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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몸으로’ 여자주인공 연기할 수 있겠냐
[Let's Talk about Sexuality] 여자 배우의 외모 스트레스 (김지영)
※ <일다>는 여성들의 새로운 성담론을 구성하기 위하여, 다양한 여성들의 몸과 성과 관계에 대한 가치관과 경험을 담은 “Let's Talk about Sexuality”를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배.
배.
배......
오늘의 배.
어제의 배.
오늘 아침의 배.
오늘 저녁의 배.
어제 점심 먹기 전 12시 25분의 배.
지금 밤 12시 25분 야식을 먹고 난 후의 배.
내 순간순간의 자존감은 지금 배가 얼마나 나왔나로 결정된다.
속이 얼마나 비었는지, 이 배가 들어갈 만큼 활발한 배변 활동을 했는지, 간식을 먹었는지, 먹더라도 자기 컨트롤 능력이 발휘되었는지, 야식에 대한 욕망은 이겨냈는지, 하루의 스트레스를 맥주로 풀려고 했는지, 안주는 무엇을 곁들였는지….
만약 이 모든 것에 실패했다면 내 자존감 수치는 끊임없이 떨어지며, 예민함은 그만큼 높아진다. 내 몸이 부끄럽고, 그에 따라 내 자신까지 부끄러워지기 때문이다.
‘내 몸이 부끄럽다’
▶ 여배우의 ‘지나치게 예뻐야 함’을 충족시키지 못 하는 나는 배우가 꿈이라는 걸 밝히는 것조차 부끄러웠다. ⓒ김지영
언제부터 내 몸이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을까. 교복 치마 밑으로 다리를 드러냈을 때, 같은 반 남자애가 ‘김지영, 다리 살 좀 빼.’ 라고 말하던 그 순간부터였을까. 아님 13살, 모두가 똑같은 교복을 처음 입었을 때, 비교할 것이라곤 서로의 비율이 얼마나 좋은지 밖에 없다는 걸 알고 끊임없이 다른 아이들과 내 몸을 비교하던 그 순간부터였을까. 그것도 아님 뽀얗고 “여리여리한” 여자애가 인기 많은 걸 부러워하면서부터였나.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내 몸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평범하던 내가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졌을 때, 나는 내가 얼마나 재능 있는지 증명하기에 앞서 배우 같지 않은 외모를 부끄러워해야 했다. 나는 14살 때부터 배우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사실은 큰 소리로 말하지 못 하는, 친한 친구와의 비밀 쪽지에나 적어야 하는 탑 시크릿이었다. 왜냐하면 여자 배우는 ‘예뻐야 하기’ 때문에.
여배우의 ‘지나치게 예뻐야 함’을 충족시키지 못 하는 나는, 이런 나를 부끄러워해야 하는 경험이 많았다. 꿈이 뭐냐고 물어보는 학원 남자 선생에게 ‘영화 관계자’라고 말했다가 ‘하하하! 하긴 OOO도 고등학교 때 보니까 얼굴이 영 아니었더라’ 라는 말을 들었다. 지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나를 소개할 때마다 마주했던 그 ‘관심 없다’는 관계자들의 냉담한 표정들, ‘네가 이 중에서 제일 다리 굵다’는 남자 선배의 농담(같은 진담), ‘그 몸으로 여자 주인공 할 수 있겠냐’며 들었던 비웃음 섞인 타박들,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반복되어 등장하는 예뻐야 하는 기준들, 비교들. 그 속에 꿈틀꿈틀 피어나는 질투와 내 자신에 대한 비하.
수많은 말, 말, 말들과 시선과 시선 속에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을 포기해야 했다. 나도 모르고, 내 친구도 모르고, 선배도 모르고, 아마 당신도 모를 그 ‘답’을 향해 그저 내 몸을 끊임없이 교정해갈 뿐.
사랑받는 여성을 연기하기 위해 ‘단식’을 하다
연극배우 일을 하면서 몇 번 ‘아름다워 보이는 것 같은‘ 여성의 역할을 맡았다. 희곡에 분명하게 명시된 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아무도 나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아름다워야 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캐릭터는 주변 남자들로부터 사랑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충분히 아름답고, 사랑받을만하다고 믿을 수 없었다. 자신 없는 배역을 자신 있게 연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배역을 위한 가면을 선택했다. 그 가면은 극심한 다이어트였다. ‘나는 내가 아니다’ 라는 주문과 동시에 사랑받을만한 조건을 획득해내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살을 빼는 것’이었다. 누군가 그러지 않았는가. 최고의 성형은 다이어트라고.
내가 경험한 최고의 다이어트는 단식이었다.
