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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안 먹거나, 아무렇게나 먹거나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밥 공부④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먹는 행위에 대한 무신경은 우리 자신과 자연에 대한 무지와 망각에서 비롯된다.”

-<마이클 폴란의 행복한 밥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밥 먹기

 

아침에 식구들은 제각각 밥을 먹었다. 아빠는 아침 드라마를 보며 서서 밥을 먹고, 초등 6학년인 딸은 부엌과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서서 밥을 먹었다. 그들이 밥을 각자 먹고 난 뒤 엄마는 대충 설거지거리를 정리하고 밥을 들고 방으로 들어와 역시 TV를 보며 먹었다. TV 속 드라마는 아주 끔찍한 거짓을 태연하게 연출하는 어떤 여자와 그 일을 당하는 사람들의 분노로 격렬했다. 그런 화면을 보면서 밥을 먹다가, 먼저 나가는 딸의 인사를 받으며 ‘잘 갔다 오라’고 반은 현관을 향해, 반은 TV를 향해 서서 말했다.

 

나도 덩달아 TV를 보다가 집을 나가는 조카에게 건성 마음으로 대충 인사를 했다. 나는 TV 속 상황에 빨려 들어가 현실에 있으면서도 현실감각을 잃어버린 이상한 상태에 놓여 있다. 현실과 드라마가 얽히고, 먹는 것과 보고 듣는 것이 얽히고, 앉는 것과 서는 것이 잘 분간이 안 간다. 몸도 마음도 뒤숭숭한 채로 공중에 붕 떠 밥을 먹는 건지, 드라마를 보는 건지 모르는 채로 밥을 먹었다. 그리고 허겁지겁 출근하는 동생 부부를 따라 나도 허겁지겁 그 집을 나왔다. -2016년 3월]

 

도시에서 바쁘게 생활하는 젊은 사촌동생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을 먹은 일이다. 내가 직장생활을 할 때가 떠올랐다. 아침 시간은 1분을 다투는 바쁘기 짝이 없는 시간이다.

 

“도대체 밥을 먹는 건지 흡입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동생의 말대로, 먹는다는 행위에 아무런 의미도 주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그 집 식구들은 아침 드라마를 즐겨서 TV까지 봐야 하니 더더욱 먹는 행위가 아무 것도 아닌 무화(無化)된 행위였다.

 

▶ 정성스러운 밥상. ‘어떻게 먹어야 하는가?’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되었다.  ⓒ김혜련

 

‘어떻게’ 먹어야 하는가?

 

내가 밥 먹는 행위에 대해 의식하게 된 것은 삼십대 초반의 일이다. 위가 아파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그렇게 밥을 안 씹고 계속 먹으면 위가 다 헐고, 위하수가 되어 고생을 심하게 한다고 했다.

 

밥 먹을 때의 나를 관찰하니 밥을 씹지도 않고 넘기거나 물이나 국 같은 것에 말아서 훌훌 들이 마시는 식이었다. 아침밥은 걸렀고, 배가 고픈지 어쩐지도 잘 몰랐다. 이유 없이 짜증이 나거나 화가 올라오면 배가 고픈 거였다. 그러다 식당 같은 곳에서 맛있는 게 나오면 게걸스럽게 먹어대며 과식을 했다.

 

배가 고프니 밥을 먹지만, 먹는 행위에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았다. ‘그까짓 밥’은 후딱 먹어치우고 다른 일을 해야 했다. 밥은 생존을 위해, 의미 있는 다른 삶을 위해 할 수 없이 먹어야 하는 무엇이었다. 귀찮아하면서 억지로, 대충, 자동차에 주유하듯, 휴지통에 쓰레기 집어넣듯 그렇게 먹었다.

 

먹는 습관은 어떤 습관보다도 질겨서 잘 바뀌지 않는다. 지리산 수행 시절, 호두마을에 위파사나 수행을 하러 갔을 때다. 위파사나는 ‘알아차림의 명상’이다. 지금 이 순간의 자신을 잘 보는 것이다. 밥 먹을 때도 바라본다. 밥이 입에 들어가는 것, 씹는 것, 목으로 넘어가는 것, 숟가락을 다시 들고 젓가락을 내려놓는 것… 그 모든 동작을 알아차린다. 그러면 자각적으로, 천천히 밥을 먹게 된다.

 

그러나 아무리 바라봐도 목구멍 저 안쪽에 무슨 허기진 짐승이 살고 있어 음식이 들어오자마자 게걸스럽게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구강기의 결핍을 채우듯 한 입 가득 떠 넣은 음식은 들어가자마자 목구멍으로 꿀꺼덕 넘어갔다.

 

M이 차려주는 정성스런 밥상 앞에서도 나의 밥 먹는 태도는 감출 수 없이 드러났다. 겉으로는 천천히 밥을 잘 먹고 있는 것 같아도 안에서 허겁지겁하는 태도가 그의 정갈하고 아름다운 밥상에 고스란히 비춰졌다.

 

게다가 아무렇게나 먹는 태도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하는 위 때문에 나는 계속 고통 받았다. 위가 고통을 호소하면 그제야 어쩔 수 없이 밥 먹는 태도를 바꿨다. 아주 천천히 조금씩 오래 음식을 씹어야 하고, 오롯이 먹는 것에 집중해야 했다. ‘어떻게 먹어야 하는가?’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질문이 되었다.

 

대충 먹기…현대인의 ‘페스트 라이프’

 

‘어떻게 먹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아주 다른 차원의 밥을 보여준다. 아무렇게나 먹는 밥, 서서 대충 먹는 밥, TV나 핸드폰 보면서 먹는 밥, 꾸역꾸역 먹는 밥… 이 때 밥은 아마도 자동차에 연료를 넣는 의미 이상은 못될 것이다. 그럴 때 나의 삶은 자동차나 기계가 된다. 대충 먹는 밥은 대충 사는 삶이다. 꾸역꾸역 먹는 밥은 꾸역꾸역 사는 삶이다.

