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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무죄, ‘여성에게는 국가가 없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을 인정하지 않은 선고공판 그 이후



“피고인 무죄….”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정무비서에 대한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및 추행’ 혐의에 관해 1심 선고 공판이 열린 14일, 법정에 울려 퍼진 말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지난 달 26일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열린 긴급 토론회에서 피해자의 증언이 얼마나 일관적으로 진행되었는지 보고된 바 있고, 이 사건에서 업무 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의 근거를 제시하는 법조인들의 의견도 제시된 터라 더욱 충격적인 판결이었다. (관련 기사: 안희정 성폭력 재판에서 ‘진짜’ 주목해야 하는 것은? http://ildaro.com/8268)


판결 요약문을 읽은 조병구 부장판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주 무거운 탄식들이 재판정에 흘러나왔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는 항의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에는 이미 판사는 자리를 벗어났고, 이제 나가달라는 얘기밖에 돌아오는 게 없었다. 하지만 이 공간을 벗어나면 정말 그 결과를 현실로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에, 방청석에서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14일 오전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뒤 법정을 나서고 있다. ⓒ일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 현행법으로는 범죄 아니다?


판결문에서 납득할 수 없는 대목은 여러 번 나왔다. 먼저 재판부는 이번 사건에 대한 무죄 판결의 근거로 피해자의 진술과 행동을 지적했다. “피해자 진술 외의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피해자의 진술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안 전 지사는 피해자가 성폭력을 당한 사실을 처음 알렸을 때, 자신의 행위가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며 사과하고 도지사직을 사퇴한 바 있다. 그러다가 소송이 진행되면서부터 말을 바꾸었다. 이 사건은 피고가 스스로 권력형 성범죄를 자백했고 이후 말을 번복했음에도, 재판부는 이를 명백한 범죄의 증거로 삼지 않고 피해자를 탓하며 면죄부를 준 것이다.


또한 재판부는 “피고인이 유력 정치인이며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거론되며 도지사로서 별정직 공무원인 피해자의 임면권을 가진 점 등에서 ‘위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면서, 그러나 “위력을 행사한 증거는 없다”고 했다. 이와 관련하여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수차례 언급했다. 피해자가 성숙하고 똑똑한 여성이므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성적 요구를 거부)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재 형법상으론 이 사건을 처벌할 수 있는 범죄로 보기 어렵고, “No Means No rule(노 민스 노 룰), Yes Means Yes rule(예스 민스 예스 룰)”이라는 ‘동의’를 기준으로 성범죄를 판단하는 체계를 도입할 것인지는 “입법론적 문제”이고, “근본적으로 사회 전반의 성문화가 변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피고가 ‘위력’을 가진 자라는 점과, 피해자가 ‘동의’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 사건을 업무상 위력에 의한 성폭력으로 판단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눈에 보이는 폭행이나 협박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위력 행사로 인한 성폭력 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및 추행’ 죄가 형법에 존재하는 데도, 법관이 이를 사문화시키는 발언을 하며 책임을 회피한 것이다.


때문에 재판부가 선고한 ‘무죄’라는 판결은 재판부 스스로에게 한 것처럼 들렸다. 이 판결의 책임을 입법부와 사회 구성원들에게 돌리면서, ‘나는 형법을 따를 뿐이며, 나는 무죄다, 수많은 권력형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이 판결이 어떤 의미가 될지 나는 모르겠다’는 얘기처럼. 재판장에는 무엇이 정의인지 선언하고 법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주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


▶ 14일 저녁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안희정 무죄 판결에 분노한 항의행동’ 문화제에서 참자가의 피켓 ⓒ일다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부정한 판결


법원을 나섰을 때, 이른 아침부터 재판을 기다리며 읽고 있던 책의 문장들이 다시 떠오르며 ‘여성에게 국가가 있는가?’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일본의 페미니즘>(日本のフェミニズム, 河出書房新社)이라는 책에서는 1,2차 세계대전, 전쟁 중에 일본이라는 국가가 어떻게 공창제도를 운영했으며 여성들을 어떻게 매춘으로 끌어들였는지를 다루고 있다. 흥미로운 부분은 일본이 1921년에 체결된 ‘여성 및 아동의 매춘금지에 관한 국제조약’에 가입한 후, 국제연맹에서 파견한 조사단의 요구에 일본 정부가 보인 태도다.


“조사단이 ‘일본은 지금 딸들이 부모의 빚을 반환하기 위해 매춘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지 그리고 그게 딸의 자유의지에 의한 행위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일본 정부에 답변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 측에선 여성들이 매춘을 강요당하는 건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여성들은 매춘으로 번 돈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에 따라 그 돈을 부모에게 주는 것뿐이라고 했다.”(p.26)


책의 필자 우노자와 아카네는 “<자유의지>라니, 이 얼마나 편리한 말인지”라고 한탄한다.


그런데 시대를 훌쩍 건너뛰어 2018년 한국의 법원에서 ‘돈을 버는 독립적인 여성의 자유의지’를 멋대로 재단하며,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졌기 때문에 자유의지로 한 행위이지 성폭력이라고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재판부가 정말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정한다면 ‘동의’가 없는 성관계는 성폭력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판결을 내리면서, 그 판결의 이유가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언어도단을 목격해야 했다.


