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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할머니와 함께한 시간들
비혼여성의 가족간병 경험을 듣다⑤ 박소혜
※ 고령화와 비혼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많은 비혼여성들이 부모나 조부모, 형제를 간병하고 있지만 그 경험은 사회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개인의 영역에 머물고 있습니다. <일다>는 가족을 간병했거나 간병 중에 있는 비혼여성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발굴하여 공유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연재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나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수년간 함께 지낸 경험이 있다. 그 이야기를 하려니 할 말이 너무 많아 걱정이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에 적어둔 글을 그대로 옮겨보자.
치매 할머니와 실랑이, 욕이 나왔다
2년인가 3년째. 할머니의 둘째 아들인 내 아빠는 너무 효자라 ‘요양원에 보내는 건 현대판 고려장’이라며 엄마와 나를 포함한 자식들의 눈치를 보면서도 할머니와 같이 지낸다.(끼고 산다?)
나는 부모님이 농사일로 바쁘실 때, 약속이 있어 외출하시는 경우에 그녀를 주시한다.(‘돌본다’라고 말하기는 거시기하다.) 그리고 목욕탕과 미장원을 출입시켜드리는 것이 내 업무다.
할머니는 TV 같은 것에 관심이 없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 탓에 주간요양보호센터도 가지 못하고 있다. 정신 말짱할 때도 지나친 아낌병 때문에 인간관계 맺기가 불가하셨다고 하니 뭐(노인정 가서도 여름엔 에어컨, 겨울엔 보일러 끄러 다니고, 얼마라도 돈을 내야 한다는 이유로 점심도 먹지 않고 귀가하셨더랬다) 덕분에 현재 대부분의 깨어 있는 시간엔 밭에서 일하는 아빠를 (강아지처럼) 쫓아다니거나 늘 뭔가를, 누군가를 찾는 것이 주 업무다.
그밖에 유일한 취미생활이라면 아주 가끔 부엌에서 호짝질(호작질)을 하는 것인데(화재를 우려해 일찌감치 가스렌지 연결을 끊어두었다) 그럴 때면 세제 같은 걸로 음식을 만들기도 하신다. (저번에 나는 주스인 줄 알고 비누인지 세제인지 알 수 없는 화학약품 든 것을 먹다 죽는 줄 알았다. 오늘은 보니 고이 그릇에 담아 뚜껑까지 덮어둔 토마토가 썩어가고 있어 코를 틀어막고 급히 화장실 변기에 쏟아버리고 왔다.)
▶ 그래도 걸어다니실 때 할머니 모습. 내가 집에 들어가자고 아무리 말해도 끄떡 안하다가 아빠가 부르며 손잡으니 못이긴 척 슬그머니 웃으며 쫄래쫄래. (2015년 1월 24일) ⓒ박소혜
가장 큰 문제는 여기가 당신 집이 아니라 생각하여 항상 다른 어딘가로 가야한다고 주장하며 우리더러 데려다 달라고 한다든지, 더 심각하게는 본인이 직접 나가는 거다. 가족들이 자전거와 차를 동원해 밖으로 나가 찾아온 경우는 셀 수도 없다. 동네 사람들이나 경찰의 신고로 데려온 적도 여러 번이다. 국가에서 지원해준다는 배회기(위치추적기)를 구해 목걸이처럼 걸어드리기도 하지만 매일 충전을 해야 하는 것이 번거롭고, 게다가 그마저 매번 할머니 당신이 여기저기 숨겨두는 바람에 사실 큰 쓸모가 없다.(할머니 당신의 조심스러운 성격과 마을공동체를 믿을 수밖에.)
나는 집에서 독립해서 나가 살고 싶지만 지금 현재로선 할머니 때문에 불가하다. 독립하지 못하는 다른 수많은 이유를 비겁하게 할머니 탓으로 뒤덮어 버리는 측면이 없지 않지만, 할머니 때문에 못 나간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다.
며칠 전엔 아이를 키운다는 심정으로 할머니를 대하자고 마음먹었다. 사실 기분이 좋을 때의 할머니는 상당히 귀엽기도 하다.(몇 주 전 목욕탕에 갔다가 전신 거울 속에 비친 당신을 보고 한참 대화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알 수 없는 가스 냄새를 풍기는 할머니를 자주 씻기고 속옷을 갈아입히자. 어린 여자아이를 키우는 것처럼 그렇게.’
하지만 날이 지날수록 아이와 할머니의 차이점이 부각된다. 고집이 더 세고, 힘이 더 세다. 감정기복이 너무 심해 어제 오후엔 난데없이 악마가 되어 못된 눈빛으로 내가 자기 돈을 가져갔다고 몰아세우며 돈 내놓으라고, “여기서 씻지 말고 느그 집 가서 씻으라”며 쏘아댔다. 나한테만이 아니고 엄마에게도 그랬다 그러고 옆집에서 무늬목집을 운영하시는 사장님한테도 그랬는지 사장님이 전례 없이 엄마한테 짜증을 냈다 한다. 게다가 성장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사실은 그야말로 절망적인 차이점이다.
