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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그래피 감수성을 넘어
<치마 속 페미니즘> 다양한 섹스의 상상
※ 글 쓰고 그림 그리고 퍼포먼스를 하는 예술가 홍승희 씨의 섹슈얼리티 기록, “치마 속 페미니즘”이 연재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 섹스에서 소외되는 오르가슴
열세 살 때 첫 자위를 하면서, 사람들이 이런 오르가슴을 느끼기 위해 섹스를 하는 건지 궁금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살갗을 맞대고 오르가슴을 함께 즐기는 게 섹스라면 어서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첫 경험, 아니 첫 강간을 당했을 때 오르가슴은커녕 아프고 불쾌한 느낌만 들었다. 돌이켜보면 불쾌한 섹스는 대부분 강간이었고, 그런 일들을 사춘기부터 이십대 초반까지 숱하게 겪었다. 내 몸이 수치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 잦아졌다. 수치심은 몸의 감각이 열리는 걸 방해했다. 어느새 포르노, 야동처럼 섹스는 어딘가 불결하고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었다. 내게 오르가슴은 섹스와 별개였고, 꽁꽁 문 잠긴 독방에서만 느낄 수 있었다.
섹스와 자위는 내게 멀고 먼 섬과 섬처럼 느껴졌다. 섹스라는 대륙에서 나는 남자의 사정을 중심으로 신음소리를 내고, 몸을 움직였다. 자위의 대륙에서는 온전히 내 손가락에 의지해 편안하게 쾌락의 산에 오를 수 있었다. 섹스에서는 남자친구의 사정과 그의 오르가슴이 중심이 됐지만, 자위에서는 나의 오르가슴에만 몰입할 수 있어서 좋았다.
20대 초반까지 나의 섹스는 야동에서 봐왔듯이 늘 격앙된 분위기에서, 아주 격렬하게 애무하고 피스톤 질을 하면서 인상을 쓰고 남자 혼자 땀을 뻘뻘 흘리다가 사정을 하고 끝났다. 이따금 ‘너무 좋아, 살살, 세게, 빠르게’ 등등 대화가 오가긴 했지만 여유 있고 느긋하진 않았다. 우리들은, 나는 무엇이 그리도 급했던 것일까.
대화를 하라는 조언은 많이 들었지만, 내게는 쉽지 않았다. 섹스에 대해 대화로 ‘여기 만져줘’, ‘저기 만져줘’, ‘클리토리스를 이렇게 만져줘’라고 말하는 것도 한두 번 시도하고 포기했다. 혼자서 자위할 때만큼 느낌이 상쾌하지 않았다. 섹스에서 오르가슴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다. 물론 나와 섹스했던 그들은 내가 내는 신음소리만 듣고 오르가슴을 느꼈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남자친구와 섹스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자주 자위를 했다. 섹스할 때 오르가슴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많은 남성들이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게 오르가슴을 향해 돌진하고 집중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혼자 있을 때 자위를 하는 것처럼 나와 섹스할 때도 자위하듯 섹스를 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집으로 돌아온 후에 따로 자위를 해야 했을까.
자위와 오르가슴에 대해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기엔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있었다. 이 사람이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움, 상대가 불편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내가 이상한 게 아닐까 하는 내 감각에 대한 불신이었다. 그렇게 몇 년간 나의 오르가슴은 섹스에서 제외되었다. ‘그의 사정’을 중심으로 섹스는 클라이맥스를 장식했지만, 나의 오르가슴은 그러지 못했다.
나는 섹스할 때 오르가슴을 느끼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체념했다. 흡입 섹스에서 클리토리스와 질 입구 밑에 돌기처럼 자란 작은 세포들이 자극되면서 느껴지는 약간의 쾌감, 그의 숨소리, 체취와 살갗의 부드러움, 포근함에 만족했다. ‘육체적 오르가슴보다 정신적 교감이 더 중요한 거니까!’라며 ‘자위’했다.
▶ <부끄러운 오르가슴> ⓒ홍승희, 2017
# 자위의 대륙과 섹스의 대륙의 만남
한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 오르가슴은 혼자 하는 자위에서 느끼는 은밀한 쾌감이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성친구와 성상담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마광수와 야한 여자를 좋아하던 그 친구는 여성을 신비로운 존재라고 여겼다. 바로 그 점이 나는 불편했지만, 그래도 성에 관해 유일하게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이성 친구였다. 우리는 종종 만나서 서로의 로맨스 상담보다는 성상담을 해주었다.
