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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의 언어를 찾아서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밥 공부①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와아, 너 인간승리다. 이십대 때 그리도 먹는 걸 경멸하더니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일다>에서 ‘새로 쓰는 혼밥의 서사’를 읽은 대학시절 친구의 반응이다. “에이구~ 내 이럴 줄 알았지.” 어느 날의 밥상은 ‘어느 날’일 뿐이지 ‘맨날’이 아니다. 대부분의 날들은 밥하러 부엌까지 가는 일이 멀고도 힘든 일이다. 난 여전히 밥 하는 일이 즐겁지 않다. 그런 나를 자책하기보다는 당연하다고 스스로를 토닥인다.

 

평생 지겨웠고 의미를 부여할 수 없었는데, 몇 년 노력한다고 바뀌나? 어림없다. ‘하찮고, 돈도 안 되고, 빛도 안 나고, 내가 바뀌든 아니든 특별히 달라지는 것도 없어 보이고…’ 그렇게 수십 년 몸과 마음에 밴 태도다. 밥에 대한 개인적 저항과 사회 역사적 하찮음의 무게와 육체를 경시하는 관념의 무게까지 다 얹혀있는 복잡한 영역인 것이다.

 

더구나 밥을 한다는 건 천리만리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몸으로 체득해야 하는 영역이다. 그러니 몇 년 노력한다고 개과천선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저 꾸준히 ‘애쓰고’ 있을 뿐이다.

 

▶  마당에 차린 밥상.   ⓒ김혜련

 

화려하고 과시적인 밥 이야기들

 

처음엔 밥에 대한 부정적 관념의 무게부터 내려놓는 훈련을 해야 했다. 밥을 부정해 왔던 나, 밥이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내게 밥이 ‘별 거’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했다.

 

밥을 그저 한 끼 때우는 행위나, ‘한 입에 톡 털어 넣고 마는’ 행위로 여기면 밥을 하는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렵다. 그저 대충 때워도 되고 한 입에 털어 넣고 말 것을 정성들여 하는 일은 허무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좋은 음식을 먹어야 건강하다는 현실 논리 같은 것으로 오랜 밥하기의 저항을 밀어내기는 역부족이다.

 

밥이 왜 그리 소중한지 스스로 절감할 수 있는 언어가 내겐 필요했다. 밥에 대한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역사적인 ‘하찮음’의 무게를 극복할 수 있는 언어, 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깨어서 자각하고, 그 의미를 사유할 수 있는 언어 말이다.

 

도서관에서 밥이 뭔지 알려고 찾은 책들에서는 배운 게 별로 없었다. 대부분의 밥 관련 글들은 ‘밥의 소비자들’이 쓴 글이었다. ‘밥하는’ 일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 하는 밥 이야기는 화려했다. 허나 거기엔 어떤 절실함도 없어 보였다. 또는 밥을 관념적으로 엄청 우대하는 글들도 있었지만 실제로 그게 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못하는 글들이었다.

 

최근 몇 년간 열풍처럼 불었던 먹방이나 쿡방의 밥, 또는 여러 블로그의 밥들은 밥이 우리 생활에 중요한 무엇으로 등장하게 해준 긍정적 측면이 있어 보였다. 밥하는 일이 이제 사회적 의제가 된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 밥은 주로 ‘보여주기 위한’ 밥이기도 했다. 밥을 해먹는다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 역설적으로 너무도 특별한 일이 되어버린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죽기 전에 먹(이)는 밥

 

그러다가 만난 밥이 있었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나치 수용소로 끌려가는 엄마들의 밥. 내일 죽으러 가는 열차를 타게 되는데, 밤새 아이를 위해 깨끗한 물을 찾고 정성들인 음식을 만드는 엄마, ‘죽으러 가는 엄마가 죽으러 가는 아이에게 해 먹이는 밥.’ 그 밥을 만난 순간의 충격을 뭐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당연한 일일 텐데 난 왜 그리 충격을 받았을까? 몇날 며칠을 그 파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때때로 눈물을 쏟았을까? 거기엔 정성이라고는 찾을 길 없이 막 살아온 내 일상이 있었을 게다. ‘곧 죽을 텐데 깨끗한 물이며 정성들인 밥이며가 뭐 그리 중요할까?’ 라고 즉각 되묻게 되는 삶의 천박함.

 

▶ 아우슈비츠 생존작가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그렇다고 그것만으로는 경외(敬畏)에 가까운 충격을 설명하긴 어려웠다. 거기엔 어떤 ‘절대적인 것’이 있었다. 하찮게 여긴 세계가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 진실의 얼굴로 나타났을 때 받게 되는 낯선 충격, 놀라움…. 난 밥이 지닌 절대성에 맞닥뜨린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사람은, 생명가진 것들은 먹이를 찾는다. 죽기 전에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도 남아있는 욕망이 있다면 먹는 것이다.

 

법정 스님이 죽기 전 드시고 싶어 했던 떡국 한 그릇이 떠올랐다. 그리고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옆 침상에 있던 아주머니 생각이 났다. 그이는 위암 말기여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보리밥을 그토록 먹고 싶어 했다. 어린 딸이 주는 보리밥을 한 입 가득 떠 넣고 입에서 오래 씹다가 뱉어내는 그를 보면서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그렇게까지 음식에 집착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했을 거다. 그저 비참하게 느꼈던 것 같다.

