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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끈질기게, 행복하게 ‘혐오’에 맞설 것이다
제1회 인천퀴어문화축제 현장을 기억하며 (선영)
동인천 지하상가 앞 공간에 옹기종기 모인 퍼레이드 참가자들과, 이들을 둘러싼 경찰들, 경찰 머리 위로 보이는 성소수자 혐오 문구와 붉은 십자가. 지난 9월 8일 인천 지역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하기 위해 도착한 동인천역 북광장에서 하루 동안 가장 오래 보았던 풍경이다. 화장실도 편의점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한 채, 그 공간이 더 좁아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우리를 향해 쏟아지는 저주 섞인 폭언과 폭력, 그리고 이를 방관하는 공권력을 마주하면서. 이 글은 잊지 못할 그 날 현장의 기록이다.
▶ 제1회 인천퀴어문화축제가 열리는 날 아침, 축제 장소로 향하는 동인천행 급행열차 안에서 동성애 축제 반대를 외치며 돌아다니는 중년 남성들을 보았다. ⓒ선영
축제가 평탄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아침부터 예상할 수 있었다. 1호선 동인천행 급행열차를 타고 가던 중, “동성애 반대”라고 적힌 조끼를 입은 중년남성이 차량을 돌아다니며 동성애에 반대한다고 외치는 것을 보았다. 잠시 후 똑같은 조끼를 입은 다른 남성이 반대편으로 지나갔다. 옆자리 승객들이 그게 뭐냐고 묻자, 동인천역 북광장에서 ‘말도 안 되는 동성애 축제’가 열리는 것을 막으려 간다고 설명했다. 아, 오늘 순탄치 않겠구나. 그런데 현장의 상황은 예상보다 더 나빴다.
부스 설치도 못한 채, 오전부터 혐오 세력과 대치
축제 참가자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좁은 공간에 갇혀있던 것은 아니다. 10시경 막 광장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혐오 세력은 곳곳에 무리 지어 광장을 점거하고 있었고, 참가자들은 상황이 정리되길 기다리며 버스정류장 근처에 모여 있었다. 그러다 혐오 세력이 축제 참가자들을 둘러싸고 압박을 하기 시작했고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참가자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반대쪽으로 이동한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후에 들으니, 경찰이 참가자를 한곳에 모은 뒤 혐오 세력을 광장 밖으로 몰아낼 거라고 약속했다 한다.
활동가 몇 명이 긴 현수막을 펼쳐 들고 혐오 세력과 참가자들 사이를 갈라놓았고, 경찰이 길을 냈다. 버스정류장에서 지하상가 앞까지 고작 몇 십 미터 옆으로 옮겨가는 동안에도 우리 행렬은 몇 번이나 끊어졌다. 앞에서는 싸움 소리가 들렸고, 저지선이 무너지려 할 때마다 사람들은 함께 몸을 던져 밀려나는 경찰의 등 뒤를 받쳤다. 낮은 나무가 부러질 듯 휘청거리며 흙먼지를 피워 올려, 그곳에서 격렬한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시 길이 열리고, 참가자들은 서로의 짐을 들어주고 손을 잡아주며 쫓기듯 달렸다. 온전한 길도 아니었고 높은 화단을 넘어가야 했다. 누군가 휘청거리면 사방에서 손을 뻗어 잡아주었다. 참가자들이 지하상가 앞으로 모이자 경찰이 둘러싸고 저지선을 만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주 좁은 공간은 아니었다. 저 저지선이 점차 밖으로 커지며 혐오 세력을 밀어낼 거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경찰 저지선이 뚫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큰 소란과 함께 혐오 세력이 밀려들어 공간을 점거하고 주저앉았다. 저지선 안팎으로 혐오 세력의 공격이 반복되었고, 그들에게 밀린 경찰의 등 뒤 공간은 점점 좁아졌다. 몇 번이나 저지선이 무너지려 할 때마다 너나 할 것 없이 참가자들이 함께 경찰의 등 뒤를 받치고 안으로 들어온 혐오 세력과 싸웠다. 그 와중에 축제 참가자들이 다치고, 물품을 빼앗기거나 파손되는 일들이 생겼다.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하는 대치 상황이 몇 시간 동안 이어졌다. 대치가 시작된 후에 도착한 참가자들이 저지선 밖에서 혐오 세력들과 뒤섞여 있었지만, 경찰은 혐오 세력이 들어올 수 있다는 이유로 그들을 안쪽으로 들여 보내주지 않았다. 저지선 밖의 참가자들은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깃발을 올리고 안에 갇힌 사람들과 함께 연호했다.