친구의 집에 누워 다리를 벽 쪽으로 세우고 오르가슴에 대해 이야기하던 어느 날이었다. “너도 자위해?” 친구가 물었다. “당연하지. 여자는 자위 안하는 줄 알았어?” “응, 주변에서 들은 적이 없어서. 너도 하는구나!” 생각보다 여성은 성욕도 없고 자위도 안하는 줄 아는 남자들이 많다. 이 친구도 그랬다. “여자는 어떻게 해?” 호기심 많은 친구에게 클리토리스를 만지작거리면 된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우리 같이 오르가슴 느껴볼까?”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우리는 흡입 섹스 말고, 각자의 자리에서 자위를 하기로 했다. 편안하게 누워서 벽 위로 다리를 올리고 자위를 시작했다. 서로의 신음소리를 들으면서 이따금 옆을 바라보고 눈을 마주쳤다. 거의 동시에 오르가슴을 느낀 우리는 행복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타인이 보는 앞에서 함께 하는 자위는 처음이었다. 이렇게 좋은 걸, 왜 지금까지 하지 않았지? 왜 혼자 있을 때만 하려고 했을까? 자위가 뭐라고. 오르가슴이 뭐라고. 친구와 나는 이후로도 종종 만나 자위를 했다. 우리는 섹스를 한 걸까? 그렇다. 삽입, 아니 흡입 섹스를 하지 않았을 뿐 우리는 깊게 교감했다.
이후부터 나는 좋아하는 사람과 섹스를 할 때 그의 눈을 보면서 자위를 했다. 각자의 성기를 만지면서 함께 자위하기도 했다. 자위가 점점 부끄럽지 않게 되었고, 내 쾌락을 드러내고 말하는 것도 점점 쉬워졌다. 물론 내가 자기처럼 성욕이 있고 오르가슴을 좋아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당황했던 사람도 있었다. 여자는 자위를 하지 않으며 남자보다 성욕이 없다고 생각했던 남자들이 그랬다. 하지만 대부분은 더 대범하고 자유롭게 쾌감을 함께 즐겼다.
내가 나의 성감을 따라 몸을 움직이는 만큼, 상대도 나의 성감을 따라 움직였다. 내 클리토리스와 질 입구에 분포된 돌출된 세포들을 자극하기 위해, 그의 눈을 보면서 온 감각을 집중하면서 허리와 엉덩이를 살짝 들고 촉감을 즐겼다. 자위할 때처럼 자연스럽게 허리가 위, 아래로 움직이고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상대가 발기가 안 되거나 먼저 사정을 해서 피스톤 운동을 하지 못해도, 내 손가락이나 그의 몸의 굴곡을 활용해 자위하듯 섹스하면서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었다.
외딴 섬처럼 있던 자위의 대륙과 섹스의 대륙이 만난 그날 이후, 나의 클리토리스는 섹스에서 소외되지 않았다. 클리토리스가 침대 위에서 감각을 열어놓자, 흡입 섹스 말고도 다양한 섹스의 감각과 서사가 생긴 것이다. 파트너도 더 이상 ‘발기가 안 되면 어쩌지, 여자를 만족시켜줘야 하는데 어쩌지, 오랫동안 해야할 텐데’라는 부담 없이 섹스를 했다. 누구도 연기하지 않았다.
# 나의 감각은 누가 알아맞혀주는 게 아냐
내가 어떨 때 흥분하고 어디를 만져야 기분이 좋은지는 먼저 자기 자신이 알아야 한다. 내 촉감은 나다. 나의 감각이 곧 나다. 내 몸이 나인 것처럼. 나의 쾌감은 누가 알아서 알아맞혀 주는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과 많은 섹스를 한다고 해서 쾌감이 증폭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만나는 상대에 따라 나의 성감이 달라진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를 달아오르게 하는 취향이 어느 정도 맞아야 하지만. 적어도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 피스톤을 하는지, 얼마나 다양한 체위를 구사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남성 상위 자세일 때도 허리를 적극적으로 움직이면 오르가슴에 도달할 수 있다. 다른 자세에서도 몸의 굴곡을 이용해 다양한 감각을 자극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자위할 때처럼, 내가 잘 느낄 수 있는 자세와 위치, 힘을 잘 조절하는 것이다.
