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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임종…우리의 선택은 옳았던 걸까?

비혼여성의 가족간병 경험을 듣다⑦ 밀알


※ 고령화와 비혼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많은 비혼여성들이 부모나 조부모, 형제를 간병하고 있지만 그 경험은 사회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개인의 영역에 머물고 있습니다. <일다>는 가족을 간병했거나 간병 중에 있는 비혼여성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발굴하여 공유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연재됩니다. -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전체기사  


“엄마, 아빠가 돌아가실 것 같아.”

 

미동 없는 손가락에 연결된 모니터의 숫자들이 빠른 속도로 내려갔다. 폐를 둘러싼 근육이 무리를 하게 되면 피로가 쌓여, 어느 순간 갑자기 힘을 확, 놓는 경우가 있다며 모니터를 잘 지켜보라는 얘기에 꿈쩍 않고 모니터를 지켜봤다. 쐑 쐑, 거리던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고 초점 없던 눈이 감겨있었다. 살짝 눈물을 흘렸는지 얼굴을 쓰다듬고 마지막 인사를 하던 엄마가 아빠의 눈 주위를 훔쳐 냈다. 푹 꺼진 양 볼에 위태롭게 매달린 산소 호흡기를 떼어내자 모니터의 숫자는 0으로 바뀌었다.

 

2016년 5월 29일 새벽 1시 9분.

호흡곤란으로 119를 타고 응급실에 도착 후 완화의료 병동에 입원한지 일주일, 임종을 앞둔 환자와 가족이 조용히 마지막을 보내도록 마련된 1인실에서의 이틀째 밤이었다.

 

폐암 4기, 아빠에게 내려진 선고

 

핸드폰을 떨어뜨리고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비틀 걷는 모양새가 혹시 풍이 오는 거 아니냐는 엄마의 걱정에도 아빠는 쓸데없는 소리라며 도리어 화를 냈다. “술 한 잔 마시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밥도 잘 먹고 잘 자고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아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역정을 냈다. 우리 집은 병으로 돌아가신 분이 한 분도 없는 장수 집안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술과 담배를 많이 하고도 별 일없이 장수 할 거라는 믿음의 근원은 큰 병 없는 가족력 때문이었다.

 

젓가락을 떨어뜨리고 나서야 아빠는 동네 신경외과에 갔다. MRI를 두 차례 찍고 대학병원 검사를 권유받았다. 머리에 몇 개의 종양들이 보인다는 소견서도 함께였다. 정밀검사를 하기 위한 입원 결정이 내려졌다. 아빠는 자신의 몸이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임을 인지했고 불안함에 연신 담배를 폈다.

 

▶ 며칠간의 정밀검사 끝에, 아빠는 비소세포성 폐암 4기로 뇌까지 전이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미지: pixabay.com)

 

며칠 동안의 검사 결과, 비소세포성 폐암 4기로 뇌 전이가 됐다는 진단을 받았다. 희고 고운 손을 가진 담당의는 A4용지에 폐암, 비소세포성, 수술, 항암, 여명… 이런 단어를 적고 하나씩 지웠다. 수술은 시기가 지나 불가능하고 암세포만을 공격해 죽이는 표적치료제는 유전자 검사 결과 맞지 않았다. 남은 건 항암제를 사용한 약물치료였다. 항암치료를 포기할 경우 아빠의 여명은 3개월, 항암치료를 한다 해도 여명은 겨우 1년 남짓이었다. 뇌전이로 한쪽이 곧 마비되니 삶의 질을 위해서라도 항암치료는 받아야 된다고 강조했다.

 

“죄 안 짓고 남한테 폐 안주게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며 엄마는 울었다. 적어도 우리 가족에게 암은 내 주변이 아닌 드라마에서나 생기는 병이었다. 암 병동의 수많은 환자들을 보고서야 하루아침에 날벼락 같은 일을 우리만 겪는 일이 아님에 위안을 얻었다. 경험을 같이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며 안심이 됐다.

 

교통사고로 아무 준비 없이 죽음을 맞는 사람도 많은데, 적어도 마지막을 준비할 시간이 있는 게 다행 아니냐며 서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청천벽력 같은 암 선고와 함께 이 사실을 아빠에게 전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항암치료를 받아 단 몇 개월이라도 생명을 연장하는 게 맞는가의 물음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결국 있는 그대로를 아빠에게 설명하기로 했다. 항암치료를 받을 사람도, 삶을 선택할 사람도 아빠였다.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었다. 인터넷을 뒤져 폐암이나 항암에 관한 정보를 찾아 아빠에게 전달하고 주변의 경험들도 들려줬다. 아빠는 고민 끝에 항암치료를 받기로 결정했다.