그래도 오늘은 기분이 크게 나쁘지 않으신 것 같기에 같이 목욕탕 가려고 깨끗한 속옷이랑 목욕용품까지 다 챙겨 나갔다. 그런데 안 간다고 고집을 피우는 게 아닌가. 왜 안 가려고 하냐 물으니 피가 나온단다. 어디 피가 있냐고 따져 물으니 “피가 계속 나오면 큰일이지” 이런다. 한참 실랑이하다 결국 포기.
욕이 나왔다.
왜 욕이 나오는 걸까?
내 선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였다. 나는 그래도 착한 사람이고 노력하는 사람인데 어째서 이걸 받아들여주지 않는 것인가, 하며.
목욕용품 도로 가져다놓고 할머니를 다시 찾아보니 안마의자에 얌전히 앉아 멍하니 나를 쳐다본다. 마알간 얼굴로. (2014년 6월 3일)
엄마에게 고된 시집살이를 시킨 분
▶ 젊은 시절 할머니와 할아버지. ⓒ박소혜
할머니는 1931년생으로, 늘 술에 취해 있는 남편 대신 억척같이 농사 지어 3남 2녀를 힘들게 키운 분이셨다. 중년 이후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로워지셨으나 억척스러운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2001년경 남편을 떠나보냈고 2010년경부터 치매를 앓기 시작했다. 그 전부터 함께 생활하고 있던 둘째 아들인 내 아버지가 부양과 간병을 자처해 6-7년 집에서 함께 생활하였다. 마지막 석 달 간, 입으로 식사를 못하게 된 때부터는 집 근처 요양병원으로 옮겨 지내다 작년 10월 19일 86년의 생을 마감하셨다.
할머니가 치매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자, 서울에서 대단치도 않은 프리랜서로 일하던 나는 고향 부산으로 내려와 농사일로 바쁜 부모님을 보조해 할머니를 주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물론 의지와 능력 모든 면에서 아빠가 첫 번째 보호자였으나 두 번째 보호자는 엄마가 아닌 나였다.
엄마는 결혼 이후 거의 내내 할머니와 가까이 살면서 ‘혼수 하나 없이 시집왔다’는 이유로 고된 시집살이를 해온 터였다. 할머니의 치매 초기-지금 생각하니 엄마의 갱년기도 겹쳐있었던 것 같은데-에는 이상하게 엄마에 대한 악감정이 당신을 지배하고 있는 듯 성적인 모욕을 포함한 험한 말을 엄마에게 많이 퍼부었다. 속된 말로 귀신에라도 씐 듯 엄마를 향해 모진 말을 해대는 할머니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녹음해둔 것이 아직도 내 핸드폰 안에 있다. 그리하여 엄마는 가끔 할머니를 책임지는 시간이 있다 해도 그 시간은 비교적 짧았고, 아빠가 할머니에게 보이는 것과 같은 살가움은 (할머니가 완전히 아기처럼 된 때에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할머니를 부양하기로 한 아빠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고 삼시세끼 책임지면서 똥오줌 묻은 옷가지와 이불을 군말 없이 다 빨아낸 사실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엄마를 존경한다. 근처에 살았지만 큰 도움 되지 않았던 큰아버지 부부(돌아가시기 직전에는 좀 더 자주 오셨다. 할머니에겐 재산이 제법 남아있었다)나 조금 멀리 살았던 작은 아버지, 큰고모, 작은고모의 이야기는 자세히 하지 않겠다. 결혼해서 멀리 강원도에 살던 막내 남동생은 물론, 집에서 살긴 하지만 돈 벌고 술 먹으러 다니느라 늘 바쁜 큰 남동생도 할머니를 돌보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할머니, 왜 굳이 기저귀를 벗고 볼일을 보나요’
▶ 2016년 5월 2일. 등받이 이동변기 위에 앉아계신 할머니. 이제 벽에 붙은 영정사진 속 아프지 않은 할머니의 모습은 내게 영 낯설다. ⓒ박소혜
할머니의 투병 초기, 나는 아빠가 하기 어려운 일인 목욕탕과 미장원에 데리고 가는 일을 주로 맡았다. 할머니가 영 잠드실 기운이 안 보일 때는 할머니를 차에 태워 (잠투정 심한 어린아이를 재울 때 유모차에 태우고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동네 한 바퀴를 천천히 도는 일도 몇 번 했다.