 

<잡식 동물의 딜레마>를 쓴 마이클 폴란 같은 사람은 엉뚱하게도 ‘음식을 먹어라’, ‘식사를 하라’고 권한다. 누구나 음식을 먹고 누구나 식사를 하는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는 거다. 현대 미국인들은 음식이 아닌 ‘상품’을 먹고, 식사가 아닌 식사를 한다. TV를 보거나 운전이나 다른 일을 하면서 ‘우물거리고 있다.’

 

우리 또한 그리 다르지 않다. ‘성공지향적인 사회, 더 많은 시간 일하는 사회는 페스트 푸드를 먹으며 페스트 라이프(Fast Life)라는 어리석음에 사로잡혀 있는 사회’(마이클 폴란의 행복한 밥상)다. 빨리빨리 먹고 빨리빨리 살아야 한다.

 

몇 달 전 <시사 IN>에서 “굶고 때우고 견디는 청년 ‘흙밥’ 보고서”(2017년 2월 25일~3월 4일)를 연속으로 다루었다. 청년들은 수중에 돈이 떨어졌을 때 제일 먼저 먹는 것을 포기했다. 통신비나 사회생활비는 줄이기 싫고 먹는 것을 줄였다. 만화가 김보통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도 백수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줄인 게 식비였다. 어느 날 그는 팬티 바람으로 부엌에 서서 식빵에서 곰팡이를 뜯어내며 ‘착실하게 스스로의 존엄을 바닥에 내려놓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김보통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제12화 ‘식빵맨의 하루’)

 

▶ <시사 IN> “굶고 때우고 견디는 청년 ‘흙밥’ 보고서”와 <마이클 폴란의 행복한 밥상> (촬영: 김혜련)

 

“아이고, 노인네가 영양실조라 병원 가서 링겔 맞고 왔어요. 밥을 안 해먹어요, 밥을! 꽃도 가꾸고, 밭일도 하면서 밥은 왜 안 해먹지 몰라.”

 

“어쩌다 엄마 집에 가 보면 컵라면 봉지가 수두룩이야. 밥 해먹일 자식들 없으니 밥을 대충 드시는 거야. 그러지 마시라 해도 안 돼. 평생 배인 습관이라… 저러다 병이라도 나면 어쩌나 걱정이 돼.”

 

친구들이 자신의 어머니를 보면서 하는 한탄이다. 평생 밥을 했지만 자신을 위한 밥을 정성스레 한 경험이 없는 여성들은 나이 들어 홀로 되면 ‘제대로 안 먹거나’ ‘아무렇게나 먹거나’ 한다.

 

성공하기 위해서, 바빠서, 할 일이 많아서, 가난해서, 젊어서, 늙어서, 홀로라서… 대충 먹고 산다, ‘스스로의 존엄을 내려놓으면서.’ 한 사회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은 ‘재앙’에 가깝다.

 

밥이 아름다운 세상

 

압력밥솥 뚜껑을 열고 김이 막 오르는 밥을 나무주걱으로 살살 젓는다. 먹빛이 도는 자그마한 자기 그릇에 소복이 담는다. 현미잡곡밥에 들깨 미역국, 두부구이, 김치. 식탁에 단정히 앉아 손을 모아 감사드린다.

 

한 입씩 먹는다. 현미밥은 오래 씹을수록 단 맛이 난다. 밥이 다 넘어가면 국을 뜬다. 미역의 미끌한 느낌과 들깨의 고소한 향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현미유에 구운 따끈한 두부의 말랑하면서도 졸깃한 맛, 약간 신 김치의 톡 쏘는 알싸한 맛을 느끼면서 천천히 먹는다.

 

저무는 햇살이 갓 튀겨낸 튀김처럼 투명하게 바삭거린다. 반찬으로 가을 저녁 햇살 한 줌 뿌린다. 딱새 한 마리 먹이를 물고 소나무 가지에 앉았다. 함께 식사를 한다. -2016년 11월]

 

▶ 딱새와 나, 함께 식사를 한다.   (그림: 김혜련)

 

직업이나 바쁜 사회적 활동이 없는 나의 식사다. 늘 이런 식으로 밥을 먹는 건 아니다. 드물게 자각적으로 깨어서 음식을 먹을 때 이렇게 한다. 이 때 밥 먹는 행위는 맑고 아름답다.

 

먹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자각적으로 깨어서 먹으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내가 먹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음식을 먹고 있는지 음식 흉내를 낸 음식 아닌 것을 먹고 있는지, 건강한 재료인지 아닌지 알게 된다. 몸의 감각에 민감해져 각각의 재료들이 지닌 맛을 충분히 음미하는 즐거움을 누린다. 쓸데없이 많이 먹지 않게 되고, 배가 부르다는 몸의 신호를 알아듣게 된다.

 

‘밥을 먹는다’는 지극히 당연하고도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나와 이 세계의 신성(神聖)을 깨닫게 한다. ‘먹는 나도 하늘님이고, 먹고 있는 존재도 하늘님이라는’ 위대한 사유가 내 이빨 사이에서 톡톡 터지는 생생한 순간을 맞는다.

 

한 끼 밥을 대하는 태도가 나를 대하는 태도, 내 삶을 대하는 태도이다. 밥을 정성스럽게 먹는 행위는 나를 정성스럽게 대하는 것이고, 내 삶을 정성스럽게 창조하는 일이다. 생명은 아름답게 살아주어야만 죄 짓지 않는 것이다. 밥이 아름다워 생명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세상을 꿈꾼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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