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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별, 성폭력을 해결하는 경험이 민주주의다
부처님 오신 날 실상사 ‘말하기 대회’를 돌아보며
부처님 오신 날, 실상사에서 ‘성차별 성폭력 피해경험 말하기 대회’를 한 지 몇 주가 지났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같고, 아무 일이 없었던 듯도 하다. 무슨 말을 했던 듯도 하고, 들었던 듯도 하다. 우리는 그날 실상사에서 만나기까지 어떤 풍경을 지나쳐 왔으며, 그 이후 어떤 광경을 만들어 왔는가. 이 글은 밝은 눈과 섬세한 귀를 동원해, 지나가는 ‘아무 일’을 잡아채 ‘여기’에 잡아두기 위한 기록이다.
‘성폭력 근절을 위한 지리산 여성회의’가 만들어지다
2017년 겨울, 실상사 어린이법회 순례행사에서 아동 성추행으로 추정되는 일이 생겼다. 눈밝은 목격자들은 그 행동을 즉각 저지했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당연히 여겨지던 행동들을 성평등 관점에서 다시 살펴보고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실상사에 문제 제기를 했다.
이 과정에서 목격자를 비롯해 마을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하던 사람들, 성폭력예방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 여성학자들이 참여해 피해당사자와 실상사 간 중재 역할을 맡아 해결책을 논의했다. 그리고 마을에 이미 벌어진, 혹은 앞으로 벌어질 지도 모르는 성폭력 사안을 공론화하고 논의를 진행시킬 수 있는 공적 기구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우리는 그 이름을 ‘성폭력 근절을 위한 지리산 여성회의’(이하 지리산 여성회의)로 정했다. 앞으로 마을에서 벌어지는 성차별, 성폭력 사안들을 공론의 장에서 토론하고, 필요하다면 성평등 교육과 피해자 상담을 지원하기로 하였다.
실상사에서 ‘성차별 성폭력 피해경험 말하기 대회’를 기획하다
실상사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실상사는 사부대중을 대상으로 젠더감수성 교육을 실시하고 피해당사자에게 정중한 사과를 하였으며, 지리산 여성회의가 피해자 상담을 지원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마침 사회적으로 미투(#MeToo) 운동(‘나도 당했다’를 넘어선 ‘나도 말한다!’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실상사와 젠더감수성 교육 등 후속 작업을 하기 위한 논의 자리에서 주지스님은 “숙박 등을 비롯한 물적인 토대는 실상사가 제공할 것이니, 여성회의 마음껏 하고 싶은 주제로 대중공사(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행사)를 기획해 보라”고 제안하였다. 지리산 여성회의는 논의 끝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실상사에 모이는 부처님 오신 날 봉축행사가 끝나고 ‘성차별 성폭력 피해경험 이어말하기’ 행사를 하기로 기획했다.
▶ 말하기 행사를 안내하는 부스 ⓒ지리산 여성회의
이어 실상사 살림위원회와 행사 명칭과 형식을 조율하였으며, 웹자보를 만들고, 피해경험 말하기 연단에 설 참가인원을 모집하고, 부스를 기획하고, ‘경청의 자세’ 안내문을 만드는 등 행사를 준비해나갔다.
5월 22일, 부처님 오신 날 말하기 대회
봉축행사가 끝나는 것은 12시, 말하기 행사는 오후 한 시로 예정되어 있었다. 명부전 뒷뜰 느티나무 아래 50여개의 흰 의자를 배치하고 마이크 테스트를 하는 것으로 준비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한 시가 되었는데도 자리에 앉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서너 분의 어르신이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 '성차별 성폭력 피해경험 이어말하기' 안내문 ⓒ지리산 여성회의
그러나 사회자가 ‘시작한다’는 멘트를 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속속 자리가 찼다. 준비한 50여장의 안내문이 순식간에 동이 났다.
지리산 여성회의 식구들이 하나 둘 연단에 올라 개인적인 성차별, 성폭력 피해경험을 비롯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말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스러웠는지, 얼마나 간절히 자유와 평등을 바라는지, 수단과 대상이 아니라 동등한 사람으로 존중받기를 원하는지,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모두가 귀 기울여 들었다. 누구도 중간에 행사를 저지하거나, 본인이 마이크를 잡으려 하거나, 불필요한 추임새를 넣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분위기는 진지했으며, 끝나는 시간인 세 시가 가까워올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듣기 위해 자리를 함께 했다.
단상, 연단, 마이크…‘말한다’는 것
이제부터는 개인적인 기록이다. 나는 두 번 마이크를 잡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지리산 여성회의 대표를 맡게 되었을 때 ‘피하지 않겠다’고 마음먹긴 했으나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하기’는 영 낯설고 하기 싫은 일이었다.
