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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계획에 없던 ‘돌발상황’ 엄마의 하인두암
비혼여성의 가족간병 경험을 듣다⑧ 배윤정
※ 고령화와 비혼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많은 비혼여성들이 부모나 조부모, 형제를 간병하고 있지만 그 경험은 사회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개인의 영역에 머물고 있습니다. <일다>는 가족을 간병했거나 간병 중에 있는 비혼여성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발굴하여 공유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연재됩니다. -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보람찬 인생을 계획하고, 실천하세요!’
계획하고 그에 따라 실천해가는 삶은 마땅하다.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고 중장기 단계를 설정한다. 그 계획을 거꾸로 밟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 나가는 삶. 고난도 있겠지만 묵묵히 견뎌낸다면 성취감과 함께 발전한 나를 만날 것이다! 열심히 살자, 그것이 참으로 보람찬 인생!
어른들이나 미디어, 책을 통해 접해온 인생에 대한 상(image)은 대략 저러했다. 열심히 살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그림말이다. 그런데 삼십 년 넘게 살다 보니, 거기에는 빠진 게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돌발 상황’이다. 살아갈수록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내 앞에 툭툭 떨어졌다. 아니, 인생에 이미 그런 상황들이 무수히 놓여있는데, 그것들을 향해 차곡차곡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인생에서 힘든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감당하느냐가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계획에 넣지 않는다. 아니, 넣지 못한다.
어떻게 ‘우리 엄마가 암에 걸리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투병 생활을 할 것이다’를 인생 계획에 넣을 수 있을까? 그건 드라마 혹은 절절한 다큐에서나 나올 일이다. 나는, 우리 가족은 평범하니까.
모든 이들의 인생에 여러 변곡점이 있지만, 나 역시 인생에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타고난 몸치에, 유연성 제로인 요가강사. 친구들은 아직도 내가 요가 수업을 하고 만족하며 사는 걸 신기해한다. 그래서 ‘언젠가는 원래 자리로 돌아오겠지’ 생각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하지만 천만의 말씀!)
회사를 다니면서 번아웃(burn out) 됐다. 건강을 위해 시작했던 요가로 몸과 마음이 회복되는 경험을 하고, 우연한 계기로 강사 교육을 받게 됐다. 그리고 서른, 초보 요가강사로 새 인생을 시작했다. 이제 막 초보강사로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며 수업과 수련을 하고 있었다. 엄마가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게 그 즈음이었다. 2013년 5월 말, 모든 게 따듯하고 투명했던 계절.
▶ 몇 번째 입원했을 때일까. 병원 복도를 걷는 엄마의 뒷모습. ⓒ배윤정
“내가 엄마를 30년간 써버린 느낌이야”
하인두? 하인두는 어디일까? 엄마는 거기에 암이 생겼다고 했다. 하인두는 목 안에 공기와 소리, 음식이 드나드는 길목이며 두경부에 포함된다. (두경부는 눈과 귀를 제외한 얼굴과 목 부위를 지칭한다. 비강, 혀, 입, 후두, 인두, 침샘 등 30곳이 해당되며, 이 기관에 생긴 암을 통틀어 두경부암이라고 부른다.) 의사 선생님이 수술 방법을 설명했다. 임파선을 포함해 암 전체를 제거하고, 허벅지 근육과 손목의 신경 조직을 들어내어 다시 목 안에 이식하는 방법이었다.
의사 선생님이 담담하게 설명해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들으면서도 그게 어떤 건지 상상할 수 없었다. 실은 그때 ‘엄마가 암이라고?’ 하는 사실조차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는 상태여서 의사 선생님의 설명이 더욱 와 닿지 않았다.
이미 3기까지 진행된 암이었기 때문에, 수술 방법에 있어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 생긴다는 대목에서 엄마의 표정이 달라졌다. 목소리를 포기하거나(후두 제거), 입으로 먹는 걸 포기하거나(식도 제거, 평생 배에 호스를 끼고 위장으로 음식을 넣는다), 둘 중 하나라고 했다. 둘 다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지만, 암이 자리한 위치상 성공률이 10% 내외였다. 세 번째 방법이 실패하면 어차피 앞의 두 방법 중 하나를 다시 선택해야 하고, 성공한다고 해도 목소리와 섭식 둘 다 예전처럼 원활하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래서 앞의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일반적이라는 게 선생님의 결론이었다.
엄마는 10% 성공률이라는 세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그리고 말했다. “제가 아직 해야 할 게 있어서요.” 나와 동생, 그리고 아빠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언젠가 친구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엄마를 30년 동안 써버린 느낌이야.”
