후에는 해변에서 놀기 위한 체력을 준비하기 위해! 다들 잠이 들었다.


드디어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들뜬 마음이었던 것도 잠시,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장면을 목격했다. 태풍이 지나간 여파였을까? 바다수영을 기대했던 참여자들은 아쉬워했지만 이런 파도에 수영은 금물이라며 안전을 우선시하기로 했다. 해변에서 놀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말고도 많으니까.


사람들이 별로 없는 곳이라는 이유로 가슴해방물결 여행의 목적지로 정했던 해변은 좀 작고 유난히 파도가 셌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로 했지만, 그래도 기념사진은 찍어야 한다며 ‘우리의 몸은 불법이 아니다’라는 현수막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이동한 곳은 넓은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해변이었다. 사람들도 거의 없어서 자유롭게 놀기에 딱이었다. 자리를 잡고 짐을 풀고 자연스럽게 하나 둘 웃옷을 벗었다. 비치볼도 하고 놀 거니까 몸풀기 체조를 했다. 누구의 시선에 대상화되지 않고 시원하게 가슴을 드러낸 여성들이 국민체조를 하는 모습을 평생 본 적이 있었던가?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난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거렸다. 누가 볼까봐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빤히 쳐다보지 않을까,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혹시 사진을 찍거나 그러진 않을까, 매의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누가 그런 정찰 임무를 부여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러면서 비치볼을 하고, 피구를 하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같이 웃고 떠들고 또 혼자 바나나를 먹으며 바다도 바라봤다. 이 행동들 중에 가슴을 드러낸 여성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 과연 무엇일까? 있긴 할까?


주변을 정찰하던 난 어느 순간부터 나의 시선을 되찾았다. 이런 내가 조금 어색해졌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넓디넓은 해변에 열댓 명이 넘는 여성들이 웃통을 까고 비치볼을 하거나 웃으며 뛰고 달리고 춤추는 모습을 평생 본 적이 없었으니까. 낯선 모습이었지만, 함께 노는 사이 난 가슴해방물결 참가자들의 모습에 심취되었다.


‘아름답다’거나 ‘멋있다’는 말보다 ‘자유롭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는 사람이 내뿜는 표정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해맑다고만 하기엔 무언가 강인한 의지가 느껴지기도 했다. ‘자유를 누릴 준비가 된 사람’들이 마음껏 그걸 표출하고 있었다. 내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역동적인 모습을 사진으로라도 담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 해변에서 신나게 비치볼을 하는 참여자들.  ⓒ일다 (박주연)


당일치기 여행이었기 때문에 사실 해변에서 있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2시간 남짓 한 그 시간만 즐길 수 있는 자유라니. 다들 굉장히 아쉬운 눈치였다. 하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다시 버스에 올랐다.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 안, 노느라 지쳐 녹초가 되어 잠들지 않을까 싶었는데, 해방이라는 자유를 경험한 여운이 남은 듯 하나 둘 재미있는 ‘바디토크’(Body Talk)를 시작했다. 여성들끼리 모여 누드 크로키를 하는 수업을 경험하면서 들었던 몸에 대한 생각, 다른 여성의 몸을 본다는 것과 나의 몸을 타인이 본다는 것, 타인이 그린 나의 몸을 마주하는 것에 대한 생각과 자신의 욕망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사회적으로 여성의 몸이 어떤 존재로 취급 받는지에 대한 불만과 불합리에 대한 지적도 있었지만, 나 스스로 내 몸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리고 여성의 몸에 대한 전반적인 고민에 대해서도 서로 경험과 의견을 나눴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성차별과 성교육에 대한 주제로도 이어졌다. 다들 보따리 장수 마냥 이야기 꾸러미를 끝없이 꺼내놓았다. 가슴을 드러낸 몸의 해방이 또 하나의 해방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같은 날(26일) 서울에선 페미당당 주최로 “나의 몸은 불법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 임신 중단 치외법권” 퍼포먼스가 진행되었다. 보건복지부가 인공임신중절수술을 ‘비도덕적 진료행위’로 분류하여 수술한 의사의 자격을 1개월 정지하는 행정규칙을 시행한다고 발표한 것에 대한 항의다. 버스 안에서는 함께 연대하고, 낙태죄 이슈에 계속 관심을 가지자는 다짐의 이야기가 나왔다. 이날 페미당당은 125명의 여성들이 임신중단약물인 ‘미프진’인지 비타민제인지 모를 알약을 다함께 복용하는 퍼포먼스를 했다.


여성들과 의료진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며칠 뒤 보건복지부는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위헌 여부에 대한 결정이 날 때까지 행정규칙 시행을 유보하겠다고 한 발 물러섰다. ‘도대체 여성의 몸은 왜 이렇게 국가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가’ 의문이 계속되는 시점에서 참여한 가슴해방여행이었다. 그 여행이 여성들의 바디토크로 마무리되었다는 것도 의미 심장했다.


버스 안에서 함께 찍은 여행사진을 보면서 누군가 ‘이렇게 다양한 몸을 보는 것도 너무 좋다’는 말을 했다. 사실 각자의 얼굴이 다른 만큼 우리의 몸도 다 다른데 아직도 S, M, L 사이즈에 우리 자신을 구겨 넣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단지 외형적인 부분만이 아니다. 2013년, 유럽에서 판매되는 사후피임약(Morning After Pill)이 몸무게 약 80kg이상인 여성에게는 효과가 없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논란이 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여성의 몸은 쉽게 획일적으로 재단 당하는 것에 비해, 차이와 다양성에 대한 논의는 너무 협소하다.


폭염이 이어지던 이 여름에도 노브라는 권하지 않는, 아니 오히려 ‘꼴불견 노출’이라고 부르는 이 사회에서 여름의 끝자락에 가슴해방을 봤다. 이번 여행에서 목격한 건 여성들이 남성중심적인 사회가 규정한 시선과 통제를 거부하는 모습에 그치지 않는다. ‘내가 지금의 나로, 이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위한 여성들의 움직임, 그 시작이었다. (박주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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