처음에는 매끈하게 정리된 연설문도 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두서없이 여성회의를 소개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인근 학교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에 개입한 경험을 이야기하다가 문득 경청자로 참여한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언제 오셨는지, 가장 뒤쪽 자리에 가장 작은 모습으로 앉아 계신 도법스님도 보였다. 멀리 명부전 돌계단에 주욱 앉아 온 몸으로 듣고 있는 친구들과 마을 사람들도 보였다.
▶ 성차별 성폭력 피해경험 말하기 대회 현장 모습 ⓒ지리산 여성회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사람들은 듣는 것으로 응답했다. 그 순간의 새롭고 단단한 느낌이 온 몸에 감각되었다. ‘이 감각은 뭐지?’ 싶었다.
얼마 전 문화예술공부의 일환으로 여자들 몇 명이 옷을 모두 벗고 밖에서 서로 사진을 찍어준 적이 있다. 그 때 알았다. 옷이란 것이 부수적이고 불필요하다는 걸. 생긴 그대로의 서로의 몸은 지극히 아름답다는 걸. 맨몸으로 맞는 바람은 생생하고 시원하며, 바람을 가르는 맨몸의 움직임은 거침없다는 걸. 남의 시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마이크를 잡고 말할 때의 느낌도 그랬다. 껍데기는 다 가고 알맹이로 서서 진짜를 말하는 느낌. ‘주체’로 만들어지는, 혹은 주체로 섰을 때 뿜어나는 기운들. 말한다는 것이 이리 힘이 클진대, 남자들에게는 이런 기회가 얼마나 손쉽게, 저절로 주어지는가에 생각이 미쳤다. 그들은 주체로 키워지는구나. 그러니 저렇게 (아무 이야기라도) 확신을 가지고 막 말하는구나.
연단에 서지 못한 남성은 그래서 아랫사람, 여자, 아내, 자식 앞에서 자연스럽게 윗자리를 차지하고 ‘말하기’에 중독되는구나. 여자들은 더 많이 말해야 하는구나. 그래야 기울어진 운동장을 조금이라도 평평한 쪽으로 옮길 수 있겠구나. 아무리 많은 여자들이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몇 천 년 동안 쌓아온 기울기가 평평해지기는 참 어렵겠구나. 더 많은 말하기가 필요하겠구나…
행동하지 않을 수 없는 앎, 여성주의
그 날 저녁, 급체를 했다. 스무 번도 넘게 토하고 몸의 모든 것이 빠져나가듯 설사가 났다. 몸이 변하고 있었던 것일까? 기진맥진 탈진해 누웠으나 머릿속은 오히려 명징했는데, 나는 이제 더 이상 누구의 어떤 대상이나 수단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연단에서 못 다한 말이 생각났다.
나는 일상에서의 성차별, 성폭력 경험들을 삭제하지 말고 공론의 의제로 다루자고 말했다. ‘지리산댐’, ‘전쟁반대’보다 성평등 의제가 더 중요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 잇지 못한 뒷말은 이것이다. ‘사적인 사건’으로 공론 영역에서 제외하고 누락했을 때는 지금처럼 매 사안을 매번 처음인 것처럼 당황하며 제자리걸음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 학교에서, 마을에서 발생한 성차별, 성평등 문제를 공론의 영역에서 제대로 다루었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한 경험이 공동체에 쌓이게 되며 그것이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이라는 것. 그러므로 여성주의의 모든 활동은 새로운 역사를 쓰는 일이라는 것.
마을에서 성차별 성폭력 피해경험을 말하는 일은 당사자들이 모두 참여할 것을 전제함으로써 더 깊은 울림이 있다. 특히 이번 행사는 실상사에서, 실상사와 함께 했으므로 그 자체로도 ‘우리는 성평등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는 마을’이라는 메시지를 모두가 품었으리라. 마을의 어른격인 실상사가 공간과 마음을 열어주어 고마운 마음이다.
말하기 행사 이후, 그동안 동네 술자리에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농담으로 흥을 돋우곤 했던 남성들이 ‘이제 그런 일을 하면 안 되겠다’면서 동시에 ‘하도 습관으로 굳어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다.
그날의 말하기를 통해 우리의 익숙한 가부장적 사고방식에 균열이 생기고 너와 내가 조금이라도 더 진실되게 만나고 있다면,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낯선 불편함을 느끼며 사유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의미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너무도 많이 부족하다.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 기를 쓰고 노력해도 이슬 한 방울만큼의 변화라도 만들어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제 멈출 수도, 돌아갈 수도 없다. 여성주의는 행동하지 않을 수 없는 앎이기 때문이다. (김경림)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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