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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슈얼리티 지도를 만들며 발견한 것들

[Let's Talk about Sexuality] 여성의 욕망을 부정하는 사회 (선물)


※ <일다>는 여성들의 새로운 성담론을 구성하기 위하여, 20인의 여성이 몸과 성과 관계에 대한 다양한 가치관과 경험을 담은 “Let's Talk about Sexuality”를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여자아이들의 ‘압박자위’와 죄책감


남성의 성적 욕망은 사회에 만연해 있고 자연스럽다. 청소년기의 남성이 자위를 하고 야동을 보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로 취급된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는 남성 청소년이 주위의 타박을 받을 정도로 남성의 성적 욕망은 당연한 것을 넘어 ‘분출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남성의 자위 방법은 쉽게 찾아볼 수 있을 뿐더러, 아주 친절히 안내된다. 피부 표면이 벗겨질 수 있으니 젤을 꼭 발라라, 하고 나면 손을 꼭 씻어라, 나중에 삽입섹스를 할 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으니 너무 세게 성기를 잡지 말라는 등의 조언은 물론 훗날의 일까지 걱정해준다.


그에 반해 여성의 성적 욕망은 존재할 수 없다.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할 수 없다. 사회가 허용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 청소년을 위한 자위 방법을 안내하는 곳이 있나? 그런 안내를 받기는커녕 여성들은 무엇이 자위인지 모른 채 압박자위를 시작하게 되기 일쑤다. 그리고 이유 모를 죄책감을 느낀다.


남성의 성적 욕망은 어디서든 허용되지만 여성의 욕망은 어디에서도 허용되지 않는다. 심지어 남성과 섹스를 할 때조차도 ‘남성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여성은 오르가슴을 느끼는 척하기도 한다.


성적 욕망을 내비치는 여성도 물론 있다. 그러나 남성들 앞에서 자유롭게 섹스 이야기를 하고, 성적 취향이나 기호를 말하는 여성은 남성들에게 있어서 ‘나와 섹스를 할 수 있는 몸’으로 취급된다. ‘쉬운 여자’, ‘싸 보인다’, ‘걸레 같다’는 말을 들어야 하고, 자신과 섹스해주길 바라는 남성들의 추근덕거림을 견뎌야 한다. 그 추근덕거림을 거부하면 원망을 듣게 되기도 하고, 심하면 폭력까지 감수해야 한다.


‘왜 나랑은 안 자줘?(씨익씨익)’은 한국 남성의 정서로 자리 잡은 것 같다. 누군가와 잤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 여성은 다른 남성들에게 공공재가 되어버린다. 여성이 자신의 성적 욕망을 내비치고 성적으로 자유롭게 사는 것은 이렇게나 위험하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뭘까


나는 어릴 적부터 성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현재도 그렇다. 압박자위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5살 때다. 이불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 힘을 주면 기분이 좋았다. 이게 뭔지, 왜 기분 좋은지 알지 못했지만 누군가에게 들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후에 이게 자위라는 걸 어렴풋이 깨닫고 나서는, 불순하고 더러운 생각을 가진 나에 대한 죄책감에 짓눌릴 때가 많았다. 페미니즘을 만나고, 여성의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공부해도 그 죄책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깊이 자리 잡고 있던 나의 죄책감은 여성들과 모여 함께 말하기를 하면서 사라질 수 있었다.


지난 3월, 불꽃페미액션에서 주최한 ‘페미들의 성교육’에 기획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나를 위한 섹스>의 참여형 프로그램으로 ‘나의 섹슈얼리티 지도 만들기’를 했는데, 자신의 성적 취향과 섹슈얼리티를 알고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여성들이 평소에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해 말하거나 생각할 기회가 별로 없고, 그를 위한 사회적 환경이 충분치 않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는 서로의 성적 취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신이 어떤 분위기에서, 어떤 행위에 흥분하는지 등을 자유롭게 말했다.


개인적으로 참가자들이, 자신이 근본적으로 어떤 ‘분위기’에 끌리는지, 그래서 에이로맨틱인지, 에이섹슈얼인지 등의 성적 지향까지 생각해 볼 수 있기를 기대했다. 나의 경우 프로그램을 시연하면서 내가 에이로맨틱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 나의 섹슈얼리티 지도 만들기 ⓒ불꽃페미액션 제공


[‘나의 섹슈얼리티 지도 만들기’ 프로그램에서 각각의 공간들과 그 의미]


-성: 정말 마음에 들어. 들어와 줘.(가장 마음에 드는 행위들을 적는 공간)

-숲: 몰래 하고 싶어.(은밀하게 해보고 싶은 것들)

-항구: 한 번, 해볼까?