 

“억울하다” “화가 난다” 아빠의 분노

 

30년 동안 아빠와 함께 장사를 한 엄마는 단골손님들 때문에 일을 그만둘 수 없다 했다. 당연히 엄마가 아빠의 병간호를 하리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엄마는 단호했다. 무엇보다 병원에서 환자복을 입고 있는 아빠를 보기 힘들다고 했다. “나중에 어머님에게도 아버님의 모습이 트라우마로 남으실 수 있어요. 저희 엄마도 아빠 돌아가시고 나서 굉장히 힘들어하셨거든요. 그냥 우리끼리 나눠서 해요” 라는 올케 의견을 참고해, 엄마는 간병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결혼과 함께 귀농한 언니는 간병을 하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고 여동생은 맞벌이에 임신 중이었다. 남동생은 학원일이 늦게 끝나 평일엔 시간이 없었고 올케 또한 임신 중이었다.

 

당시 나는 새로 시작하려던 일이 연기되며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부모님과 살고 있으니 짐 챙기기에도 수월했고, 비혼으로 돌봐야 할 자식도 없으니 다른 형제에 비해 주도적으로 간병을 맡게 됐다. 평일엔 내가 주말엔 동생들이 교대로 병실을 지켰다. 가끔 볼일이 생기면 동생 중 한명이 연차를 내고 교대를 해줬다. 어느새 병실에서 아빠는 아내 없이 자식들을 키운 훌륭한 아버지로, 우리는 그런 아버지를 돌아가며 간호하는 효심 가득한 자식들이 되어있었다. 이런 얘기를 하며 문병이라도 오라고 말하면 엄마는 피식, 웃고 말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엄마가 혼자 묵묵히 아빠의 빈자리를 지키며,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눈물을 흘렸음을 안다. 빨개진 눈과 멍멍한 콧소리가 엄마도 위로가 필요하다고 말해주는 듯 했다. 엄마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돼보였다. 그런 엄마에게 무리하게 간병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체력으로나 병원에서의 일처리나 누구보다 내가 잘 할 자신이 있었고 감정 조절도 잘 할 자신이 있었다. 가끔 엄마는 “니가 있어 든든하다”거나 “너 없으면 큰 일 날 뻔했다”며 나에게 기대곤 했다. 엄마도 늙었다, 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나는 부모의 보호자가 되었고 책임감이 느껴졌다.

 

▶ 암환자인 아빠에게 찾아온 건 분노와 수면장애였다.  ⓒ밀알

 

암 환자는 흔히 죽음, 장애, 의존, 외모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경험하며 심리적 위기를 겪는다고 한다. 보통 시간에 따라 3단계로 나뉘는데 암을 진단받은 1주일 이내엔 분노, 부정, 불신, 절망 등을 경험하고, 두 번째 단계에선 암이나 죽음에 생각으로 우울, 불안, 불면, 식욕부진 등이 나타난다. 마지막 단계에 와서야 진단과 치료 과정을 받아들이고 자신만의 대처 방식을 찾아낸다.

 

아빠에게 찾아온 건 분노와 수면장애였다. 베개에 머리만 대면 곧바로 잠을 자던 사람이 한숨도 자지 못하는 날이 계속됐다. 잠깐 눈을 붙이고 나면 다시 잠들기 어려웠다. 그럴수록 예민해진 신경 탓에 자주 짜증을 냈다.

 

항암치료를 위해 입원한 병원에선 침대가 딱딱하다고 화를 내고, 옆 사람의 코골이에 짜증을 냈다. 집에서 이부자리를 가져와 푹신한 침대를 만들면 이번엔 이불이 무겁다고 화를 냈다. 잘 먹는 반찬이 나오지 않으면 밥이 맛없다며 영양사를 호출했다. 혈관이 잘 안보여 주사 놓기 어려운 팔이라는 얘기를 듣더니, 실력이 없다며 간호사에게 면박을 줬다. 아빠에게 주사를 놓을 상황이 오면 주사 전담 간호사가 병실을 다녀갔다. 텔레비전 소리가 크면 크다고 작으면 작다고 화를 냈다. 무언가 할 때 전화가 걸려오면 “이럴 때만 딱 맞춰 전화를 한다”며 짜증을 냈다. 내가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병원에 커피 마시러 왔냐”고 화를 냈다. 진료 시 생년월일과 이름을 물으면 “사람을 바보로 보느냐”며 인상을 썼다. 가끔은 왜 화를 내시냐고 말하는 병원 직원과 싸우기도 했다.