오르가슴을 느끼는 방법은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르다. 나의 경우 질 오르가슴, 클리토리스 오르가슴은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클리토리스 오르가슴을 느끼는 순간 삽입을 할 때, 강력한 질 오르가슴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나의 경우 항문과 질에 힘을 힘껏 줄 때, 여성 상위 체위로 알파벳을 그리면 성감이 배가 된다. 또는 자위를 하다가 내가 오르가슴을 느낄 때 파트너의 성기를 삽입하면 엄청난 쾌감이 온다.
사랑하는 사람과 서로 자위를 하면서 마주보는 눈빛은 황홀하다. 물론 섹스에서 오르가슴이 목적이고, 그 과정은 수단이라고 얘기하는 건 아니다. 오르가슴을 꼭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굳이 오르가슴을 거부할 필요가 없으니까 오르가슴을 챙긴다. 너무 좋은데 굳이 느끼지 않을 필요가 없다!
# 가부장사회의 섹스 서사, 포르노를 넘어서
옛날엔 흥분하려고 남자친구와 함께 포르노와 야동를 보곤 했다. 커다란 화면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체위를 따라하면서. 포르노 감수성을 좋아하고, 거기서 흥분을 느낄 수는 있다. 그러나 야동에서 섹스를 배우니까 똑같이 어디 어디를 애무하고 삽입하고 사정하고 끝나버리는 섹스를 하게 된다. 이상한 일이다. 먹는 음식도 매일매일 다르고, 핸드폰도 이렇게 다양한 세상인데, 왜 섹스는 포르노 감수성으로 획일화되어 있을까. 그리고 나는 왜 포르노 감수성에 나의 감각을 끼워 맞추려 했을까.
가부장 세계의 섹스 서사는 포르노와 삽입 감수성이다. 다양한 개성이 춤추는 사회라고들 말하지만 정작 살아가는 방식도 사고하는 틀도 획일적인 것처럼, 섹스 감수성도 획일적이다. 어릴 적 즐겨봤던 야동의 섹스 서사는 남성의 사정이 클라이맥스를 장식했고, 여자의 정복당하는 듯한 신음 소리와 정복하는 남자의 성기의 피스톤 운동이 주를 이루었다.
야동은 남자의 사정이 곧 섹스의 완성인 것처럼 느끼게 했다. 여성인 내가 야동을 보며 배운 ‘여자 역할’은 남성이 해주는 애무와 삽입에서 적절한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특히 섹스에서 신음소리는 아주 중요했다. 억지로 내는 것이 아니라, 흘리듯 흐느끼듯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러면서 참는 듯해야 한다. 그러다가 남자가 사정을 할 때 즈음 못 참겠다는 듯이 터져버리는 울음처럼 비명을 질러버리는 것(그러나 부담스럽지 않게 크지 않은 목소리로). 어려운 연기였지만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아예 벗고 있는 것보다는 조금은 걸치고 있는 것이 흥분된다는 점, 몸매를 잘 가꾸어야 한다는 점(야동 속 여성들의 몸매는 천편일률적으로 날씬하고 볼륨감 있었다) 등. 그런 것들을 연기하기 위해 나는 노력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성적 만족감을 주기 위해 그런 것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사랑의 표현이라 여겼다.