끼니도, 화장실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물과 간식이 마치 구호물품처럼 안으로 전달되었다. 화장실은 해결 못 해주니 조금씩 마시라는 우습지 않은 우스갯소리가 따라왔다. 오후 3시가 넘어서야 잠깐 입구를 열 수 있었고, 바깥에 있던 참가자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저지선 안팎에서 혐오 세력과 싸우던 참가자들이 서로의 무사를 확인하고 얼싸안으며 기뻐했다.
▶ 축제를 방해하려 경찰의 저지선 안으로 들어와 주저앉은 ‘성소수자 혐오 세력’들. ⓒ선영
깃발 없는 퍼레이드?!
오전부터 열리기로 한 부스 행사는 진행도 못한 채, 곧 퍼레이드 행렬이 만들어졌다. 예정대로 오후 4시 반경이었다. 그러나 출발 시도는 연이어 무산되었다. 고작 백여 미터 앞 굴다리까지 나갔을 때가 저녁 8시경이었다. 경찰의 최종 경고까지 걸린 시간이기도 했다. 청장의 인가를 받아왔다는 경찰 책임자는 적법한 집회를 방해하면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강도가 조금 높아진 경고 방송만 거듭할 뿐이었다. 도로를 점거하고 행렬을 막은 혐오 세력에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나는 짐을 놓으러 갔다가 경찰에 막혀 재합류하지 못한 채 행렬 밖에서 퍼레이드 출발을 기다렸다. 먹을 것과 음료를 사서 경찰 어깨너머로 행렬에 전달했다. 끊임없이 몸싸움이 벌어졌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구급차가 몇 번을 오가던 중, 옆에서 “그러게 왜 나와서 이 사달을 내냐”는 말을 들었다. 퍼레이드 행렬을 향해 “해산하라”고 소리 지르던 사람이었다. 그 옆으로 어린아이 셋의 손을 잡은 어른이 ‘애들을 그쪽에 세워야 한다’며 아이들을 앞으로 데려갔다.
어느 순간부터 혐오 세력은 행렬을 향해 ‘깃발을 내리라’고 소리 질렀다. 누구도 꼿꼿하게 세운 깃발을 내리지 않았다. 굴다리 아래까지 나갔을 때, 선두에 있던 깃대 하나가 저들 손에 끌려 내려가는 게 보였다. 지키려는 기수와 뺏으려는 혐오 세력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잠시 후 깃발 없이 빈 깃대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올라왔다.
저녁 8시가 넘었다. 굴다리를 벗어나며 경찰은 행렬을 좁은 인도로 걷게 했지만, 혐오 세력이 먼저 점령하고 있었다. 선두 일부가 바깥쪽으로 움직이기에 도로로 길을 내려는가 했으나, 현수막을 든 혐오 세력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경찰은 여전히 그들을 밀어내지 않았다.
깃발을 내리라는 혐오 세력의 요구가 이어졌다. 사회적 소수자들이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축제에서, 우리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깃발을 내리라니? 어불성설이었다. 그러나 경찰은 중재인지 뭔지 모를 협상안을, 적법한 집회를 방해하는 혐오 세력 측이 아닌 축제 측에 강요했다. 깃발을 내리는 대신 저들의 피켓도 내리는 것으로 협상(?)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깃발이 내려가자 반대 측도 피켓을 내리고 길을 열었다. 행진 경로에서 합류할 수 있는 시점을 기다리던 우리를 같은 편으로 봤는지, 피켓을 내리고 비켜서라고 안내하던 사람이 이쪽으로 오라고 웃으며 손짓했다. 조금 전까지 행렬을 향해 악다구니를 쓰던 사람이, 친절하게 웃으면서 말이다.
몇 걸음 걷지 않아 다시 길이 막혔다. 손에 든 작은 깃발 하나도 행렬의 머리 위로 보이면 지나갈 수 없다는 윽박이 들렸다. 깃발이 다시 올라갔고 행렬 선두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깃발 내려! 깃발 내려!’ 혐오세력 측에서 삿대질과 험악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제발 집에 좀 가자! 애들 밥 줘야 한다!’ 동성애 축제 반대 현수막을 들고 있던 사람이 소리쳤다. 대체 누구 때문에 우리가 아직 길 위에 서 있는데!
깃발이 내려가면 길을 열어주고, 깃발이 하나라도 올라가면 삽시간에 앞을 막는 일이 반복되었다. 목사라고 불리던 중년 남성은 행렬 앞쪽을 달려 다니며 사람들을 배치했다. 경로를 앞서 기다리다 깃발을 드는 즉시 길을 막아야 한다고 떠들었다. 붉은 십자가를 든 남자는 ‘여기서 뚫리면 내년에 또 이런 축제를 할 거다, 여기서 막아야 한다’고 소리쳤다. 경찰은 그들을 저지하기는커녕 도리어 참가자들에게 깃발을 내리라고 종용했다. 그야말로, 혐오 세력이 열어주는 만큼만 걷도록 경찰이 방조로 허락했다. 무능하고, 무력하며, 나태한 공권력이었다.