아, 이 시기에 아빠는 넉넉히 남아있던 할머니의 계좌에서 매달 기십 만원씩을 뽑아서 내게 주셨고, 나는 그것을 못이기는 척 받아 챙겼다. 할머니를 돌보는 데 쓰는 내 노동량이 그만큼의 가치는 없는 것 같아 마트에 가서 쌀과자나 소세지, 율무차 같은 할머니 간식거리를 사오는 일도 열심히 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병세가 깊어져 자유롭게 걷지 못하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게 된 때부터는 내 역할이 많아져 그 기십 만원의 돈도 과하지 않다고 느끼게 되었다. 작년 1월에 기록한 글도 있다.
새벽 4시 40분, 내 방에서 일어나 새벽기도 가는 아빠를 대신해 할머니 방에 가서 누웠다. 아빠가 나가는 소리에 살짝 잠이 깼는지 할머니가 뒤척이는 소리를 냈다. 그녀가 깨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눈 꼭 감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었는데… 뒤척이는 소리가 점점 커졌고 마침내 무시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눈을 뜬 순간, 아무리 맡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강력한 그 냄새가 확! 으아앙
그 뒤척이는 소리는 할머니가 누운 채 덮고 있던 이불을 (일부) 걷어내고 팬티형 기저귀와 내복을 중간 허벅지께로 내리는 소리였다. 여파는 기저귀와 내복은 물론 할머니 다리와 발 일부, 그리고 왼손가락 몇 개, 침대 시트와 전기장판 커버까지 미쳐 있었고…
얼른 불을 켜고 허둥지둥 수습에 들어갔다. 화장실에서 이런 용도로 걸어둔 쓰레받이를 갖고 와 침대 위 황금 배설물을 한 움큼 받아 올려 좌변기 안에 넣고, 키친타올과 물티슈 가져가 옆으로 누인 할머니 엉덩이를 대충 닦아내고 뜨거운 물을 받아두고 온풍기를 켜둔 욕실로 할머니를 데려와 씻기기. -감사하게도 이런 때 할머니는 참 순하다. 자기가 잘못했다는 걸 충분히 안다는 듯. 근데 왜 늘 굳이 기저귀를 벗고 볼일을 보나요? 깔끔한 성정을 가졌던 분이라서 그랬다는데, 이럴 땐 나처럼 깔끔하지 않은 게 더… 음-
씻긴 할머니를 잠깐 온풍기 앞 의자에 앉히고 방으로 돌아가 묵직하게 냄새나는 속옷이랑 침대 시트, 전기장판 커버 걷어 실외로 옮겨놓은 후 할머니를 방으로 데려와 아비규환인 침대 아닌 바닥에 눕히고, 다시 조명을 은은한 걸로 바꾸고, 대충 닦은 전기장판 위에 의류용 페브리즈 칙칙칙칙 뿌리고 화장실용 페브리즈도 가져와 방 천장을 바라보며 칙칙 또 뿌려 일단 마무리. 퓨- (2016년 01월 26일)
투병 중인 할머니를 사랑하게 된 것 같다
▶ 입으로 밥을 못 먹게 되자 요양병원에 가실 수밖에 없었다. 햇살 맞으러 옥상에 갔지만 할머니는 기분이 영 별로다. (2016년 8월 29일) ⓒ박소혜
그러나 돌아가신 지 1년여가 되어가는 지금 할머니를 생각하면 어린아이처럼 말간 얼굴과 부드러운 피부가 떠오르며 마침내 마음이 먹먹해진다. 투병 전의 할머니는 내게 그저 ‘엄마를 괴롭히는 나쁜 사람’이었지만 당신이 아프고 나서 시작된 진짜 관계 맺기를 통해 나는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 같다. 당신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른 많은 간병 경험 가진 이들에 비해 돈이 없어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고, 어디까지나 제1보호자인 아빠를 보조하는 것에 역할이 한정되어 있긴 했지만, 이 시기에 내가 썼던 글들을 읽어보면 잠시 잊고 있던 기억과 감정들이 와르륵 수면 위로 떠오른다.