-내륙: 내 마음에 들었어.

-배: 아직? 그닥(지금은 하고 싶지 않지만 나중에 한 번쯤 해볼까 하는 일들)

-바다: 평생 안 할 듯(말 그대로 평생 하지 않을 행위들)

-타인의 섬: 차라리 케이크를 먹겠어.(무성애자들의 플로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상황들을 적는 공간)


나는 성교육 참여자들에게 무엇을 쓰면 되는지를 설명했고, 참가자들은 포스트잇에 자신의 욕망을 적었다. 그 욕망은 섹슈얼한 것이거나 로맨틱한 것일 수도 있고 또는 욕망하지 않는 무언가이기도 했다. 포스트잇을 다 모은 후 우린 돌아가면서 그 포스트잇을 읽었다. 누군가가 적은 그 욕망을 듣고 그게 자신에게는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한 후 지도를 채워나갔다.


욕망을 드러내야 이게 진짜로 내가 원하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흔히 TV 드라마에 나오는 상황인 ‘목도리를 매주며 뽀뽀하기’ 같은 것들은 [항구]에 썼지만 ‘루프탑이 있는 술집에서 노래 들으며 손잡기’는 [바다]에 들어갔다.


내 지도에서 섹스로 직결되지 않는 분위기의 것들은 대게는 [바다]로 들어갔지만, 미디어에서 로맨틱하다고 말하는 것들은 [항구]나 [숲]에 들어갔다. 사회에서 말하는 욕망을 내 욕망이라고 착각한 탓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어릴 적부터 로맨틱한 상황을 상상하거나 꿈꾸지 않았다. 그러나 동경했다. 벽쿵, 강제키스 등을 로맨틱하다고 생각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라면 당연히 사랑, 연애를 동경해야 한다고 세뇌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성적 판타지는 다 달랐다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나는 내 성적 욕망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욕망이 존재하고 그것이 적나라하며 ‘남자 못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나의 포스트잇에 하나의 욕망을, 1인당 총 3개를 써야 함에도 10개 이상 쓴 참여자도 있었다. 포스트잇을 읽을 때는 더 대단했다. 단 하나의 욕망도 겹치지 않았던 것이다. 가령 ‘손잡기’라고 해도, 옷을 다 벗고 침대에 누워 손잡기, 손바닥에 글씨 쓰며 장난치기, 손가락 깍지 끼고 영화보기 등 세세한 부분은 다 달랐다.


특히 내가 포스트잇에 적었던 [야옹]은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나의 상상 속에서는 캣 플레이(성관계에서 고양이 역할을 맡은 사람을 두는 역할극 플레이) 도중 할 수 있는 말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섹스의 전조로 혹은 애교를 부리면서 등 다양하게 해석하고 상상할 수 있다는 게 재미있고 신선했다. 그 외에도 우리의 성적 판타지는 수영장 야외 섹스, 환한 곳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자위하기, 좁은 차 안에서 하기 등으로 다양했다.


그동안 나는 나의 생각이 더럽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생각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릴 적 내가 애니메이션 주인공끼리 키스하는 생각을 하며 자위를 했던 건 이상하거나 변태 같거나 혹은 여자치고는 순수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성적 욕망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과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욕망들이 과하지 않을 뿐더러 다들 다양한 성적 욕망을 가지고 사는 것을 알게 되자 나의 죄책감이 사라졌다.


지도를 다 채우고 난 후, 나의 섹스 취향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에세머(SM플레이를 즐기는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해봤지만, 나에겐 가학적인 성향이 있었다. 나는 카테터(요도를 막는 얇고 긴 막대: 방광 등의 내용액 배출을 측정하기 위해 사용되는 고무 또는 금속제의 가는 관), 에널플래그(항문에 넣는 섹스토이) 등을 좋아하고 다양한 플레이를 꿈꾼다. 상대방이 눈물이 그렁그런한 눈으로 ‘잘못했어요’ 내지는 ‘용서해주세요’라고 말하는 걸 상상하면 즐겁고 재밌다.(물론 이런 ‘플레이’는 동의하에 진행되어야 한다.) 나의 판타지를 마음껏 표출하고서야, 비로소 난 나를 알 수 있었다.


▶ 3월, 불꽃페미액션에서 주최한 ‘페미들의 성교육’ 현장 ⓒ일다(박주연)


남성들의 강간 판타지만 무성한 사회


22살이면 법적 성인이고 마음만 먹는다면 섹스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나이다. 요즘은 청소년 때부터 야동을 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야동도, 상호 합의된 섹스도, 아직 여성에게 친절하지 않다. 이성애 중심에다가 남성 중심의 야동은 여성에게 폭력적인 장면이 대다수여서 보고 있으면 구역질이 난다.