 

아빠의 분노가 암 환자에게서 처음에 나타나는 정상적인 반응이요, 나를 향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내 안의 감정들이 요동쳤다. 어떨 땐 참지 못해 신경질을 내며 따져 묻곤 했다. 왜 자꾸 짜증을 내냐고,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 아빠처럼 유별난 사람 봤냐고. 아빠는 왜 다른 사람들처럼 못하냐고, 이제 마음을 좀 다스려보라고.

 

간호사실에 부탁해 수면제 처방을 받았다. 하지만 아빠는 여전히 모두가 자는 새벽이면 부스럭거리며 일어나 수액 폴대를 밀고 병실 문을 나섰다. 피곤한 날엔 아빠가 비운 침대에 올라 눈을 감기도 하고, 때로는 아빠와 텅 빈 병원 로비를 걸어 다니기도 했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병원 로비에 앉아 아빠는 “억울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가만히 있어도 화가 난다”고. “고향에 가고 싶다”고도 했다. 항암을 시작하기 전 다녀오고 싶다고. 그래야 마음의 준비가 될 것 같다고. 그럴 때 아빠의 환자복은 아빠보다 더 크게 보였다. 낮 동안 요동쳤던 감정의 잔해들이 가라앉았다. 가끔은 아빠와 그렇게 화해했다.

 

간병, 끝이 있으니 아름답다는 말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이라 퇴원은 힘들다는 담당의를 설득해 집에 왔다. 의식불명 상황에서 인공호흡기나 심폐소생술과 같은 연명치료는 받지 않겠다는 서명도 했다. 대중목욕탕에 가지 말 것과 운전을 하면 안 된다는 주의를 받았다.

 

퇴원을 했지만 방사선 치료는 외래를 통해 받아야 했다. 암이 더 진행되면 편마비가 오고 인지능력이 떨어져 혼자 보행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었다. 매일 3분씩 11번에 걸쳐 방사선치료를 시작했다. 두통이 나기도 했지만 뇌압을 조절하는 약을 먹으면 가라앉았다. 아빠는 치료를 썩 잘 받았다. 무엇보다 치료 시간이 짧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치료가 끝이 났을 땐 머리카락은 빠져 모자를 써야했고, 종양은 조금 작아졌다.

 

집에서 왕복 2시간 거리의 병원을 다니면서도 아빠의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다. 병원에 있을 때보다 짜증도 줄어들고, 식사도 잘 하고 잠도 조금씩 자게 됐다. 머리의 종양 크기가 조금씩 작아지고 있는 걸 확인한 후였다. 치료가 끝나면 사람들로 붐비는 채혈실 앞 의자에 앉아 아빠는 생강대추차를, 나는 자판기 커피를 마셨다. 아빠는 “고맙다”라는 인사를 커피 한 잔 뽑아 먹으라며 동전을 건네는 것으로 대신한 것 같다.

 

▶ 항암치료는 체력 싸움이었다. 어느새 내 삶은 아빠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밀알


본격적으로 항암치료가 시작됐다. 다행히 항암제는 아빠에게 맞았다. 우려한 만큼 부작용은 심하지 않았다. 근육통이 있지만 구토나 메스꺼움은 없었다. 혀가 민감해져 매운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됐지만 그 외에 먹고 싶은 건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다.

 

항암치료는 체력 싸움이었다. 잘 먹고 잘 쉬어 몸을 회복시킨 후 항암제로 다시 커지는 세포를 억제했다. 암세포는 조금씩 홀쭉해졌다. 항암치료를 하고 회복하고의 과정이 3주에 한 번 씩 반복됐다. 입맛이 없으면 식욕촉진제를 처방 받고 근육통이 심해지면 진통제를 처방 받았다. 면역력이 떨어지면 면역주사를 3일간 한 차례씩 같은 시간에 맞았다. 보통은 내 휴무에 맞춰 다음 항암 일정을 잡고 외래 진료 시간을 예약했다.