나는 먹는 것을 좋아한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정말로 나는 먹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단식은 최소한의 생명 유지를 위한 밥도 잘라내 버린다(斷)는 뜻 아닌가. 인간의 본능을 건드리면 가슴에선 불이 난다. 솔직히 단식 기간은 생각보다 견딜만하다. 오히려 단식이 끝난 보식 기간,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희망이 가득 차 있는 그 때, 하지만 이것도 저것도 먹으면 안 되는 그 때가 더 힘들다. 나는 엄마가 호떡 먹을래? 라고 물어봤다는 이유로 엄청나게 큰 마트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나 먹을 수 없는 거 먹으라고 하면 진짜 화나!”
숨도 잘 안 쉬어져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했고, 때론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우울해졌다. 분명 나는 미쳐있었다. 하지만 나는 무서웠다. 공연 때 입을 벨벳드레스 위로 울퉁불퉁하게 보일 살들이. 관객들이 ‘남자들은 저 여자를 왜 좋아하는 거야?’라고 생각할 것이. 그러니까, 사람들의 눈에 내가 아름다워 보이지 않을 것이.
▶ 작년에 친구와 함께 외모강박이 여성의 몸과 자아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한 연극 <Makeup to Wakeup>을 무대에 올렸다. 소개 영상 중. (제작: 사막별의 오로라)
돌이켜보면 연습하기 위해 남들의 시선 앞에 놓인 매 순간이 부끄러웠다. 자신 있게 연기하는 한편으로 치마 고무줄에 찡겨 튀어나온 내 배가 부끄러웠다. 인물로서 연기하는 한편으로, 앉으면 지나치게 퍼지는 내 허벅지가 부끄러웠다. 자유로운 날이 별로 없었다. 이 느낌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내가 가장 살찐 부위를 앞에 앉아있는 모두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나는 배에, 허벅지에 살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힘을 주고 서있었고, 발끝을 세우고 앉았다. 불편함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너무나 당연해서, 내가 불편하다는 것조차 인식 못 하고 있었다. 불쾌(不快)의 감각은 연기에 집중해야 하는 순간에도 숙주처럼 늘 나와 함께 있었다. 연습실에 있는 거울을 보면서 끊임없이 기대에 못 미치는 내 모습을 확인했다. 거울을 보고 불쾌감을 느꼈다면 거울을 안 보면 될 텐데, 마치 거울을 다시 보면 마음에 드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듯이 끊임없이 거울을 보고, 다시 봤다.
공연이 가까워져 살이 내 인생 최대로 빠지고, 화장을 하고, 머리를 세팅하고, 예쁜 옷을 입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다 하고 거울을 봤을 때! 나는 기대만큼 예쁘지 않았다. 얼굴이 좀 더 작았어야 했다. 다리가 가늘고 쭉 뻗었어야 했다. 나는 그냥 애초에 이 배역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라는 생각은 연기에 도움이 안 되니, 굳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런 느낌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스스로 아름답다고 만족할 수 있을까. 내가 아름답다는 감각은 도대체 어떻게 획득되는 것일까? 그 감각은 늘 나보다 10센치 위에 있었다. 좀 더 다가갔다고 느꼈어도 그것은 또 8센치 위에 있었다. 도저히 잡히지가 않았다. 그 간극은 ‘난 타고나지 못했다’ 라는 원망으로 채울 수밖에 없었다.
여배우의 몸에 대한 평가와 강박을 연극으로 만들며
연예인 사진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여리여리하고” 뽀얀 그네들을 볼 때면 어떤 아름다움에 대한 본능 같은 것을 느낀다. 희열감과 함께. 한 번 자극된 본능은 쉬이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쳐다보게 된다. 아이돌 이 멤버에서 저 멤버로, 이 배우에서 저 배우로, 저 배우의 지금 모습에서 리즈 시절 모습으로 검색은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문다.
검색의 시간이 길면 길수록 인식하지 못 하는 예의 그 불편함과 불쾌함도 점점 자라난다. 하지만 오직 이 시간만이 아무 생각 없이 즐길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인 걸? 하는 자기위안으로 나는 무슨 의식처럼 하루에도 몇 분씩 몇 시간씩 검색을 한다. 하지만 몰랐겠지. 그렇게 스스로 아름다움의 기준을 내면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름다움에도 틀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인식하고 있다가 확실히 깨닫게 된 것은 친구와 함께 <Makeup to Wakeup>이라는 공연을 만들면서부터이다. 여자 배우가 항상 듣는 외모에 대한 평가, 지적,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 같은 것을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사실 존재하지도 않는데, 왜 우리는 그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것이 무엇이관데 그곳에 다가가기 위해 고군분투할까, 기준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인가??
▶ <메이크업 투 웨이크업>에 이어진 연극 <Makeup to Wakeup 2>에서는 아름다움의 틀과 몸을 집중 탐구했다. (제작: 사막별의 오로라)
간지러운 곳을 시원하게 긁게 될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정작 내가 마주한 것은 어떤 ‘수치스러움’이었다. 아름다워지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 과정들을 인정하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왜냐하면 곧 ‘아름답지 않음’을 마주해야했기 때문이다.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수많은 상처들이 수치스러웠다. 사랑받지 못 했던 그 순간들을 마주하는 게 괴로웠다.
