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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중단 허용’ 아일랜드가 새로운 역사를 쓰다

수정헌법 8조 폐기 국민투표에서 승리하기까지



“수정헌법 8조에 의해서 그동안 임신중단을 하고자 했던 여성들은 ‘비행기나 배를 잡아타라’는 말을 들었지만, 오늘부터는 ‘우리의 손을 잡으라’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너 알아서 해라’는 말을 들었지만, 오늘부터는 ‘이제 우리가 함께 하겠다’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아일랜드의 사이먼 해리스 보건부 장관(Health Minister)은 임신중단을 금지하고 있는 헌법 조항을 폐기하는 국민투표가 66.4%의 찬성으로 통과된 후, “오늘은 아일랜드에 굉장히 중요한 날”이라고 말하면서 이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임신중단 시술을 받기 위해 아일랜드 여성들이 영국 등으로 떠나야 했던 과거는 이제 끝났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새로운 역사를 썼다고 평가 받는 아일랜드의 국민투표 결과가 유독 중요한 이유는 유럽의 대부분 국가들이 12주 이내 인공임신중단을 허용하고 있는 것에 반해, 아일랜드는 산모의 생명에 위험이 있을 때만 임신중단을 허용하는 매우 보수적인 규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 국민투표 결과를 보면 거의 모든 지역에서 임신중단 금지 폐지에 ‘찬성’에 한 걸 알 수 있다. ‘반대’가 높은 빨간 지역인 도니골 뿐인데 임신중단을 여전히 금지하는 북아일랜드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영향으로 보인다. (출처: refcom.ie)


아일랜드에선 1861년에 만들어진 법(Offences against the Person Act)에 의해 임신중단 금지가 명기된 이래 엄격하게 통제되어 왔다. 당시 법에 따르면 인공임신중단을 한 여성과 그에 조력한 사람은 노예가 되는 형벌이 주어졌다.


그리고 1983년 9월, 여성과 태어나지 않은 태아에게 동등한 권리가 있다고 보는 수정헌법 8조가 국민투표에서 66.9%의 찬성을 얻어 통과되었다. 이 법에 따르면 인공임신중단을 한 여성과 조력자는 최고 14년형을 선고 받는다.


그리고 35년이 지난 2018년, 마침내 국민투표로 수정헌법 8조가 폐지되기까지 그 과정은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마법 같은 순간이 아니었다. 임신중단과 관련된 중요한 논의를 이끈 몇 가지 사건과 여성들이 있었다.


□ 1992년의 X-Case


만 14세였던 X라는 소녀가 이웃집 남성에게 강간을 당한 후 임신을 했다. 그는 임신중단을 하기 위해 다른 나라로 가려고 했지만 그 여행은 국가에 의해 금지되었다. 출국할 수 없게 된 것이다. X는 자살충동 및 정신건강 피해를 호소했고, X와 같이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산모에게 임신중단을 허용하라는 소송이 제기됐다. 대법원은 출국을 허락하게 되지만, 결국 X는 유산을 했다.


X 사건과 소송은 아일랜드 내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끝내 법 조항은 수정되지 않았다. 다만 임신중단 금지 조항이 임신한 여성의 여행할 권리와, 타 국가의 임신중단 관련한 정보가 유통되는 것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수정만 승인되었을 뿐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대법원관이었던 휴 오플레어티가 은퇴 후 2013년 7월 <아이리시 타임즈>(The Irish Times)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임신한 여성의 여행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에 동의한 이유는 “산모가 자살할 위험을 고려했으며 만약 산모가 자살을 선택하면 산모와 아이를 둘 다 잃기 때문”이라고 밝혔다는 거다.(‘X Case judge says ruling is ‘moot’ in current abortion debate’ 기사 참고)


한편, X를 강간한 션 오브라이언은 4년형을 선고 받았지만 3년 동안만 감독에서 지냈다. 이후 1999년에 또 만 15세 소녀를 성추행한 혐의로 3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당시 인공임신중단으로 인해 받게 되는 벌이 최고 14년형이었다는 점이 다시 상기될 수밖에 없다.