 

아빠가 5차 항암치료를 할 무렵 나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아빠의 병세는 계속 제자리였고 나는 경제적으로 빠듯해졌다. 항암 싸이클만 잘 맞추면 일하기에 무리는 없을 듯했다. 단지 아빠의 컨디션에 따라 병원에 다니는 날이 들쑥날쑥하다는 문제가 남아있었다. 일터에 간병사실을 먼저 알리고 양해를 구했다. 내 경우엔 1년여라는 시간을 생각해서 아빠의 병원 일정에 맞춰 쉴 수 있도록 직장에서 배려해줬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간병에만 매달리면 우울증에 걸린다며 민폐더라도 일을 쉬면 안 된다는 주위의 조언과, 지금은 아빠의 간병을 우선하라는 동료들의 배려도 있었다. 연차휴무를 다 쓰면 무급으로 쉬더라도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출산휴가를 낸 여동생도 매일 집에 와 낮 동안은 엄마와 함께 아빠를 돌봤다.

 

어느새 내 삶은 아빠를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출근하기 전 아빠의 약과 식사를 챙기고, 퇴근하면 바로 돌아와 항암으로 검게 변한 발톱을 보며 팔다리를 마사지했다. 아픈 곳은 없는지 묻고 열이 나면 체온을 체크했다. 나는 감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 조금이라도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한 번에 쌍화탕을 두 병이나 마시고 잤다. 아빠에게 감기를 옮겨 폐렴으로 응급실에 가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일터와 집, 병원을 오가는 삶이 전부가 되어 있었다. 노래가 마냥 좋아 시작했던 합창도,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번역해보고 싶어 시작한 번역수업도 빠지게 됐다. 친구와의 만남은 수시로 어긋나기 일쑤여서 약속을 잡는 것도 미안했다. 가끔씩은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끝이 있으니 아름답다”란 말을 반복해서 생각했다. 그럼 턱 밑까지 차오르던 숨이 조금은 내려갔다.

 

부모를 간병하는 일본 중년남성 28명의 인터뷰를 실은 <아들이 부모를 간병한다는 것>(히라야마 료 지음, 류순미 송경원 역, 어른의 시간)이란 책에는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라고 간병해온 것은 아니지만, 내가 간병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이가 있고 그것을 인정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는다고 했다. 간병의 가장 큰 괴로움은 고독감이라 한다.

 

아빠를 간병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그러다 너 나중에 후회한다”였다. 그러니 지금 잘하라고. 가끔 아빠에게 화가 나 잔소리를 하거나 투닥거려 짜증난 마음을 얘기하면 열에 아홉은 똑같이 그렇게 말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여기서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어떻게 더 이상 잘 할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냈다는 죄책감을 내게 굳이 심어주는지, 왜 내 감정은 항상 나중에 할지도 모를 후회에 가려져야 하는지, 더군다나 왜 꼭 후회를 할 것이라 생각하는지 묻고 싶었다. 아무도 내 마음은 들여다봐주지 않았다. 스스로 다독거리며 입을 닫았다.

 

한 친구는 내 간병 상황을 접하자 그때서야 자신도 20년 동안 아빠의 병으로 고통 받아 왔노라 얘기했다. 그리곤 20년이나 지속될지 몰랐을 간병 생활에 진저리를 쳤다. 나는 아빠와 다투고 화해한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는 싸우면서 감정을 알아챘고 화해하며 서로를 의지했다. 혼자만 쳇바퀴처럼 도는 간병이란 굴레에서 환자를 돌보는 사람들에게도 사회적 관심과 지지가 필요하다.

 

영원히 기억될 오월, 아빠의 마지막 날

 

13차 항암치료에 더 이상 암세포가 반응하지 않자 병원에선 약을 새로 바꾸기로 했다. 새로운 항암제는 맞는 과정부터 아빠를 힘들게 했다. 숨이 가빠져 한 차례 쉬었다 맞고 항암치료가 끝나고 나타나는 통증의 강도도 훨씬 셌다. 결국 항암치료는 중단됐고 완화의료 진료를 시작했다. 통증 부위에 마약성 패치를 부치고 마약성 진통제를 먹었다.