나는 누군가들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고, 사랑을 보답 받지 못하는 순간들을 외모 탓으로 자연스럽게 돌리며 나를 수치스러워하고 있었다. 이 여자 연예인이라면 나 같은 고민은 없겠지, 하는 환상을 마음대로 뒤집어 씌워놓고, 나를 투영시키고 한편으로는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나를 사랑할 권리를 끊임없이 남에게 주고, 남들의 평가로 스스로를 평가했다. 미의 기준이란 남들이 제시해 놓은 정답이었다. 정답을 맞히면 그 사랑을 획득할 수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답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니까 매일매일 배가 얼마나 나왔는지 수치를 재는 질문지를 풀고, 그 날 (답이 없는) 정답으로 가는 느낌이 있었다면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 자존감은 그렇게 쉽게도 휘둘렸다.
허구로 만들어졌지만 ‘미의 기준은 분.명.히 존재한다’
내가 쉽게 휘둘린 아름다움의 기준은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인지, 연극을 만들면서 우리는 그 답을 찾고 싶었다. 답을 찾아야 비로소 그 기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하고 연구한 결과, 매스컴도 그것을 만들고 매스컴과 결탁한 자본주의도, 역사도, 정치도, 예술도 각자의 이득을 위해서 열심히 그 기준을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콕 짚어 이거다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 김정, 황은후 배우가 공동 연출하고 출연한 연극 <Makeup to Wakeup> 소개 중에서. (제작: 사막별의 오로라)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케이블방송 <겟 잇 뷰티>에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당시의 트렌드인 갈매기 눈썹을 시연하는 장면이 나왔다. MC는 ‘누가 아직도 일자 눈썹하니?’ 라며 일자 눈썹은 이제 트렌드가 지났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러자 곧장 ‘누가 아직도 일자 눈썹하니’ 라는 제목의 기사가 떴다. 그 기사를 본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순간, 나는 ‘어, 나 지금 일자 눈썹하고 있는데?’ 하는 생각과 함께 나 자신이 촌스럽다고 느꼈다. 내 온 신경은 촌스러운 눈썹으로 향했다.
나는 지금 당장 눈썹을 지우고 싶은 부끄러움과 함께 ‘근데 갈매기 눈썹이 트렌드라고는 누가 정한 거야?’ 하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그 트렌드를 정한 사람을 추적해가는 페이크 다큐를 만들어보고자 했다. 주변 전문가들에게 도대체 갈매기 눈썹 트렌드는 누가 정한 거냐고 물어봤을 때,
“글쎄.....”
아마도 해외의 어느 유명한 사람인 것 같다, 혹은 브랜드인 것 같다는 애매모호한 답만이 돌아왔다.
사실은 그런 것이었다. 아름다움의 기준은 다 파악할 수도 없는 수많은 요인들로 만들어지는 것일 테다. 답을 찾지는 못 했지만 뚜렷이 알게 된 것은 ‘누가 만들었을지 모를 그 기준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보았다.
어렴풋이 인지하고 문제의식을 느끼는 것과 분명히 대면하는 일은 다른 것이다.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보고 인지한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자유로움에 좀 더 근접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따라야하는 정답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변화한 것이다. 아름다움의 기준이란,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허구로 만들어진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남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고, 좀 더 나답게…
▶ <Makeup to Wakeup 2>에서 연기하는 장면. (출처: 사막별의 오로라)
나는 절대로 다리를 드러내지 않았다. 더운 여름에도. 무대 위에서 다리가 드러나면 자신감이 떨어지기 때문에 의상 디자이너에게 ‘다리는 드러내지 말아주세요’ 하고 미리 귀띔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다리를 드러낸다. 미의 기준이 허구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했기 때문에.
공연을 올리는 과정에서 마주한 균열은 정답을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찾게 했다. 그러니까 시선이 ‘남들의 눈에 아름다운가’가 아니라 ‘내 눈에 아름다운가’로 급선회한 것이다. 이것은 내가 좀 더 나다울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나답게 살고 싶다’가 가장 큰 바람이었는데 거기에 한 걸음 다가가게 된 것이다. 이것은 남들의 기준에 맞춰 살 때와는 다른, 풍성한 충족감을 동반한다. 한 마디로 ‘맞다’는 느낌을 담고 있다.
문제를 대면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 그리고 나를 구속했던 기준이 허구라는 것을 파악하는 것, 그것은 내 발걸음을 30도는 틀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솔직히 아주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고 내가 지금 다이어트를 안 하고 있나? 아니다. 나는 여전히 아름다움의 기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 했다. 여전히 하루하루 배의 높이를 체크한다. 하지만 좀 더 ‘내가 있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다. 그것은 나비 효과처럼 나 자신을 사랑할 권리를 좀 더 나에게로 가져왔다. 이제는 남들의 말에 예전만큼 흔들리지 않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그런 내가 예쁘다. (김지영)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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