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깃발이 내려가고, 길이 열렸다. 선두가 보였다. 서럽게 울며 걸어오는 동료에게 달려갔다. 행렬과 함께 걷다가 백여 미터도 가지 못한 채 뒤에서 막혔다고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앞서 걷던 사람들이 다시 뒤돌아 달렸다. 행렬에서 깃발이 올라왔고 혐오 세력이 그 앞을 막았다. 끊어진 행렬의 선두와, 행렬을 막은 혐오 세력과, 되돌아온 선두가 뒤섞여 몸싸움이 벌어졌다. 경찰이 사람들을 뜯어냈다. 누가 누군지 분간도 가지 않았다. 깃발 내려! 그 말이 끊임없이 귀에 꽂혔다. 모든 깃발이 내려가고서야,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우리는 여기 있다!”
해는 이미 저물었다. 깃발도 피켓도 들지 않은 행렬은 유독 어둡게 느껴지는 거리를 조용히 걸었다. 행여 다시 행렬이 끊길까, 참가자로 온 다른 퀴어활동가들과 함께 행렬 밖에서 참가자들을 지켜봤다. 부러진 깃대를 들고 걷는 사람, 깃대 없는 깃발을 들고 걷는 사람, 서럽게 울며 걷는 사람, 그를 안고 다독이며 걷는 동료들, 조용히 혹은 격렬히 분노하는 사람들.
놀랍게도, 행렬의 중간 즈음부터는 경찰의 동행조차 없이 혐오 세력의 폭언과 조롱에 그대로 노출되어 걷고 있었다. 몇몇 활동가들이 달려가 혐오 세력과 행렬 사이를 막아섰다. 그러다 고함 소리가 들려 앞을 보자 깃발 둘 셋이 올라있었고, 깃발 내리라는 소리와 함께 삽시간에 깃대 하나가 저들 손에 빼앗겨, 부서졌다. 콰각 하는 파열음이 또렷하게 들렸다.
행렬의 말미가 보일 즈음, “우리는 여기 있다!”를 울면서 연호하는 사람들 틈에 섞여 함께 걸었다. 여전히 우리를 모욕하고 조롱하는 폭언을 배경으로, 울음 섞인 그 구호가 너무 처절해서, 부러지던 깃대 소리와 함께 가슴을 파고들었다. 왜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이토록 처절하게 외쳐야만 하는가.
▶ 출발지에서 100미터 가량 떨어진 굴다리 앞. 행렬 앞을 막은 혐오 세력들 ⓒ선영
저녁 9시 경 본래의 경로보다 짧은 동인천역 3번출구 앞에서 행진이 끝났다. 혐오 세력과 경찰로 둘러싸인 공간에 들어서며 울컥 설움이 북받쳤다. 5년 전, 첫 퀴어퍼레이드 참여 이후 전국의 모든 퍼레이드에 참여해왔지만, 한 번도 행진이 끝난 뒤 이런 풍경을 본 적이 없었다. 모든 축제가 해마다 혐오 세력의 방해와 난관을 겪었다. 그러나 이토록 서럽고 분하고 처절하게 우는 참가자들의 모습을 본 적이 없어, 목이 메이고 가슴이 울렁거렸다. 경찰의 저지선 너머로, 혐오 세력은 여전히 우리를 둘러싼 채 저주와 폭언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3번출구 앞에 도착하는 속속 깃발이 다시 올랐다. 사람들은 ‘퍼레이드를 완주했다’며 부둥켜안고 축하하고, 노래를 불렀다. 우는 동료를 끌어안고 위로했다. 다시 “우리는 여기 있다”를 연호했다. 행진 중에 그렇게 서럽게 들렸던 구호가 위로가 되어 돌아왔다. 여전히 서럽고 억울하고 분했지만, 우리는 이 경험으로 인해 더 단단해질 것이라고 느꼈다. 그래, 우린 여기에 있고, 결국 퍼레이드를 완주했다. 상처 입고 분노하고 서러웠을지언정 포기하지 않았다. 이 부당한 날을 함께 기억하고, 울고, 함께 분노하고 싸워줄 사람들과 있었다.