 

항암을 중단한 후 아빠의 몸은 빠른 속도로 나빠졌다. 세 걸음 이상 걷기 힘들어 했고 말 한마디를 하려해도 기침을 하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가래는 계속 끓어올랐다. 어제는 일어났다면 오늘은 겨우 앉아있을 수 있었다. 그 즈음 아빠는 집에서도 가정용 산소 호흡기를 사용했다. 칠순을 일 년 앞둔 2015년 봄이었다.

  

폐암환자들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서 인터넷을 찾아본 적이 있다. 가장 고통스런 죽음이 폐암이라고 했다. 숨을 쉬고 싶어도 쉴 수 없으니 문을 박차고 뛰어나갈 만큼 힘들다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가족 또한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라고. 조금씩 나는 마음속으로 아빠와 헤어질 준비를 했다.

 

오월의 어느 날 아침, 아빠는 엄마를 통해 자식들을 불러 모았다. 나는 일터에 늦는다고 전화를 했다. 아빠는 힘겹게 이부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를 거의 하지 못한 지 일주일이 되었다. 복수에 물이 차서 숨 쉬는 게 더욱 더 힘들어 보였다. 우리는 모두, 아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지했다. 아빠는 꿈에 할머니를 만난 얘기를 하며 얼마 못 살 것 같으니 죽거든 화장하지 말고 고향 선산에 묻어 비석을 세워달라고 얘기했다. 유언인 했다. 각오는 했지만 아빠의 힘없는 목소리에 눈물이 났다. 다음에도 우리 가족 이대로 또 만나자고 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나는 오히려 씩씩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하고 힘없이 누워있는 아빠에게 “다녀올게, 잘 견디고 있어. 저녁에 봐” 라는 인사를 남겼다. 서로 씩씩하게 견디자는 내 맘이 아빠에게 전달될 거라 믿으며…

 

▶ 응급 수송된 아빠는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했다. (이미지: pixabay.com)


그리고 그날 오후, 아빠는 호흡곤란으로 119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갔다. 병원 침대에 누워 가끔 목이 타는지 물을 찾고 통증을 호소했다. 가래 삭히는 약을 최대치로 써도 다시 가래가 쌓여 숨 쉴 때마다 쇳소리가 났다. 모르핀도 수시로 맞았다. 눈동자는 노래지고 초점이 없어져 갔다. 축 늘어진 몸을 옆으로 한 번씩 뒤집어 가며 기저귀를 갈았다. 아빠는 이미 의식이 없어보였다. 다만 한 손을 자꾸 올려 문을 여는 동작을 했다. “왜 그래? 거기 뭐가 있다고? 밖에 나가자고?” 엄마가 물으면 고개를 미세하게 흔들었다. “그럼 집에 가자고?” 아빠가 눈을 깜박 감았다 뜨며 허공의 문을 열었다. “좀 있다 갈 거야.” 엄마는 마지막 거짓말을 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편안한 노후를 원한다. 그리고 자신이 살던 집에서 죽기를 원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병원에서 마지막까지 힘든 치료를 받고 가족이 아닌 의료진이 지켜보는 앞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아빠도 집에서 죽기 원했는지 모른다. 가족들이 지켜보는 익숙한 이부자리 위에서 크게 숨 한번 들이쉬고, 내뱉고, 그대로 조용히 숨을 거두기를 희망했는지 모른다.

 

엄마에게 물었다. 그때 119를 부르지 않았다면 아빠는 병원이 아닌 집에서 돌아가셨을까…. 하지만 “죽음이 바로 옆에 와 있는 자신의 가족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지켜보는 것”은 “어지간한 각오로는 할 수 없는 일”(오시카와 마키코 지음, 남기훈 역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다>, 세움과비움)이었다. 엄마는 눈이 뒤집혀 당장에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아빠의 모습에 119를 부를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마지막 아빠의 유언은 지키지 못했다. 매장 대신 화장을 택했고, 비석을 세우는 대신 납골당에 모셨다. 대신 아빠가 즐겨 입던 옷을 선산에 묻어 주었다. 아빠가 사랑했던 소나무 두 그루와 함께.

 

처음 아빠의 기저귀를 갈던 때

 

항암치료를 받을 경우 1년 정도 더 사실 수 있다는 의료진의 얘기보다 아빠는 3개월을 더 사셨다. 그동안 기다리던 손자들도 태어났다. 친손자의 이름은 지어주고 싶다는 아빠의 소망은 이루어졌다. 그렇게 나의 1년 3개월의 간병은 끝이 났다.

