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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는 필요없어, 우리가 서로 도울 거야

<남순아의 젠더 프리즘> 예쁘지 않아도 괜찮아


※ 세상을 바라보는 20-30대 페미니스트들의 관점과 목소리를 싣는 ‘젠더 프리즘’ 칼럼입니다. 필자 남순아님은 페미니스트 영화인입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동화 속 주인공처럼 예쁘지 않은 나

 

일찍부터 나는 내가 예쁘지 않은 걸 잘 알았다. 예쁘지 않기 때문에 사랑받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동화 속 여주인공들은 예뻤고, 그들을 질투한 계모나 새언니는 예쁘지 않았으니까. 왕자와의 사랑에 성공해 행복해지는 건 예쁜 주인공들이었다.


▶ 디즈니 애니메이션 <신데렐라>에서 주인공 신데렐라는 예쁘고, 계모와 새언니들은 못생기고 질투심 많은 캐릭터로 묘사된다.

 

나와 달리 동생은 예뻐서 어렸을 때부터 친척 어른들에게 늘 생긴 것으로 칭찬을 받았다. 어른들은 종종 예쁜 동생과 예쁘지 않은 나를 비교했고, 놀리듯 ‘순아는 어떡하니’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지하철에서 만난 모르는 어른들도, 부모님의 친구나 동료들도 동생이 예쁘다며 칭찬했다. 날 보고 ‘못생겼다’고 한 어른은 한 명도 없었지만 나는 동생‘만’ 예쁘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들이 내게도 예쁘다는 말을 해주면 안심이 되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 기분을 들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알면 <백설공주>나 <신데렐라>에 나오듯, 예쁘지 않은 조연 캐릭터가 예쁜 주인공을 질투하는 것처럼 볼 것 같았다. 어린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신데렐라를 질투하는 새언니처럼 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얼굴이 예쁘지 않으니 맘씨라도 곱게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크고 나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중학교 때였다. 학교축제 때 동생이 우리학교에 놀러 왔는데, 남자 친구들 여럿이서 ‘동생은 예쁜데 너는 왜 그러냐’며 나를 놀렸다. 그날 나는 집에 와서 엄마를 붙잡고 ‘왜 나는 예쁘지 않게 낳았냐’며 펑펑 울었다. 초등학생이던 동생은 눈치를 보며 다가와서 ‘언니, 내가 예뻐서 미안해’라고 말했고, 나는 더 크게 울었다. 얼마나 속상했냐면, 다음 날 선생님에게 ‘저는 왜 예쁘지 않을까요’라며 상담을 요청했을 정도다.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건 실제 내 얼굴이라기보다 여자가 ‘예쁘냐/안 예쁘냐’에 따라 ‘잘해줘야 한다/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태도를 결정하던 남자아이들의 놀이 문화였다. 내가 예쁘지 않고 통통하다는 이유로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껴질 때 나는 위축되었다. 남자아이들이 나를 심각하게 괴롭힌 것은 아니다. 다만 웃으면서 던진 농담들이 나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네가 여자냐?’, ‘왜 OO(예쁜 아이)한테 짐 들게 해? 팔도 튼실한 네가 들지.’ 나를 직접 겨냥하지 않아도, 남자아이들이 특정 여자아이들을 예쁘다고 숭배할 때면 경쟁에서 탈락한 느낌이 들었다.

 

남자로부터 욕망 당하기를 욕망한 나

 

모순적이지만 내 외모와 상관없이 존중받길 바라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언제나 남성에게 욕망‘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여자아이들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방법이 두 가지라고 배운다. 하나는 능력이 뛰어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성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 전자의 방법은 여성이길 실패한 여성의 정신승리처럼 취급된다. 능력이 뛰어난 남성은 그가 가진 능력과 기울인 노력을 칭찬받지만, 능력이 뛰어난 여성은 ‘기가 세다’거나 ‘독하다’, ‘지려고 하지 않는다’는 등의 말로 평가 절하된다. 미디어에서 그려진 ‘능력은 뛰어나지만 예쁘지 않은’ 여자들이 그렇듯이.

