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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섹스’로서 느끼는 내 존재의 무게

[Let's Talk about Sexuality] 나는 없지만, 또 있다 (청킹)


※ 새로운 성담론을 구성하기 위한 “Let's Talk about Sexuality” 기획 연재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으로 진행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나는 나를 보지 못한다


이 글을 써달라고 제안을 받았을 당시, 한참을 망설였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과연 있기는 할까, 라는 의심이 컸다. 지금 당장 뿌리박고 있는 정체성에 관하여 혀를 놀린다는 것이 스스로에 대한 불경스러움으로 다가왔다고나 할까. 혹은 나와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다른 나뭇가지들, 언제 부러질지 모르는 그 위태로운 존재들에 관하여 나는 한없이 조심을 기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한국인터섹스당사자모임 ‘나선’ 로고. 나선 페이스북 페이지의 프로필 이미지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인터섹스당사자모임 나선


나 자신을 인터섹스(intersex, 간성間性, 성기나 염색체, 호르몬 등 여성/남성으로 구분되는 신체와는 다른 특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로 인식한 지 1년이란 시간이 스쳐갔다. 한국인터섹스당사자모임 ‘나선’에도 가입했고, 인터섹스를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 퀴어 퍼레이드 현장을 터벅터벅 걷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 이상의 것들을 더 할 수가 없었다. 하고 싶지 않았다.


인터섹스는 퀴어 가운데서도 현대 의료계와 밀접한, 그러나 매우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다. 대부분의 인터섹스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손톱만큼의 자각도 있기 전에, 거의 태어나자마자 전형적인 여성의 성기 혹은 남성의 성기처럼 보이도록 수술 받는다.(수술을 ‘당한다’는 표현이 더 맞다. 그것은 자기 신체에 대한 결정권을 박탈당하고 일방적으로 침투되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차가운 수술용 칼로부터 상흔(傷痕)을 입은 채 세상에 내던져진다. 따라서 인터섹스가 처한 폭력과 차별의 연원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의학적인 조사도 뒤따라야 한다.


내게는 그러한 과정이 몹시 힘든 일이었다. 내 몸에 어떤 의료 과정이 적용되었고, 내 살결이 어떻게 찢겨져 나갔는지를, 나는 도저히 ‘객관적으로’ 다시 살펴볼 수 없었다. 유년기를 통째로 집어삼킨 병원에서의 기억은 쉽게 호출되었다. 그것은 지워지지 않는, 의식 깊은 곳에 자리한 낙인과도 같았다. 낙인이 아로새겨진 자국에는 시큼한 병원 약물 냄새, 헐렁거리던 환자복의 촉감, 눈부시게 하얀 커튼과 침대, 이불, 간호사, 의사… 이런 고통의 감각들이 어우러져 있었다. 나는 인터섹스에 관한 지식을 쌓아가면서 괴로운 유년기의 사막을 건너가야만 한다는 사실에, 지레 겁먹었던 것 같다.


인터섹스, 투명인간과도 같은 정체성


그렇다면 나는 정말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까. 이 칼럼을 통해 편하게 나의 경험과 생각을 담담하게 이야기해주면 된다고 하던데, 살아가면서 인터섹스로서 나는 과연 무슨 경험을 했던가.


소수자로서의 삶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내 집단의 경계로부터 튀어나온 ‘이방인’으로 살아가거나, 분명히 존재하지만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으로 살아가거나. 인터섹스는 진정한 의미에서 투명인간 그 자체다. 인터섹스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경험할 수 없다. 어느 곳을 가든지 ‘없음’이라는 존재 양태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고 만다. 어찌저찌하여 믿을 만한 누군가에게 인터섹스임을 커밍아웃했다고 하자. 그래봤자 돌아오는 반응은― “아… 그럼 혹시, 자웅동체같은 거야…?”