▶ 선고공판 직후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안희정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 ⓒ일다


판결 후,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에서도 이에 대한 질타가 쏟아졌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은 “피해자는 ‘나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이 없다’고 호소한 게 아닙니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당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피해자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기 때문에 가해자가 무죄라면,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는 모든 사람은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없다는 기적의 논리입니다.”


정혜선 변호사는 “피해자는 피해 사실을 일관되게 진술했고, 피해자 진술에 부합하는 증인들의 증언도 있었다”며, 피해자 진술이 불명확했다는 판결에 “변호인으로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밝혔다.


권김현영 여성주의 활동가는 “이 재판 과정 전부가 위력이었다”고 말했다. “검찰과 피해자가 전체의 공판 과정을 전면 비공개하거나, 아니면 피해자가 이 공판 과정을 지켜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결국 그렇게 되지 못한 것”과 “안희정 전 지사가 가족, 지지자, 변호인단 등의 많은 자원을 동원하며 자신의 의사 표현을 마음껏 할 수 있었던 환경”을 언급하며 “불균형적인 피해자와 가해자의 위치가 재판 과정에서도”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또 판사가 피해자에게 “정조” 운운하는 “말도 안 되는 이 재판 자체가 위력이었다”고 말했다.


거리로 나온 시민들 “사법부는 유죄다”


기자회견에서 변호인이 대독하여 읽은 피해자의 입장은 “부당한 결과에 주저앉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권력자의 권력형 성폭력이 법에 의해 정당하게 심판 받을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울 것”이고 “굳건히 살고 살아서, 안희정의 범죄 행위를 법적으로 증명할 것입니다. 권력자의 권력형 성폭력이 법에 의해 정당하게 심판 받을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 “끝까지 함께 해 달라”고 부탁했다.


▶ 14일 저녁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열린 ‘안희정 무죄 판결에 분노한 항의행동’ 문화제 현장 ⓒ일다


곧이어 서울서부지방법원 앞에서 ‘안희정 무죄판 결에 분노한 항의행동’ 문화제가 저녁 7시에 열린다는 공지가 나왔다. 긴급하게 몇 시간 전에 공지가 나갔음에도 거리로 나온 시민들은 점점 늘어났고, 약 4백명이 법원 앞에 모였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의 발언 외에는 준비된 것이 없었지만, 뮤지션 예람과 ‘생각많은 둘째언니’의 공연, 그리고 현장의 자유 발언들이 채워치면서 밤 9시 30분까지 집회가 이어질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많은 이들이 발언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공유했다. “돈 없고 직업 없고 오히려 무고죄로 범죄자 되기 직전의 삶”을 토로하며“뭐라도 좋으니까 희망을 보고 싶다, 살고 싶다”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수많은 증거들을 끌어 모아 제출했음에도 가해자의 ‘기억나지 않는다’에서 ‘그런 적 없다’고 바뀐 진술을 철떡 같이 믿고 가해자에게 무죄 선고를 내린 재판의 경험”을 털어놓으며, 사법체계에서 성폭력 피해자의 취약한 위치를 성토하는 이도 있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그럼에도 나는 살아가고 있고 살아갈 것”이라고 말하며 김지은씨를 응원하기도 했고, 아직 발화하지 못한 성폭력 경험을 안고 살아가는 피해자들에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걸 이해한다. 그것 또한 괜찮다”고 위로를 전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교육자라고 밝힌 시민의 발언도 인상적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학생들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설명하고 감히 자유와 평등을 이야기할 수 있겠냐, 법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며 답답함을 토로하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나의 양심에 따른 교육을 하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멈추지 않고 연대하며 이 싸움을 계속하겠다”고 목소리 높였다.


이번 사건 재판부와 피고 측 변호인단에게 당신들이 말했던 ‘피해자다움’을 지금 이곳에 와서 찾아보라고 묻고 싶은 광경이었다.


▶ ‘안희정 무죄 판결에 분노한 항의행동’ 문화제에서 안 전 지사와 조병구 부장판사 피켓 부수기 퍼포먼스. ⓒ일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김혜정 부소장은 김지은 씨가 지지연명에 서명한 1만 명의 이름을 보면서 ‘하루에 한 명씩 감사 인사를 해도 27년이 걸리겠네요. 그 때까지 살아서 싸우겠다’고 얘기한 말을 전했다.


문화제에 참여하면서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다. 지금 여성을 사회구성원으로서 동등하게 존중하고 그 권리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국가는 없을지언정, 끝까지 싸우겠다는 사람들과 피해자의 곁을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을 봤기 때문이다.


자유 발언에서 오빛나리씨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재작년에 성폭력 사건을 공론화했고 연대 활동을 했어요. 그 때 누가 저에게 ‘너 요즘 뭐하고 지내’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어요. 제 얼굴은 영상으로 나갔고 제 말들은 문장이 되어 배포되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내가 뭘 하고 있다고 말할지’ 망설였어요. 하지만 저는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말하려고 합니다. 저는 재작년 11월에 고양예고 성폭력 사건을 공론화하고 연대 활동을 했어요. 그 단체 이름은 ‘탈선’이었어요. 전 대표로 활동했고 제 이름은 오빛나리입니다. 이제 괜찮아요.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이 일을 기억할 것이고 여러분도 그럴 테니까요.”


2018년 8월 14일,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하루를 보낸 ‘안희정 사건 1심 선고 공판’ 의 그 날, 그 현장에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멈추지 않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박주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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