 

▶ 미디어에서는 자주 ‘여자는 외모가 능력’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KBS 자료화면

 

그렇다면 과연 여성이길 실패했다는 것은 무엇일까? ‘성녀’와 ‘창녀’라는 이분법으로 여성을 구분해온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이 주체적인 존재이길 허락하지 않는다. 남성의 성적 객체의 기준에서 벗어난 ‘아줌마’나 ‘예쁘지 않은 여자’는 무성적으로 여겨지고 경멸당한다. 마치 남성의 선택을 받지 못한 여성은 가치가 없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자아실현을 위해 노력하면서도, 동시에 남성으로부터 사랑받길 욕망해왔다. 두 가지 욕망은 별개이면서도 때로는 부딪혀서, 나는 그 사이에서 매일 갈팡질팡 헤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누가 더 남성으로부터 욕망 당하는지 늘 다른 여성들과 경쟁하는 느낌이었다.

 

어린 나이를 어필하던 나

 

10대 후반에 학교를 자퇴한 후 학교 밖에서 활동하면서, 나는 내가 비록 예쁘진 않지만 ‘어리다’는 강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나보다 나이 많은 남성들이 열아홉, 스무 살의 내가 자신을 ‘오빠’라고 불렀다는 이유로 환호성을 질렀다. 어린 나는 아무런 권력이 없었지만 ‘어린 여성의 나이’는 성적 자본이 되었다. 나는 예쁘지는 않지만 어렸기 때문에, 나이 많은 남성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하거나 존중해주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면 화가 났지만, 이전의 내가 몰랐던 성적 자본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나 역시 사람들을 만나면 어린 나이를 강조했다. 성적 객체가 되는 것을 즐기기까지 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성적 자본은 시간이 지나며 너무나 금방 사라질 것이었다. 더 이상 어리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을까봐 겁이 났다. 나는 계속해서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가장 어린 여성’이 되고 싶었다. 나보다 어린 여성을 만나면 그 위치를 빼앗길까봐 경계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키웠다. 연애를 하지 않을 때는 내가 모자란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한 두려움은 연애 관계가 폭력적이어도 거절하거나 중단하지 못하고 끝까지 참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 믿게 했다. 나는 연애 관계에서 상대에게 사랑을 갈구했고 의존했다. 섹스의 횟수는 욕망의 확인이었기 때문에 내가 즐겁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섹스 빈도가 줄어들면 상대방의 마음이 시들해졌을까봐 괴로웠다.

 

사랑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쉽게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은 몰랐기 때문에 나 자신을 괴롭혔다. 항상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내 인생에서조차 주체가 아닌 객체로 존재했다.

 

▶ 페이스북 페이지 <메갈리아4>에서 제작한 GIRLS Do Not Need A Prince 티셔츠. 

 

나 그리고 다른 여성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다

 

지금의 나는 이전보다는 나를 더 사랑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여성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건 아마 수많은 동시대 페미니스트들 덕분일 것이다. 우리는 기억이 시작되는 때부터 줄곧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다른 여성들과 비교당하며 평가받아 왔다. 아버지가 여행을 떠난 뒤 집에 남아 서로를 질투하고 경쟁하는 신데렐라와 계모, 언니들처럼 말이다.

 

그런데 누군가 ‘소녀들은 왕자가 필요 없다’(Girls do not need a prince)고 말했다. ‘개념녀와 김치녀로 우리를 나누지 말라’며 평가받는 것을 거부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가부장제가 여성을 어떤 방식으로 구분하는지 공부했으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착취당한 경험을 나눴다.

 

트위터에는 여성이 여성을 도운 이야기가 올라왔다. 다른 여성으로부터 도움 받고, 다른 여성을 도운 경험담들. 그 경험담을 읽으면서 나는 다른 여성들에 대한 신뢰감을 더 갖게 되었고, 나도 다른 여성들을 돕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런 감정은 남성에게 선택받기 위해 여자들과 경쟁하고 비교하면서 살았을 때는 경험해본 적 없는 강력한 사회적 소속감을 주었다. 그 속에서 나는 나의 가치가 남성이 나를 선택하느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 아님을 차차 깨닫게 됐다.

 

▶ 호식이치킨 사장의 성폭력으로부터 피해 여성을 구한 여성의 <노컷뉴스> 인터뷰 내용 중에서.

 

‘남자는 우정을 선택하고 여자는 사랑을 선택한다’ 같은 헛소리로 여성들 사이의 우정이 불가능한 것처럼 배웠던 나의 십대 시절에 여성들이 서로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만약 동화 속 공주들이 자신이 사랑받지 않아도 충분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결말은 왕자님과의 결혼이 아니라 모험을 떠나 용을 쓰러뜨리는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토록 오랫동안 내가 남성에게 사랑받을 만큼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여성은 다양하고 그 안에서 차이도 많고 갈등도 많다. 여성이라고 해서 반드시 여성을 돕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여성과 여성이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 차이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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