갈수록 공격적인 혐오 세력, 이를 방관하는 공권력
축제 날 아침까지만 해도 나는 우리의 승리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2014년 서울의 퀴어퍼레이드 기획단으로 활동을 시작해 처음 성소수자 혐오 세력과 정면으로 충돌했던 신촌에서의 축제를 만들었고, 이듬해 함께 서울시청 광장을 열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싸움과 충돌이 있었는지를 기억한다. 혐오 세력과도 싸웠고, 눈치를 보는 공무원들과도, 참가자들을 보호해주지 않는 경찰과도 싸웠다. 그러나 우리의 축제는 한 번도 저들 뜻대로 좌초된 적이 없고, 끝내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행진했다. 과정이 순탄치 않을지언정 동인천역 북광장도 응당 그렇게 축제가 벌어질 것이라 확신했다.
안일한 생각이었다. 인천퀴어문화축제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기지 넘치는 좌판 부스를 준비했고, 행진까지 진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획된 부대 행사가 세팅조차 되지 못했고, 행진 차량이 훼손되었고, 무능하고 무책임한 공권력에 의해 혐오 세력의 요구대로 깃발을 내려야 했고, 갖은 모욕과 폭력에 노출된 채 퍼레이드가 진행된 것은 충격적이었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던 것은, 익숙하기까지 한 저들의 폭언이나 갈증보다는 무력감이었다. 넓은 광장 한 켠, 좁은 구석에 몰이 당하듯 가둬진 채 점차 좁아지는 공간을 보고 있어야 했을 때의 그 무력감. 광장에서도, 행진하던 길 위에서도, 보호를 빙자한 감금에 아무것도 하지 말 것을 종용당하며 막연히 해결만 바라고 있어야 하는 시간은 너무 괴로웠다.
축제가 끝나고 이틀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날의 풍경이 신경에 박힌 듯 생생하다. 충돌 중인 저지선 뒤에 서 있을 때 “밀려나도 괜찮으니 다치지 말라” 소리치던 동료의 목소리, 혐오 세력 쪽 사람을 내보내라는 요구에 ‘이야기하러 온 사람’이라며 도리어 우리를 저지하던 경찰, 철창을 넘어오려던 배낭을 멘 남자와 그를 저지하려 소리를 지르고 앞을 막아서던 사람들, 깃대를 단단히 쥐고 ‘여긴 우리 행사장이니 당신들이 나가라’며 자리를 지키던 활동가, 눈물 젖은 얼굴로 행사장을 뛰어다니던 축제조직위원들, 혐오 세력의 손에 부러지던 깃대 소리, 갖은 모욕과 삿대질을 견디며 울며, 연호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걷던 행렬. 폐회 선언 후 혐오 세력을 향해 ‘수고하셨다’ 말하던 경찰의 모습.
떠올리면 화가 나고 서럽다. 종교의 이름을 빌어 자행된 차별과 폭력이. 방관으로 동조한 무력한 공권력이. 그리고 이 불의한 광경을 가능하게 한, 성소수자의 오늘을 나중으로 미루는 사회가.
혐오가 우리의 존재를 지울 수는 없다!
하지만, 괜찮다. 우리는 지난 이틀간 분노와 ‘오늘의 우리’를 이야기했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그날의 북광장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싸워나가야 할지에 대해.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할 일을 할 것이다. 마냥 서러워할 새가 없다.
그날은 그저 힘들기만 한 날은 아니었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참가자들은 음악을 틀고 축제를 즐겼다. 좌판을 깔고 부스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한쪽에서는 저주 섞인 악담을 퍼붓는 이들과 경찰의 충돌이, 다른 한쪽에서는 최신가요에 맞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풍경이 펼쳐졌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퀴어들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낙담하지 않고 꿋꿋하게 우리의 삶을 사는 모습이. 우리의 존재를 지우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도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춤을 추는 모습이. 우리를 보호하지 않는 경찰에게 ‘경찰,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라고 노래를 불러주며 응원하는, 그래서 결국 경찰들도 웃게 만든 해학이. 그 모든 혼란 중에도 옛 애인이랑 눈 마주친 걸 기억하는 연애담이!
우리는 축제를 즐겼고, 끝까지 행진했으며, 존재를 드러냈다. 서로가 서로의 앨라이(Ally, 지지자)가 되어 함께 혐오에 맞선 날이었다. 우리는 축제를 억압과 폭력으로 물들인 혐오 세력과, 이에 묵인으로 동조한 공권력의 책임을 묻고, 더 많은 앨라이들의 지지와 연대를 요청할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해. 끝까지, 끈질기게, 행복하게!
우리는 꿋꿋이 살아남아, 움직이고, 소리칠 것이다. 혐오는 결코 우리의 존재를 지우지 못한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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