▶ 7월 14일 진행되었던 서울 퀴어퍼레이드에서, 처음으로 ‘나선’ 깃발을 높이 들고 거닐었다. 무척 뜨거운 날이었다. ⓒ한국인터섹스당사자모임 나선


퀴어를 향한 많은 혐오의 목소리에서조차 인터섹스의 존재는 지워져 있다. 지워졌다기보다는, 그들은 우리를 알지도 못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로서 살아가는 일은 물론 슬프다. 그러나 그 슬픔마저도 가시적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분노의 목소리를 내었다가도 이내 멋쩍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누구인지 손수 증명해주어야 하고, 대부분은 증명들마저도 먹혀들지 않아 ‘보이지 않는 상태’로 회귀할 때의 피로감이란. 이런 현실에서 나는 나를 보지 못하며 살아왔다. 별로 보고 싶지도 않았다. 거울을 마주했을 때, 거기에는 나를 본떠 만든 밀랍인형 하나가 서있을 뿐, 나는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말해줄 것이 아무 것도 없기에, 이 ‘없음’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인터섹스라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항상 뜬구름 위를 떠다니는, 어디에도 내려앉지 못하는 내 정체성과 존재의 무게는 분명히 내 감각 안에 들어와 있다. 이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은 물론, 나조차 나를 보지 못한다. 보지 못했다는 것은 부재(不在)의 근거로 직결된다. 그러나 소수자이고, 소수자로서의 삶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네가 지금 보지 못한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남자 혹은 여자로 사회에 편입시키기 위한 ‘개조’


앞서 말했듯 나는 태어나자마자 요도하열이란 진단을 받고 바로 남성의 성기처럼 보이도록 수술 당했다. 요도하열 증상 가운데에는 배뇨활동 등에 차후 지장이 생길 우려가 있어서 수술이 꼭 필요한 경우도 물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남자아이가 앉아서 소변을 보게 하지 않기 위해서’, ‘정상적인 성기 모양을 갖추게 하기 위해서’, ‘사람 만들어주기 위해서’ 등의 이유다. 그러니까 나는, 원래는 ‘사람도 아니’었던 것이다.


인터섹스는 자웅동체 취급을 받거나, 심각하게 결격 사유가 있는 남성 혹은 여성으로 여겨진다. 적어도 작금의 의료계에서는 그런 존재다. 자기 신체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는 우리들의 의견과는 전혀 상관없이, 의사들은 의사 본인이나 부모의 판단에 따라 ‘사람으로’ 만들어버린다.


사실 이것을 ‘수술’이라 부르고 싶지 않다. 대부분의 인터섹스가 태어나자마자 겪는, 그래서 스스로가 인터섹스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이 과정은 수술이 아니라 ‘개조’에 가깝다. 개조하기 이전의 인터섹스들은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가 하나의 원죄 덩어리로 태어난다. 개조당함으로써 그제야 ‘면죄부’를 얻고 사회에 편입된다.


여하튼 나의 개조 과정은 단 한 번의 수술로 끝나지 않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6년이 넘도록 병원에 들락날락해야 했다. 입원해 있는 동안에 성기 쪽에는 알 수 없는 기구들이 덕지덕지 달려 있었다. 주삿바늘이 꽂혀있었고, 관들을 통해 무언가가 주입되고 있었던 것 같다. 너무 어린 시절이었다. 유치원도 제대로 다닌 적이 없으니 당연히 친구도 없었다. 병실에는 늘 엄마나 외삼촌, 의사나 간호사 같은 어른들뿐이었다.


마지막 수술을 끝내러 수술실로 들어가던 그때는 지금 일처럼 생생히 기억난다. 평소 눈물이 적었던 나는 그때서야 울음을 터뜨렸었다. 그간 느끼지 못했던 공포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렇게 울다가 지쳐, 마취제 때문인지 곧 잠에 들었던 것 같다. 눈을 떠보니 수술은 끝나 있었고 내 몸은 다시 하얗고 높은 천장을 가진 병실에 놓여있었다. 6살 남짓 되던 해였다.


나는 ‘거기에’ 있었다


기나긴 세월이었지만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엄마는 ‘아들을 사람 만들어준’ 의사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고맙다고 했고, 나에게도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라고 했다. 그렇게 수술실에서 겨우 벗어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칠 때까지 엄마는 내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다.


“너는 고추가 그렇게 됐으니, 다른 방면으로 남자다움을 갖추어야 해.”