이후에도 X사건과 관련된 논의는 계속되었다. 2002년,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산모에게 임신중단을 허용하자는 헌법 수정에 대한 국민투표는 찬성 49.6%, 반대 50.4%로 통과되지 못했다.


▶ 2016년 11월 25일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서 열린 “Women’s Rising” 집회 참가자들이 임신중단 합법화를 요구하고 있다. ⓒ촬영: 최혜원


□ 2012년 사비타 할라파나바르의 죽음


2012년 10월, 인도 출신으로 17주 임신 상태였던 31세 여성 사비타 할라파나바르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비타는 병원에서 ‘유산을 피할 수가 없는 상태’라는 판정을 받고 임신중단을 요청했다. 그러나 의료진은 사비타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판단하지 않았고, 태아의 심장박동 소리가 들린다는 이유로 시술을 거부했다. 하지만 사비타는 곧 패혈증에 빠졌고, 의료진이 사비타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순간엔 이미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의료진은 분만을 유도하고자 했으나 이미 완전히 유산된 상태였고, 패혈증이 더 심해져 결국 사비타는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법에 따르면 산모의 생명에 치명적인 위협이 있을 경우엔 임신중단 시술을 할 수 있게 되어있었지만, 그 범위가 모호했고 처벌을 두려워 한 의료진이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것이었다.


사비타의 가족들은 여성의 재생상권을 주장하는 ‘프로 초이스’(Pro-Choice) 단체에 관련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고, 11월 언론과 방송 등에서 이 사건을 조명하기 시작했다. 보도가 나간 다음 날인 11월 14일, 약 2천명의 사람들이 모여 사비타의 죽음을 추모하고 임신중단을 금지하는 법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후 시위와 집회의 규모는 점점 커졌고, 너무 엄격한 임신중단 금지법을 수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런 목소리가 모여 2013년 ‘임신 중 생명보호법’(Protection of Life During Pregnancy Act 2013)이 제정되었다. 이 법안은 그동안 모호하게 ‘산모의 생명이 위험이 처했을 때’라고 규정했던 부분을 조금 더 명확하게 정리했다.


▷ 육체적인 질병으로 위험한 상황: 산부인과 전문의 한 명과 질병 관련 분야의 전문의 한 명이 함께 논의해서 판단하며, 가정의학과의 조언도 구한 후 결정한다. 적절한 기관에서 선택적 수술을 통해 진행한다.

▷ 응급 상황의 육체적 질병으로 위험한 상황: 한 명의 전문의가 진단과 실행을 결정한다.

▷ 자살 가능성으로 위험한 상황: 산부인과 전문의 한 명과, 임신한 여성이나 출산한 여성을 상담/치료한 경험이 있는 정신과 전문의, 그리고 또 한 명의 정신과 전문의를 포함한 세 명이 함께 논의해 판단하며 가정의학과의 조언도 구한 후 결정한다. 적절한 기관에서 선택적 수술을 통해 진행한다.


▶ 임신중단 규제를 피해 국제 수역에서 인공임신중단 시술을 하는 ‘파도 위의 여성들’(Women on Waves) 프로젝트를 다룬 다큐멘터리 <파도 위의 여성들>(Vessel, 다이애나 휘튼, 미국, 2014) 한 장면.


□ 2014년 Ms.Y Case


Ms.Y라는 여성이 ‘모국에서 강간을 당했으며 그곳에서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망명을 요청하며 2014년 3월 아일랜드에 들어왔다. 그리고 4월 Ms.Y는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 임신중단을 하기 위해 영국으로 가겠다고 밝혔지만 망명신청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Ms.Y를 지원하던 단체는 이민국과 논의했지만 계속 반복되기만 하는 공방 속에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5월이 되자 Ms.Y는 임신 14주가 되었고 인공임신중단 시술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낮아졌다. 6월부터 Ms.Y는 우울증을 호소했으나 의사는 ‘아직 자살충동을 느끼는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7월부터 Ms.Y의 자살충동은 점점 강해졌고 ‘음식과 물을 거부하는 상태’가 되었다. 단식을 반복하던 Ms.Y는 8월 5일 40시간이 넘도록 식음을 전폐했고, 위험한 상태라고 판단한 의료진들이 임신 26주 상태에서 수술을 통해 출산을 유도했다. (Irish Times 기사 ‘Timeline of Ms Y case’ 참고)