“치매 걸리면 몇 년” 같은 검색어를 검색창에 띄워 본 게 몇 번이었는지... 목욕탕에 데리고 가면 너무 민폐를 끼쳐 더 이상 목욕탕을 못 가고 집에서 매일 아빠가 할머니의 아랫도리를 씻어주던 시절, 내 눈에는 할머니 발목에 쌓인 때도 잘 보였지만 못 본 척 했던 기억, 죄책감, 죄책감보다 더 큰 ‘귀찮다’라는 감정, 내가 까준 천하장사 소세지를 손톱만큼 깨어 물고 오물거리던 모습, 어느 흐린 오후, 또 어디론가 가자고 조르는 할머니를 앉혀놓고 당시 우쿨렐레로 연습하고 있던 아리랑을 들려주고 몇 번이나 함께 부르다 눈물이 날 것 같아 멈췄던 순간…
늦은 감이 있지만 고백해야겠다. 나는 결국 할머니의 마지막을 지키지 못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5개월 전인 작년 5월에 나는 아픈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를 돌보는 늙어가는 부모님을 남겨두고 눈물 몇 방울 흘리며 부산에서 자동차로 4시간이 넘게 걸리는 시골로 이사를 와버렸다. 할머니가 그 상태로 오래오래 사실 것 같은데, 나는 부모님 집에서 사는 것이 너무너무 부자유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 결정을 한 이후부터 할머니의 상태가 티 나게 악화되었다. 내가 그런 결정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건가 자책도 했었지.)
그 당시의 감정을 그린 일기를 찾아보니 “나는 아픈 할머니를 사랑하게 되었으나 그보다는 나의 자유를 더 사랑한다”, “후회는 없겠나? 후회할 것이다. 하지만 후회 없는 인생은 없다.” 따위의 말이 적혀있었다. 하지만 그 끝에는 “당신(내 엄마아빠)이 아프거나 힘들 때는 가까이 있어 드리리라 약속합니다. 그 누구보다 가까이.” 같은 말이 붙어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모순되지만 이 말은 진심이었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할머니와 달리 내 부모가 내게 사랑과 정성을 넘치게 베풀어주었다는 것은 절절히 알고 있다. 돈은 없겠지만, 할머니의 경우를 보더라도 돈보다, 아니 돈만큼 중요한 것은 시간과 마음이다. 지금 이렇게 집밖에 나와 사는 것은 ‘나 아직 젊은 시절, 가능한 만큼은 나 혼자 자유로울 수 있게 해주시오!’ 라는 마음이랄까. 부모님은 할머니처럼 미운 환자가 되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도 있다.
함께 늙어갈 우리의 앞날에 대해 얘기해보자
나는 엄마에게 이미 “결혼 안 한 딸만큼 이런저런 일 부려먹기 좋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결혼타령이냐! 엄마아빠 아프다고 하면 (남동생들인) OO이가 돌보겠냐, XX가 돌보겠냐!”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런 말에 콧방귀도 안 뀌는 엄마가 여전히 나는 이해가 안 간다.
할머니와 지내던 시절, 잠시 임시직으로 다니던 일터에 계시던 선생님들 중에 비혼여성이 두 분 계셨는데 그 분들이 마침 그런 경우였다. 당시 40대 후반이었던 한 선생님은 막내딸이었지만 그 전해 연이어 돌아가신 부모님을 마지막까지 정성껏 돌보다 집이라든가 재산 같은 것을 말끔히 정리하고, 1년여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면서 상실의 감정을 진지하게 다독이는 시간을 가지셨던 분이셨다. 40대 중반인 또 다른 선생님도 혼자가 된 어머니의 가장 친한 친구로 많은 것을 공유하며 지내고 계셨다.
섣부른 결심일지라도 일단 60대 중반인 내 부모의 마지막은 내가 지켜본다고 치자. 그렇다면 30대 후반 비혼여성인 나의 마지막은 어떨까? 아픈 할머니와 보낸 몇 년 덕분에 나이 드는 것과 죽음과 삶에 관하여 여러 생각을 농도 깊게 많이 할 수 있었다. 답은 “저렇게는 살지 말자”였다. 할머니는 “어린 시절 엄마한테 한번이라도 따뜻한 칭찬 한마디 들었다면 이 일-할머니를 돌보는 일-이 더 기꺼웠을 텐데”라고 이야기하는 돌연변이 효자 아들을 둔 덕분에 그럭저럭 무난한 죽음을 맞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빠 외에 아픈 그녀에게 진정으로 신경 쓰며 마음 아파하는 친구나 친지는 거의 없었다. 한평생 돈에 집착해 살며 마음 나누는 친구나 취미 하나 없이 살아온 그녀의 삶은 어떻게 봐도 따라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 대신 나는 공동체, 나눔, 자연, 시골, 자유, 반성하는 삶, 안락사, 존엄사 같은 단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언니들의 벗이 되고 또 나보다 젊은 친구들과 벗이 되자고 생각했다. 1:1의 배타적인 관계를 맺은 이성이나 그로 인해 세상에 나올 수 있는 인간(들)에게 의존하지 않더라도 그런 벗 한둘이 잠시나마 나를 기억해준다면 그 인생은 괜찮은 인생일 것 같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1년이 되는 오는 10월 19일 무렵엔 이 시골마을의 언니동생들을 초대해 할머니를 기억하고, 함께 늙어갈 우리의 앞날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 청해야겠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전체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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