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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아픈 전쟁의 상처와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한국전쟁의 기억과 고통은 이를 겪어낸 사람들의 입으로 이야기되지 못했다. 가족이나 가까운 주위 사람들 사이에서도 전쟁의 경험은 침묵되었다. 특히 전쟁 속 여성들, 그리고 전쟁 후의 일상을 겪어낸 여성들의 이야기는 당사자들의 가슴 속에 묻혀 있다.
 
여성들의 기억 속의 전쟁과 그 후 삶의 이야기를 통해, 제대로 쓰여지지 못한 우리의 현대사를 비추어보고 전쟁과 여성, 전쟁과 인권이라는 화두를 던져보고자 한다.

“한번도 그때 얘기를 꺼내지 못했어” 
 

아버지의 사진을 꺼내보이는 이옥례씨

“6.25때 죽었다고 하면 무조건 공산당이 죽였다고 했지. 그렇지만 우린 국군이 죽였다는 걸 알았어. 그러니 얼마나 억울해. 국군한테 나라 지키라고 했더니, 선량한 국민을 죽이는 국군이 어디가 있나. 난 지금도 군인이라고 하면 나쁘다는 생각이 들어.”

서울 홍은동에 사는 이옥례(64)씨가 기억하는 전쟁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60년 간이나 이어진 “불행의 시작”이었다.
 
그가 또렷이 기억하는 날짜는 1950년 음력 9월 12일이다. 만으로 다섯 살이었던 이씨는 오전에 집을 나섰던 아버지가 불과 몇 시간 후에 주검이 되어 돌아온 것을 보았다.
 
“아버지가 머리에 총상을 입고… 아버지 시체를 방에 갖다 놓았는데 머리며 얼굴이 온통 피범벅이 되어서, 아직도 그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아. 할머니가 막 우셨던 거 하고.”
 
당시 전남 함평 수호리 마을이장이었다는 아버지 이홍범씨는 그때 나이 스물여섯 살이었다.
 
“그 전에 계속 총소리도 나고 전투가 있었는데, 그 날은 어째 조용했어. 아침 잡수면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오늘 이상하게 조용하다고, 동네 한 번 올라가보련다고 하셨어. 우리 집이 동네에서 외따로 있었거든. 그렇게 집에서 아침 잡수고 나가셨는데 죽어서 오신 거야.”
 
군인들이 이씨가 사는 마을과 옆 마을 젊은이들을 열댓 명 모아서 산으로 데려간 다음 총살을 시켰다고 한다. 그 중 다리에 총을 맞고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유일하게 한 명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왜 총살을 당했는지, 군인들이 왜 총을 쏘았는지 확실한 이유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좌익이네 우익이네 싸우던 시절에, 우리 마을엔 사상이다 뭐다 그런 것도 없었어. 나중에 사람들이 하는 말이, 너희는 왜 군대 안 갔냐 하고서 죽였다는 얘기도 있고. 한 마디로 그냥 죽인 거지. 그러다 사흘 후 중대장인지 지휘관인지가 동네에 와서 자기네들이 죽일 사람들이 아닌데 죽였다고 하면서, 군인들 세워놓고 가족들보고 나와서 때려주든 욕을 퍼붓든 하라는 거야. 무서워서 누가 때리고 그러나. 우리 할머니가 살려내라고 울었던 기억이 나.”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딸의 삶

고 이홍범씨. 사진에서 가장 왼쪽

이옥례씨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그 후 60년 가량 이어진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 비극의 역사에는 이씨와 이씨의 어머니, 그리고 이씨의 할머니 삼대에 걸친 여성들의 삶이 있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홀로 외아들을 키우며 사셨던 할머니는 아들마저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그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방문 바로 앞에 아들의 시신을 묻고 문도 닫지 않으셨다고 한다. “평생을 너무 불쌍하게 살다 가셨지. 할머니 생각하면 가슴이 더 아파. 우리 살아온 일이 하나의 드라마여.”
 
그 후 이씨의 어머니는 남편이 없는 집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두 딸을 키우며 살 수가 없어 재가를 했다. 이옥례씨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이 할머니 밑에서 자라게 된 것이다.
 
“가족이 풍비박산 되어버리고, 우린 고아가 되어버린 거지. 너무너무 억울해. 우리 아버지 죽인 군인들은 자기들이 죽으면 유공자라고 국가에서 보상도 받고 자녀들도 교육도 받는데, 군인한테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은 우리는 고아 같이 산 것을 생각하면.”
 
이씨는 두 딸을 남겨둔 채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버린 어머니에 대해 미움과 연민을 동시에 느낀다고 했다.
 