 

먹는 일의 절대성이 지닌 삶의 어떤 신성함 같은 것을 이해할 아무런 경험이나 사유도 내겐 없었다. 그 행위가 생명이 지닌 근원적 천진함, ‘살려고 하는 신성한 의지’라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먹는 것에 구차하게 매달리는 비참한 육체를 혐오하는 서구적 문학에 오래 경도된 탓이었을까?

 

할머니는 아참 하시더니 호주머니에서 뭘 꺼냈다. 크래커, 쿠키, 갑자칩 같은 사원들이 먹다 버린 과자들을 비닐봉지에 따로 싸 놓은 거였다. 할머니는 창문을 열고 여차 하며 과자를 한 움큼 던졌다. 비둘기들이 날아와 과자 부스러기를 쪼았다. 할머니가 다른 쪽으로 던지자 이번에 못 얻어먹은 놈들이 푸드득 날아들었다. “맨 날 모아두시는 거예요?” “응, 얘들이 이 시간에 매일 이걸 얻어먹으러 와, 이 시간이 되면 밥 먹는 줄 알고 으레 와.” 검게 번들거리는 비둘기 깃털들을 보며 나는 괜히 걱정이 됐다. “사람들 다 비둘기 싫어하지 않아요? 먹이 준다고 막 뭐라 그럴 수도 있는데.” 할머니는 한 번 더 과자를 뿌리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다 살겠다고 그러는데, 얼마나 이뻐. 살겠다고 하는 것들은 다 이뻐…” -김현진의 <육체탐구생활>

 

김현진의 글에 나오는 청소부 할머니의 말이다. 먹는다는 행위의 근원적 천진성을 자기 삶에서 체득한 자의 언어다.

 

▶  여름날의 밥상.   ⓒ김혜련

 

생명에게 올리는 예배

 

사실 밥은 철학적 ‘사유의 영역’이 아니라 ‘당연의 영역’으로 여겨져 왔다. 밥에 대한 사유가 부재(不在)한 오랜 역사 속에서 밥의 언어를 찾는 게 수월한 일은 아니다.

 

내가 찾은 밥의 가장 위대한 언어는 동학(東學)의 언어였다.

이천식천(以天食天), 향아설위(向我設位).

 

이 언어를 얻고 나서 나는 밥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밥을 소중히 하는 것이 왜 그리 중요한 일인지 스스로 납득하게 되었다.

 

이천식천, 하늘님인 내게 하늘님을 주는 게 먹는 것이다. 하늘님인 나는 타(他) 존재를 먹어야 한다. 그런데 타 존재가 이미 하늘님이다. 향아설위, 나를 위해 위패를 모신다. 자신을 향해 올리는 예배다. 예배는 나 밖의 대상, 신이나 신성한 나무, 바위 등을 향해 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예배를 이야기한다. 이때의 나는 주관적, 심리적인 내가 아니다. 우주생명인 나다. 우주생명이 나한테 들어와 있는 거다. 그 생명에게 올리는 예배다 .내가 단순히 오십 여년을 산 존재가 아니라, 수억 년의 오십년이라는 역사성을 지닌 ‘온생명’(장회익)이라는 것을 아는 이야기다.

 

‘신(神)이 신(神)을 먹는다’라는 사유의 스케일을 생각해 보라. 먹는 존재도 예배의 대상이고, 먹는 나도 예배의 대상이다. 이때 일상은 얼마나 거대하고 위대한 스케일인가. 내가 경멸하고 하찮게 여겨왔던 ‘밥’이 거의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장엄함으로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 M이 차린 정성스러운 밥상.   ⓒ김혜련

 

밥의 의미를 체화해가다

 

동학의 이 언어를 처음 듣는 건 아니다. 생명운동이나 한살림 운동 등을 시작한 사람들의 바탕이 된 사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언어를 듣기는 들었으되 내 삶으로 스며들지는 못했다. 그러기에는 그 사유와 내 삶의 거리가 너무도 멀었다.

 

이 언어가 내 삶으로 들어온 것은 삶을 전환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구체적으로 이 사유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인 M을 만나서다. 그 말의 의미를 M을 통해 해석하고 이해하는 과정, 그가 정성스럽게 해 주는 밥을 먹으며, 그 밥의 의미를 새겨가는 과정이 있었다.

 

그저 막연히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텍스트를 이해하는 차원이었다면, 감탄만 하고 내 몸을 움직이는 실천의 동력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는 주체가 그 이야기를 자신의 삶으로 살고 있었기에, 그 모습이 내 눈에 참으로 숭고하고 아름다웠기에 나는 밥에 대한 그토록 오랜 저항을 뚫고 나가는 힘을 얻었을 것이다.

 

그의 밥을 먹으며 그가 하는 행위를 통해 들어온 언어는 나를 바꾸고자 하는 전환의 동력이 되었다. 나는 밥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하고 밥을 하는 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비록 그 속도는 매우 더디지만 말이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전체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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