Ms.Y는 2015년 9월 난민 자격을 획득했다. 이후 보건서비스 센터(Health Service Executive)와 법무부, 병원 등을 ‘업무태만, 의무 불이행 및 감정적 고통과 상처를 유발한 점’ 등의 사유로 고소했다.


이 사건은 ‘임신 중 생명보호법’이 제정된 후에 발생했다는 점에서, 정말 이 법이 실질적으로 여성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지 회의적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또한 경제적, 사회적 이유로 해외로 나가 임신중단 시술을 받기 어려운 여성들이 어떤 상황에 놓이는지에 대한 시사점을 다시 한 번 던져주었다.


#HomeToVote 역사를 새로 쓴 동력들


조금씩 임신중단 금지의 불합리성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법이 수정된 부분도 있었지만, 아일랜드의 많은 여성들은 원치 않은 임신으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호소하며 ‘임신중단 금지법 폐지’를 외쳤다. 약 17만 명의 여성들이 임신중단을 하기 위해 해외로 떠나야 하는 상황을 바꿔야 한다고 소리쳤다.


2016년에는 아만다 멜럿(Amanda Mellet)이 국가를 고소하고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진행해 승소했다. 임신 21주에 태아가 ‘에드워드 증후군’으로 심각한 상태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임신중단시술을 거부한 의료진 때문에 영국으로 가야만 했던 아만다는 자신이 겪은 육체적, 정신적 트라우마에 대해 국가가 책임지라고 요구했다. 이 소송은 최초로 국가가 ‘원정 임신중단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여성’에게 보상하라는 결과를 이끌어 냈다.


여성들의 재생산권을 요구하는 ‘선택을 위한 행진’(March for Choice) 집회에는 매년 참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수정헌법 8조 폐지를 외치는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관련 기사: ‘낙태죄 폐지하라!’ 아일랜드의 열기 http://ildaro.com/7709)


이번 국민투표 실행이 결정되고, 투표 전날까지 ‘투표를 위해 집으로 오라’는 #HomeToVote 해시태그 운동은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이끌었다. ‘Yes’라는 스티커를 붙이고 ‘Repeal’(법률 폐지)가 크게 쓰인 티셔츠를 입은 여성들이 공항으로 줄지어 입국하는 모습은 매우 의미 있는 장면이었다.


▶ 국민투표 결과가 발표된 이후, 사이먼 해리스 보건부 장관은 ‘나는 언제나 여러분 옆에 있겠다’고 밝혔다.(출처: 사이먼 해리스 트위터)


‘수정헌법 8조 폐지’ 찬성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어 온 현재 아일랜드 리오 버라드커 총리와 사이먼 해리스 보건부 장관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이들이 1979년생과 1986년생으로 40살과 33세의 굉장히 젊은 정치인이라는 사실도 주목해 볼만 하다.


2015년 국민투표로 결정된 ‘동성결혼 법제화’ 이후 2018년 ‘임신중단 금지법 폐지’까지, 유럽에서 가장 보수적이며 가톨릭의 국가로 불렸던 아일랜드가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아일랜드의 국민투표 결과의 영향으로, 더 보수적이라고 알려져 있는 북아일랜드에서도 ‘임신중단 금지 폐지’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제 아일랜드에서는 12주 이내의 인공임신중단이 허용되는 것과 더불어, 산모나 태아의 건강이 위험한 경우 등에 관한 세부적인 내용이 담긴 법안이 제출될 예정이다.


이런 세계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함께 변화를 이끌어낼지 아니면 뒤안길로 빠질지 국내에서도 많은 이들의 목소리와 행동 그리고 선택이 더욱 중요해졌다.  (박주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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