개조로 만들어진 ‘고추’였으니, 나의 성기는 또래 아이들의 성기보다 크기가 작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다움에 대한 엄마의 집착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성기를 보인다는 것에 콤플렉스를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공중목욕탕에 가는 것이 꺼려졌고, 가더라도 가능한 성기를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친구들과 여행을 가지도 않았다. 학교 수련회나 수학여행은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남자아이들은 서로의 성기를 내보이며 함께 샤워하면서 우정을 쌓아가는 것 같았다. 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나중에 혼자 씻겠다고 했다.


엄마도 나의 콤플렉스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마는 한 번도 내게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해준 적이 없었다. 오히려 부끄러워하라고 가르쳤다. 그 부끄러움을 상쇄시키려면 네가 지금 열심히 공부해야한다고 했다. 더 이상 부끄러워지지 않도록, 사회에서 성공해야한다고 했다.


심할 때는, ‘너는 병신으로 태어났으니 어디서 그런 소리 안 들으려면’이라는 조건이 붙기도 했다. 나는 수술, 아니 개조로 면죄부를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엄마에게는 아직도 원죄로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그때는 그것이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이 저주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했고, 엄마가 하라는 대로 군말 않고 청소년기를 보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한참 지나서야, 나는 병원에서 요도하열로 진단받고 ‘개조’당하는 사람들이 많은 경우 인터섹스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살아온 나날들이 분하고 억울하게 느껴졌다. 짓지도 않은 죄 때문에 죄의식을 가지며, 엄마의 가르침대로 정상성의 범주에 몸을 들이려고 발버둥쳤던 지난날의 내가 미웠다. 나를 멋대로 수술해버린 의사의 얼굴을, 지금이라도 찾아가 짓밟아버리고 싶었다.


뒤이어 찾아온 감정은 망망대해에 떠도는 뗏목과 같은 막막함이었다. 아무리 붙잡으려 해도 붙잡을 수 없는 스스로의 존재감을 이해해줄 타인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을 잃어왔다고 비관하는 한편, 오히려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한 줄기 빛이 있었다. 누군가 보지 못했고 본 적이 없었어도 나는, 너무나도 분명히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 하나였다.


▶ ‘나선’ 정기모임 직후에 회원들끼리 찍은 사진. 동그랗게 모여 서로 힘을 내자고 다독였던 기억이 있다. ⓒ한국인터섹스당사자모임 나선


이제 나는 ‘나를 보지 못해도’ 괜찮다


사실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다. 아직 많은 사람들이 인터섹스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거나 잘못 알고 있다. 올해 퀴어 퍼레이드를 기사로 쓴 어느 기자는 인터섹스를 가리켜 ‘남녀한몸’이라 지칭했다. 이는 당연히 잘못되었고 ‘자웅동체’와 다를 바 없는 표현이다. 지금도 요도하열 환자들을 강제로 수술시키는 소아비뇨기과 의사들은 ‘남자아이를 진정한 남자로’ 만들어주는 구원자로 찬양받고 있다. (여론은 여전히 ‘남자’가 되는 문제에 더 집중한다. 여자아이를 여자로 만들어주는 일보다는 남자아이를 남자로 만들어주는 일이 중요하니까. 이 사회에는 아직도 남근에 대한 강박증이 남아있다.)


인터섹스는 사람을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구분하는 관습 밖에 놓여있다는 것만으로 투명인간이 된다. 퍽 슬픈 일이긴 하나, 나는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는 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비단 인터섹스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저마다의 소수자성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추방당하고 배제당하는 이들은 존재와 인식의 불일치 현상을 언제나 겪고 있다.


그러나 사회가 나를 지웠다고 해서 나마저도 나를 지울 수는 없지 않나. 비록 잘 보이지는 않아도 결국 나라는 존재가 이 땅에 내리박고 있는 뿌리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규정해주지 않는 상황을 견뎌내는 데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나는 진공상태 같은 숨막힘 가운데서도 내가 나도 모르게 지니고 있을, 일렁거리는 어떤 깊은 존재감을 믿는다.


나는 그냥 ‘나’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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