# 감각의 축제, 다양한 섹스 감수성
인도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사람이 있다. 그와 처음 섹스를 할 때, 나는 지금까지 했던 '섹스'를 잊었다. 생각해보면 자기 서사가 없는 사람과 대화를 할 때 무료함을 느끼는 것처럼, 섹스도 마찬가지였다. 삶의 서사가 풍부한 사람은 감각의 상상력도 풍부했다. 당연히 섹스도 풍부한 감각의 축제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몽땅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직면하기 위해 한국을 떠나온 것이다. 그만큼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고 어디에서든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있었다. 그의 눈빛과 촉감은 당연하게도 내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환한 햇빛과 고요한 엠비언트 음악, 향에서 나오는 연기로 채워진 공간에서 우연히 섹스를 했다. 요가를 하듯, 서로의 손바닥을 등과 어깨에 가만히 대고 기운을 나눴다.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흡입 섹스를 할 때는 우주로 날아가려는 우주나비의 날갯짓을 떠올렸다. 우리는 그것을 ‘우주나비섹스’라고 부른다. 그렇게 기운을 나누다가 잠시 담배를 물고 쉬고, 다시 내 클리토리스를 그의 허벅지에 비비고, 서로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키스를 하다가 잠들고, 잠결에 다시 몸을 매만지고… 그 공간에는 빨간색 불빛이나 야한 속옷, 헉헉거리는 격렬한 숨소리, 거창한 체위가 필요 없었다. 우리에게 섹스는 그림, 대화, 춤, 명상이었다. 야동보다 더 야한 것들이 이 삶과 세계에 이렇게나 많다.
▶ <만다라: 만개하는 감각> ⓒ홍승희, 2016
이제 나는 포르노를 봐도 흥분되지 않는다. 그보다 나를 흥분시키는 건 삶의 부피, 투명한 눈빛, 나비의 날갯짓 같은 상상이다. 섹스도 함께 즐기는 상쾌한 스포츠가 될 수도 있고, 깊고 고요한 명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20대 중반이 되어서야 몸으로 느꼈다. 야동에서 보는 것처럼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듯 심각하게 인상을 쓰고 격렬하게 피스톤 운동을 하다가 남자의 사정으로 폭발하고 끝나버리는 것이 섹스가 아니었다.
섹스만큼 이 사회에서 왜곡된 감각이 또 있을까. 섹스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온전한 감각의 회복이. 섹스에 묻은 때가 너무 많다. 이것들을 벗겨버리고, 모든 것과 알몸으로, 알맹이로 만나고 싶어서 요즘은 탄트라를 공부하고 있다. 섹스의 본질이 뭘까, 인류라는 종족은 왜 존재하게 된 걸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서. 탄트라에서 섹스는 ‘우주의 본질과 자아의 합일’이라고 한다. 심오해 보이지만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말이다.
포르노 서사를 걷어낸 섹스는, 나와 나 이외의 모든 타자와 관계 맺는 감각의 개성을 드러낸다. 인간은 몸의 동물, 어쩔 수 없는 감각의 존재다. 가장 밀접한 감각의 교감인 섹스에서 어떻게 타자와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가는 그의 삶의 방식과 닮아있다. 섹스에서 다른 방식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다면, 다른 삶의 가능성도 풍부해지지 않을까.
# 클리토리스 감수성의 세상이 아름답다
만약 내가 불행하게도 첫 자위, 첫 오르가슴보다 첫 강간을 먼저 경험했다면 어땠을까. 그럼 나는 몸의 감각을 닫아버리게 되지 않았을까. 수치심으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나의 몸과 나를 분리시키지 않았을까. 다행히 열세 살 때 느낀 오르가슴의 평화, 무한한 평화는 포르노 서사와 강간의 침범이 쳐놓은 수치심과 순결 이데올로기, 타자의 욕망을 뚫었다. 그리고 처음 타인 앞에서 자위를 했을 때, 나는 나의 감각과 오르가슴이 수치스럽지 않다는 걸 몸으로 느꼈다. 가부장 마초와 자본이 만들어낸 수치심의 코르셋과 섹시함의 문이 닫히고, 야성의 벌판이 펼쳐진 것이다.
여성의 오르가슴 소외만큼 오래된 소외가 있을까. 알몸으로 서로 뒤엉켜 있을 때도 내가 그랬듯 대부분의 여성들은 신음소리를 연기하고, 만족했다고 남자를 다독이고 추켜 세워주는 감정노동을 해 온 것이다. 이것은 여성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비극이다.
이제 겨우 나는 내 몸이 즐거워하는 게 뭔지 안다. 눈치 보지 않고,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고도 오르가슴을 즐길 수 있다. 남근이 여성의 질 속을 쑤시고 박고 정복하고 지배하는 섹스가 아니라, 서로를 마주보고 문지르고 쓰다듬는 클리토리스 오르가슴 같은 세상을 원한다. 나는 이런 감각을 클리토리스 감수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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