“낳아줬다는 것 하나 때문에 머리로는 엄마다 해도, 마음으로는 너무 원망스럽고 그래.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어.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자마자 봄인데, 만 나이 여섯 살밖에 안 되는데, 어린 마음에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동생은 맨날 엄마 찾으면서 울지. 그 젖먹이를 억지로 떼고 간 무정한 엄마 생각하면…. 그렇게 갔으면 잘이나 살아야지, 너무 불쌍하게 살고. 노후까지 어렵게 된 걸 보니까 더 밉고 한도 너무 많아.”
 
학교 다니던 어린 시절은 가장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제일로 가슴 아픈 것은 학적부 조사할 때마다 아버지 있는 사람 손들어, 어머니 있는 사람 손들어, 하면 한 번도 손을 못 들어 봤잖아. 그 전에는 그런걸 자꾸 물어보는지. 선생님들이 나를 너무 불쌍하게 생각하시는 거야.”
 
부모 없이 자랐지만 할머니의 억척스러운 살림살이와, 이옥례씨를 가엽게 여긴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학비를 보조 받아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시골에서는 내가 (여자아이들 중에서) 제일 처음 중학교 나오고, 고등학교도 처음이었어. 여자애가 광주까지 가서 학교 다니는 건 상상 못했어. 하지만 고등학교까지 나왔어도, 부모 없으니 어디 좋은 데로 시집을 갈 수가 있나. 내가 찾아볼 수밖에 없었지. 아무 것도 없는 곳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고생을 하고 살지.”
 
신문고라도 있었으면 울려봤을 텐데…

전쟁의 기억을 가슴 속에만 묻고 살아왔다는 이옥례씨

이옥례씨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자녀 셋을 낳아 키웠고, 지금은 네 아이의 할머니다. 살면서 자녀들에게 전쟁 때의 이야기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는지 물었더니 “못했지, 무서워서” 라고 말한다.
 
“무조건 그런 일 얘기하면 빨갱이라 해버리니까. 그렇게 안 해도 빨갱이로 몰아서 사람 죽이는 판에 누가 감히 말을 하겠어. 군부독재 시절엔 선거 때마다 간첩 사건 터뜨리고. 전두환 때도 삼청교육대가 있었는데 뭐. (나뿐 아니라) 우리 할머니도 그 이후에 한 번도 우리에게 그때 얘기를 하지 않았어. 다 가슴 속에 묻어버린 거지. 너무 억울한 일을 당했으면서도 어디다 하소연도 해보지 못하고, 신문고 같은 것이라도 있었으면 울려봤을 텐데…. 그런 세월을 우리는 살았다.”
 
이씨가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가슴에만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최근 들추게 된 것은, 57년 전 함평 수호리에서 있었던 민간인 희생사건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접수되어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다.
 
“결혼해서 (고향에서) 떨어져 살다 보니까 이걸 조사한 것조차 몰랐어. 작년 연말에서야 함평 현지 신문을 우연히 보고 알게 된 거야. 6.25때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 조사하고 위령제를 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전화해서 알아봤지. 바로 6.25 끝난 뒤에 이승만 때도 이런 일을 조사하려고 했는데 박정희 정권 들어서면서 말도 못 꺼냈나 보더라고. 그러다가 민주화되면서 정권 바뀌고 하면서 다시 싹이 트게 된 것 같아.”
 
하지만 이 사건이 과연 국가에 의해 진상이 밝혀질 수 있을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위원회에서는 아직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군인들 일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 날 일지가 없다는 거야. 어쩌면 너무 명백하게 잘못한 일이라서 없애버렸는지도 모르지. 어느 사단인지 못 찾아냈다는데, 우리 어머니도 그 사단 이름은 모르고, 중대장이 누구였는지 몇 사단이었는지 누가 알아. 당시에 학다리 사거리에서 전투가 있었다는데 거기 참가한 사람이 제주에 있다는 말을 들었어. 근데 담당자가 만나봤는지 어떻게 되고 있는지 모르겠어.”
 
이옥례씨는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다고 한탄을 했다.
 
“제주사건이랑 노근리 사건은 진상규명도 하고 추모사업도 하고 그러잖아. 진즉 나서야 했었는데, 그런 길이 있는 것조차도 모르고 무식하게 살았지. 농사짓는 농촌사람들이고, 그때 돌아가신 분들이 다들 젊어서 애도 없고, 있어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집에서 공부도 제대로 못 배웠잖아. 살기 급급하고 어려운 시절에 돌아가신 분에 매달려 있을 수 있는 사람도 없고.”
 
이씨는 고이 간직하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이 담긴 사진 두 장을 보여주었다. “천국 가서도 아버지 얼굴 못 알아볼 것 같아”서, 사진 속에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최대한 확대해서 다시 출력한 사진도 가지고 다닌다.
 
아버지 묘를 옮길 때도 손수 뼈를 추렸다는 이옥례씨, 총알 자국이 선연한 두개골의 상흔처럼 전쟁이 지나간 자리는 이씨의 삶 속에 고스란히 녹아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조이여울 기자  일다는 어떤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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