내가 처음 본 야동은 여성을 강간하는 내용이었다. 그걸 보고 난 후 며칠 동안 속이 불편했다. 흥분이 되기는커녕 실제로 내가 강간당할지 모른다는 걱정부터 들었다. 강간을 당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극단적인 선택이지만 ‘자살해야 하는 걸까?‘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영상은 오빠가 다운받았다가 미처 지우지 못한 영상이었다. 난 오빠가 이런 걸 보면서 자위를 할 거라는 상상으로 속이 메슥거렸다. 후에 그런 미디어들을 많이 접하면서 그게 누군가에게는 ‘흥분’의 용도로 사용되는 소재라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익숙해졌다는 거지 좋아졌다는 건 아니다.


나는 여전히 자위하기 위해,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으면서 충분히 야하고,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스토리가 있고, 잘 생긴 배우가 나오는 영상을 찾기 위해 고생한다. 남성들의 판타지로 범벅되어 있는 것 말고, 여성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야한 콘텐츠를 찾아 헤맨다.


나를 둘러싼 세상은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섹스만 말한다. 내가 SM플레이를 좋아하는지 고민해 볼 기회도, 여성들에게 성적 판타지를 물어보는 곳도, 말할 곳도 없다. 자위하기 위해 나의 성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찾기도 어려운 실정이니, 22살이 되어서야 나의 섹스 취향을 찾은 것이 놀랍지도 않다. 지금이라도 깨달아서 다행인 걸까?


여성들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드러낼 공간은 아직 적다. 아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심지어 애인한테도 쉽게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지 못한다. 경험이 많아 보일까봐, 가벼워 보일까봐, 헤어지고 나서 어딘가에 말하고 다닐까봐.


그에 반해 남성들의 성적 욕망은 사물에도 투영된다. 여성의 스타킹, 교복, 양말 등. 그리고 그 욕망은 그것을 착용한 사람에게로 다시 돌아간다. 고등학생 때는 내가 신고 있던 스타킹을 5만원에 팔라고 요구한 성인 남성도 있었다. 이렇듯 여성들은 존재 자체로 남성들에 의해 성적 대상화된다. 반면 여성의 성적 욕망은 늘 가로막히고, 분출되는 순간 위협으로 돌아온다.


異國 (천정연 작)

나의 성적 욕망을 외치다


성적 욕망 뿐 아니라 사실 여성의 욕망은 어떤 것이든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회사에서 승진욕이 있는 여성을 ‘독하다’고 하고, 재물욕이 있는 여성을 ‘속물’이라고 비난한다. 사회는 여성이 욕망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여성을 억압함으로써 이 사회가 유지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진출의 욕망, 육아에서 벗어나고픈 욕망, 하다못해 더 멋진 남편을 고르기 위한(과거에는 생존에 필수적이었던) 욕망까지도 옹졸하고 사적이며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치부된다.


어렸을 때부터 들어온 옛날 이야기에서 남성들이 예쁜 신부를 갖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건 용기있다고 치부되지만, 여성들의 멋진 남편을 갖기 위한 싸움은 욕심 많은 못난 여성들의 다툼이다. 결국에는 동화 콩쥐팥쥐와 신데렐라처럼 그런 욕망 없는 ‘순수한’ 여성이 멋진 남편을 갖게 된다. 과거 사회에서 남성에게 아내란 장신구같은 존재이나, 여성에게 남편이란 살아남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여성이 더 나은 남성을 남편으로 삼기 위해 골라야 하는데, 남성들은 자신들이 ‘선택을 받아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이 여성을 고르는 선택지만 남겨놓았다.


여전히 사회는 여성의 욕망을 무서워하고,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남성들은 ‘자신들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여성이 성적 욕망을 이야기하는 것을 즐거워한다. 생각해 보라, TV 속 음악방송에 나오는 교복 입고 야한 춤을 추는 아이돌, 어른스러운 화장을 하는 키즈 모델, 몸에 딱 붙게 나오는 교복 등은 과연 누구의 성적 욕망일까?


여성들이 모여 함께 서로의 성적 욕망과 판타지를 이야기하면서 섹슈얼리티 지도를 만들었던 일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깊었다. 여성들이 자신의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또 타인의 욕망이 나에게는 어떻게 다가오는지, 어떤 의미인지를 말하면서 나의 섹슈얼리티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내가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건 불편해하고 불쾌해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여성들이 원한다면 언제 어디서든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그것이 소비되지 않고 자연스러워질 그 날까지 난 오늘도 세상의 중심에서 나의 욕망을 외친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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