첫 수술, 아침 9시에 수술실에 들어간 엄마가 밤 12시가 넘도록 나오지 못했다. 새벽이 되어서야 중환자실에서 만난 엄마는 너무 차가웠다. 목과 머리 주변으로 피통이 여러 개 나와 있었다. (두경부 수술은 귀 뒤쪽을 열어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수술 시 머리와 목의 피를 내보내는 피통을 밖으로 연결하고, 수술 부위의 회복을 가늠한다.) 목 앞쪽으로는 철심이 둘러 박혀 있었다.
추운 걸 제일 못 견뎌 하는데, 엄마가 찬 곳에서 너무 오래 있었다. 간호사 선생님이 수술 후라 염증이 생길 수 있어서 최대한 차게 있어야 한다고 했다.
암이라는 것, 수술이라는 것, 병원 생활이라는 것. 아무것도 모르는 채 간병 생활이 시작됐다. 우리는 모두 앞으로 언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른 채 살아간다. 그리고 실제로 그 상황에 놓여야 앞의 말을 몸으로 깨닫는다. 목도한 그것을 살아내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그 때 나와 엄마, 우리 가족이 그랬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르는 채 하루하루를 겪어낼 수밖에 없었다.
▶ 비오는 날. 함께 병원 창 밖을 바라보는 동생과 엄마. ⓒ배윤정
첫 수술 후 3년간 수술, 또 수술…
수술 후 며칠 동안 온가족이 병원에 붙어있었다. 안되겠다 싶어 간병인을 신청했다. 집도, 일도, 우리도 정리가 필요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면, 반나절 만에 간병인을 되돌려 보냈다.
엄마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침도 삼키면 안됐다. 목을 움직일 수 없었고, 이식 수술로 다리와 팔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암은 완전히 제거됐지만 그 위에 이식한 다른 조직들이 잘 붙기까지 그대로 버텨내야 했다. 침이 조금이라도 수술 부위로 흐르면 살이 썩는다고 했다.(실제로 그 후 몇 차례 더 큰 수술을 한 원인이 됐다.) 늘 입안에 석션(침을 빨아들이는 고무관)을 물고 있어야 하고, 누군가 옆에서 계속 가래침을 뽑아줘야 했다. 마약성 마취제가 있어야 잠들 수 있었고, 깨어 있는 시간은 오로지 통증이었다. 마취제로 정신이 혼미하거나, 통증으로 계속 몸부림을 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런 엄마를 간병인에게 맡기고 나오는데,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불안감 다음에는 죄책감이 따랐다. 집으로 와서 간병인에게 전화를 하니 받지 않았다. 불안은 더 커졌다. 결국 늦은 밤 담당의사 선생님에게 연락을 해서 병실을 살펴 달라 말씀 드렸다. (사실 의사의 개인 연락처를 환자의 가족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엄마의 상태가 너무 심각했기 때문에 배려해주신 걸로 안다.) 그러자 간호사 선생님에게 연락해 병실 상황을 일러주셨다.
동생과 나는 병원에서 나온 지 몇 시간 만에 다시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간병인은 전화기도 무음으로 해둔 채, 식사를 한 후 잠들어 있었다. 엄마는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우리를 보자마자 울었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말도 못하고 움직일 수도 없는 엄마이기에 특별히 부탁했었다. 힘든 환자라 고생스러울 게 너무 미안했다. 비용은 얼마든지 추가로 드릴 수 있으니, 밤 동안만 옆에서 지켜달라고 사정했었는데…. 그만 가시라고 했다. 전에는 어른에게 그렇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아마 이게 첫 기억일 것이다. 의사 가운을 입고 있든, 나이가 많든, 그게 누구든 환자를 배려하지 않는 말과 행동에 아주 단호해졌다. 한 순간 ‘슈퍼우먼’에서 ‘아기’가 된 엄마를 지켜야 했다.
엄마는 첫 수술 후 3년 동안 열 번이 넘는 수술을 견뎌냈다. 당장 입으로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위장과 소장을 뚫어 호스를 연결해 영양제를 넣었다. 식도 주변이 점점 수축해서 흉골(가슴 앞쪽 뼈)을 잘라낸 뒤 수축한 식도를 제거하고 위를 끌어올리는 수술도 더해졌다. 의사들이 엄마 몸을 놓고 실험하는가 싶었다. 병원을 가면 늘 온 신경이 곤두서고, 화가 올랐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을까 늘 방어태세였다. 대형 종합병원에 들어서면 느껴지는 ‘피로에너지’(뭔가 바닥으로 끌어당겨지는 느낌)는 3년이 다 되어도 적응이 안됐다. 입원과 퇴원이 수도 없이 반복됐다. 회복된다 생각하면 다시 나빠지고,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하는 수술은 계속 이어졌다.