 

아빠는 종종 내가 없었다면 벌써 죽었을 거라 얘기하곤 했다. 그 말은 내게 부담과 동시에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노년에 노후를 보살펴 줄 사람이 필요해서인지 나의 비혼을 지지해서인지 모르지만, 언제부턴가 아빠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내 말에도 흔쾌히 괜찮다고 했다. 한 명쯤은 시집을 가지 않고 같이 살아도 좋다며 오히려 기뻐했다. 지금은 아빠의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간병 기간 동안 처음으로 아빠의 기저귀를 갈던 때가 떠오른다. 망설이는 나에게 젊은 간호사는 잘 부축하라며 능숙한 손놀림으로 아빠의 옷을 내리고 한 쪽 엉덩이를 들어 올리며 기저귀를 시트에 깔았다. 처음으로 아빠의 민낯을 본 기분이었다. 의식 없이 누워있는 길고 큰 육체가 가여워졌다. 누구보다 자존심 강하고 멋 내기 좋아하던 아빠가 다른 이의 손에 갓난아이처럼 다뤄지는 모습에 눈물이 났다. 비틀대면서도 화장실을 가던 아빠였다. 의식이 있다면 누구보다 자신의 이런 처지를 괴로워할 것 같았다.

 

나는 아빠의 마지막 자존심은 지켜주고 싶었다. 간호사의 동작을 잘 보고 배워 다른 이의 힘을 빌리지 않고 혼자서 능숙하게 아빠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싶었다. 어린 시절 아빠가 내게 그랬듯이.

 

▶ 지금은 아빠의 마지막을 함께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밀알

 

“이번엔 내 차례인 거지…”

 

최근에 이사를 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에도 엄마는 여전히 쉬지 않고 일을 했지만 혼자서는 식사를 거르는 눈치였다. 간신히 옷만 갈아입으면 방엔 들어가지 않고 잠은 거실이나 내 방에서 잤다. 아빠가 누워있던 방은 언제나 방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엄마에겐 새로운 환경이 필요해 보였다. 그리고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항상 집에 돌아올 땐 현관 앞 계단 난간의 차가운 손잡이에 이마를 대고 머리를 식히던 아빠의 모습이 보였고, 옥상에 올라가면 나무에 물을 주고 청소를 하던 아빠의 모습이 그려졌다. 종일 텔레비전 소리로 시끄러웠던 거실이 조용할 때면 아빠의 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부재를 느낄 필요가 없는 다른 환경이 필요했다.

 

서둘러 이사를 결정하자 엄마는 ‘우리가 함께 살 집을 알아보라’고 했다. 엄마의 ‘우리’라는 단어에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엄마 또한 돌봄이 필요할 시기가 올 것이다. 그때에도 나는 다른 형제들보다 먼저 엄마의 간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부디 그 시기가 최대한 늦게 오기를 바랄 뿐이다.

 

요즘 들어 육아휴직 중인 여동생이 일주일에 이삼일은 집에 와 머무른다. 엄마의 외로움을 덜어주고자 하는 목적도 있지만 연년생인 두 아이를 혼자 돌보기 힘들어 손을 빌리러 오는 것이다. 덕분에 요즘은 엄마의 건강을 챙기는 일과 함께 육아라는 고된 노동도 경험하고 있다. 이어달리기 하듯 계속되는 돌봄이 힘들 때도 있지만 옆에 있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힘을 얻는 사람들을 보면 나 역시 힘이 난다.

 

얼마 전 오랜만에 중학교 동창과 통화를 했다. 서로의 안부를 묻자 친구는 어머니를 모시고 매일 병원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고생이 많다는 나의 위로에 친구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했잖아. 이번엔 내 차례인거지…”

 

누구에게나 인생의 한 단계를 통과하는 시기가 있다. 나는 지금 돌봄 능력이 최대한 발휘되어야 하는 시기를 통과중이고 부디 씩씩하게 즐겁게 해나가기를 바래본다.

 

죽음이 찾아오는 동안 누군가의 돌봄은 필요하다. 언젠가 누구에게나 보살핌을 주고 보살핌을 받는 시기는 찾아온다. 나는 이런 나의 간병의 기억이 개인적인 경험으로 머물지 않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노화와 질병과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먼저 바뀌어야 한다. 나는 어떤 노년을 바라는지, 어떤 죽음을 맞고 싶은지, 죽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터놓고 이야기해야 한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전체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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