▶ 우리의 운동 시작 포인트! ⓒ배윤정
불안과 패닉, 피로가 겹쳐진 가족의 시간
아빠는 회사를 정리했다. 병원 바로 옆으로 급하게 집을 구했고 우리는 이사를 했다. 동생도 당시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던 때라 셋이 3교대로 병원을 다녔다. 누군가 일을 하고 있으면 누군가는 집안일을 하고, 누군가는 엄마 옆에 붙어 있었다. 그 때 나는 초보강사라 수업이 있으면 어디든 가야 했는데, 이사 전 광명 집에서 신촌 병원으로, 강남으로, 안산으로, 나중에는 일산으로 다녔다. 요가원은 나에게 일을 하는 곳인데, 오히려 요가원을 가야 쉬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엄마는 물을 마실 수 없는 상태였고, 혼자 걸어서 화장실을 가기 까지 3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요가원은 몸과 마음을 더 건강하게 하려는 분들이 스스로 찾아오는 곳이다. 병원은 아픈 분들이 있는 곳이다. 두 극과 극의 공간을 넘나들며 참 여러 감정이 스쳤던 것 같다. 엄마는 통증을 견디면서 힘들어하는 시간에, 나는 회원들 앞에서 어떻게 하면 건강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수업했다. 피로에너지는 최대한 벗겨내고 생생한 마음으로 회원들을 대해야 했다. 병원에서는 보호자, 직장에서는 요가 선생님. 둘 다 당시의 나에게는 참으로 버거운 옷이었다. 엄마는 아픈데, 내가 요가원에 와서 ‘건강’에 대해 떠들고 있는 게 맞나? 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한 번은 담당의사 선생님이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수술이 진행된 적이 있었다. 엄마는 이비인후과 소속이었는데, 그때 수술은 부위가 달라 외과에서 맡았었다. 나에게 ‘엄마’지만, 처음 보는 그 외과의사에게는 차트 상 ‘흉골(가슴뼈)을 자르고 식도를 이어 붙여야 할 암환자’일 뿐이었다. 맞다, 대형 종합병원에서는 의사가 담당이 아닌 환자 개인을 섬세하게 배려할 여유가 없다.
그 날은 아빠가 병원에 있어야 했고, 나는 상황이 다 끝난 뒤에야 병원에 도착했다. 수술 후 병실로 돌아온 엄마 배에 갑자기 복수가 차올랐다고 했다. 엄마는 통증을 호소했고, 복부가 터질 듯이 커지면서 괴로워했단다. 당황한 아빠는 담당의를 찾았는데, 외과로 돌아간 의사는 아무리 호출해도 오지 않았다. 아빠 역시 누구에게 험한 말 못 하는 사람인데, 병원 복도를 소리치며 돌아다녔다. 외과 의사가 왔을 때 결국 욕을 뱉고 화를 냈다는 게 나중에 엄마가 써준 메모에 있었다. 바지가 다 젖도록 소변을 본 줄도 모르고, 아빠는 병원을 정신없이 뛰어다녔었다.
패닉이 된 아빠, 또 큰 고비를 넘긴 엄마가 내 앞에 있었다. 우리는 언제쯤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되는 걸까? 엄마 아빠이기 이전에, 점점 약해져가는 두 사람을 마주하면서 나는 무섭고 두렵기만 했다. 겉으로는 수업과 간병을 너끈히 해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속에서는 달라진 부모님 모습이 생경해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목 안의 수술 부위가 아무는 기간 동안 엄마는 위장과 소장에 구멍을 뚫고 호스를 삽입해 음식을 주사해 버텼다. 호스와 살이 닿는 부분은 잘 곪아서, 매일 드레싱을 해야 한다. 잘못해서 호스가 빠지면 다시 끼워야하는데, 그 통증도 심하다고 했다. 처음 빠져서 다시 끼울 때 너무 아팠던 엄마는, 두 번째 빠졌을 때 절망했다. 안 하고 싶다는 엄마를 간신히 달래서 치료실로 갔다. 호스를 끼우기 위해 엄마를 눕히고 외과 레지던트를 기다렸다. 의사가 왔는데 엄마가 너무 무서워하니까 ‘뭘 그렇게 겁내느냐’며 ‘빨리 하자’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도 모르게 의사에게 쏘아붙였다. “배 갈라봤어요? 선생님, 배 째봤냐구요. 환자가 두려워하면 좀 기다려주면 안돼요?” 말을 뱉고 나서 아차! 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혹시 엄마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간병을 하는 가족들은 물리적으로도 힘들지만 이렇게 정신적으로 특히 지친다. 긴장과 불안감, 분노, 초조함, 무력감, 오랜 기다림으로 인한 피로감. 매일매일 이런 감정 속을 떠돌며 병원에 있다 보면 나도 환자가 될 것 같은 느낌. 그래서 몸만큼 마음을 챙기는 게 중요했다. 너무 감사하고 다행인 것은 내가 요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수련이나 수업을 하면서 채운 에너지 덕분에 그래도 3년을 버텼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매트 위에서만큼은 오로지 내 안에만 집중하려고 했다. 매트를 벗어나 병원에 있어도 주변 에너지에 휩쓸리지 않도록 말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시련을 맞은 주인공이 고난을 극복하고 짜잔! 한순간에 인생이 다시 바뀐다. 하지만 겪어보니, 우리들의 삶에서는 그 시련이 한순간 바뀌지 않았다. 아주 느리게 지나갔고, 하루하루 힘들고 지루한 시간을 온전히 다 보내야 꼭 그만큼 나아졌다.
▶ 아빠의 선물, 가을 낙엽 ⓒ배윤정
‘만약’을 생각한다
‘이제 다시 입원하지 마세요!’
엄마가 입원, 퇴원을 많이 하자 이비인후과 병동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작년에 퇴원하면서 모든 선생님들이 ‘이제 외래로만 봬요’ 라고 인사할 정도였으니까.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듯 목을 가누고 몸을 일으키고, 걷는 연습부터 다시 시작한 엄마는 3년을 거치면서 아주 느리게 회복해갔다. 다시 걸을 수 있게 된 다음부터는, 나는 피곤해서 요가 수련을 빠져도 엄마는 하루도 운동을 거르는 날이 없었다. 위장과 소장에 있는 호스도 빼고, 반 이상은 기침으로 뱉어내도 입으로 먹는 연습도 시작했다. 그제서야 나도 나의 일과 생활에 시간을 쓸 수 있게 됐다.
엄마가 완치 판정을 받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더 남아있다. 지금은 집에서 병원을 다니며 진료를 받고 있다. 섭식이 아주 불편하지만 조금씩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목소리도 완전히 달라졌지만 점점 부드러워지고 있다. 이렇게 엄마와 함께 밥을 먹을 수 있기를 늘 기도했었다. 엄마와 조용하고 평온한 숲길을 함께 산책할 수 있기를 희망했었다. 너무 당연했던 소소한 일상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를 깨닫는 데 우리는 많은 시간과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지금 ‘만약’을 생각한다. 만약에 그때 내가 계속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면? 우리 집이 서울이 아닌 먼 곳이었다면? 보험이 없었다면?(엄마는 1인실에 있는 기간 동안 늘 병원비를 걱정했다.) 동생이 결혼을 해서(동생은 최근 결혼했다) 간병을 함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그래서 엄마가 위급한 상황에 간병인을 써야 했다면? 혹시 아빠도 편찮은 상황이었다면? 그랬다면 우리가 그 많은 수술과 입원과 퇴원, 병원생활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실제로 엄마는 내년 이후로 건강보험 중증환자 적용을 받지 못한다.(지금은 전체 진료비와 약값의 5%만 지불한다.) 엄마와 아빠는 그 때보다 더 연세가 들었고, 아빠는 퇴직을 했다. 앞으로 진료비가 더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건 우리 가정만의 상황이 아니라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는 우리 사회의 미래이다.
지금 내 나이 대 결혼한 친구들은 육아와 업무로 정신없이 바쁘다. 부모님이 편찮은 상황과 간병 역시 기다리고 있다는 걸 생각할 여유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누구나 마주해야 할 시기가 온다.
▶ 엄마가 퇴원한 후 처음으로 가족이 함께한 제주여행. ⓒ배윤정
그럴듯한 인생계획 대신 ‘이 순간 충실하게’
병원의 장례식장은 제일 눈에 띄지 않는 곳, 멀리 돌아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죽음’에서 멀어지고 싶은 인간의 마음 때문일까? 혹은 죽음이 나와 멀리 있을 거라는 ‘착각’ 때문일까? 죽음은 어둡고, 괴롭고, 힘든 것일까?
제일 가까운 사람이 죽음의 직전까지 몰린 상황을 겪어내며, 결국 마지막에 남은 마음은 그것이 우리 생과 바로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 순간 한 순간, 내가 마시고 내뱉는 모든 숨에서 우리는 ‘살아있음’과 ‘죽음’을 경험한다. 어떻게 죽어가는가와 어떻게 사는가는 결국 같은 말이었다. 어렸을 때처럼 그럴듯한 계획을 세우는 일이 줄었다. 대신 이 순간을 어떻게 하면 ‘충만’하게 보낼 것인지가 목표가 되었다. 삶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고 할까.
이번 주 휴일에는 엄마와 선유도공원에 갈까 한다. 가까이 있는데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가을이 오는 숲길을 함께 오래 걸을 생각이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전체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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