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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 수호자들이 경악할 ‘환상’의 세계

<오지 않은 미래의 발견> 야나기 미와의 ‘나의 할머니들’①


※ <노년은 아름다워>(새로운 미의 탄생)의 저자 김영옥님이 나이 듦에 관해 새로운 화두를 던지는 “오지 않은 미래의 발견” 기사를 연재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미래의 나, ‘나의 할머니들’을 만나는 시간

 

‘일본의 나이든 여성’이라는 키워드를 입력시킬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몇몇 이미지가 있다. 한국의 생활협동조합 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일본의 풀뿌리 활동가들, 욘사마를 위시해 한국 스타들에 열광하며 ‘한류’라는 중요한 문화정치적 흐름을 만들어낸 글로벌 대중문화 소비자들, 그리고 야나기 미와의 ‘나의 할머니들’ 시리즈가 보여주는 상상의 여성 노년들.

 

이중 생활협동조합 활동가들과 한류 팬덤의 주인공들은 현실 속 여성이고, 야나기 미와의 ‘할머니들’은 상상 속 인물이다. 하지만 후자 역시 현실을 살고 있는 젊은 여성이 꿈꾼 자신의 미래 모습이라는 점에서, 완전히 가상세계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꿈꾸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야나기 미와(Miwa Yanagi) ‘엘리베이터 걸’ 시리즈(1994-1999) 중에서


야나기 미와(Miwa Yanagi)는 1990년대에 백화점 엘리베이터 안에서 유니폼을 입고 상냥한 웃음으로 손님을 안내하는 여성들에 대한 연출사진작업 ‘엘리베이터 걸’ 시리즈(1994-1999)를 통해 일본 사회의 자본주의적, 가부장적 여성관을 냉정하게 포착하고 드러내는 데 성공한 사람이다.

 

사회가 강제하고 자본주의가 몰염치하게 소비하는 ‘여성/성’을 ‘엘리베이터 걸’은 매우 독특한 컴퓨터그래픽 이미지로 전시한다. 큰 사이즈로 프린트된 고화질의 반짝이는 사진 속에서 집단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성들에게서는 인격이나 정체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칭적인 건축학적 공간 구도 속에서 일종의 기하학적 형상을 이루는 이들은, 마치 SF영화 속 주인공들이 그러하듯 인공성과 일회성, 그리고 휘발성을 강하게 풍긴다.

 

사람이 된 그래픽 혹은 그래픽이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또한, ‘유니폼’으로 상징되는 ‘역할로 축소된 인격’ 혹은 ‘의례로 축소된 관계성’들을 소비문화의 맥락 속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행위자 없는 행위, 또는 수행으로서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이 ‘유니폼-주체’는 특히 여성이라는 젠더와 맞물려 강한 비판을 내포한다.

 

이토록 냉정하고 비물질적인 여성 이미지를 생산한 이후, 야나기 미와가 시작한 것이 바로 ‘나의 할머니들’ 시리즈다. 1999년부터 이어진 이 시리지를 통해 이야기와 꿈이 있는 ‘여성의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야나기 미와는 자신의 작품세계가 뚜렷하게 변화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나의 할머니들’에서 표현되는 노년 이미지들은 각각이 매우 ‘유니크’하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걸’ 사진 작업 때 포즈를 취해준 모델들을 포함해 40세 미만의 ‘젊은’ 여성들에게 각자의 50년 후 나이든 모습을 상상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각자가 상상한 내용에 따라 인터뷰 대상자를 분장시키고 무대를 연출했다. 이 흥미로운 시도는 야나기 미와 자신을 포함해 모두 25명의 ‘할머니’ 이미지들을 탄생시켰다. 각각의 이미지에는 또한 짧은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지금 여기’에서 선취한 미래 ‘할머니’의 시점

 

▶ 야나기 미와의 ‘나의 할머니들’ 중에서 moeha(상) minami(하)


우선 시리즈 제목이 ‘나의 할머니들’인 것부터가 관심을 끈다. 할머니가 되면 세상 모든 아이들을 ‘나의 아이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듯, 아직 어리거나 젊은 사람들이 세상의 할머니들을 ‘나의 할머니들’이라고 부르는 게 이상하지 않은, 그런 품 넓은 모계적 공동체의 비전이 제목에서 엿보이기 때문이다.

 

‘나의’가 혈연 중심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세대 간 마음 씀으로 깊어지고 넓어지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이 제목은 또한 두 가지 면에서 흥미롭다. 작가 자신이 (그리고 그녀와 함께 관람객들이) 늙은 여성 모두를 ‘나의 할머니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아직은 젊은’ 여성들이 현재의 시점에서 미래의 자기를 ‘나의 할머니’라고 부르며 미리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심리치유가들은 종종 ‘내면의 저 어두운 구석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만나보라고 제안한다. 그 아이를 안아주고 격려하고 위로해주라고도 한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내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저 할머니를 만나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야나기 미와의 작업에서 어떤 공명을 느꼈다.

 

나 역시 이십 대 중반에 ‘늙은 나’를 상상해 본 적이 있다. 해질 무렵 밝음과 어둠이 적당히 섞여 있는 시간, 그다지 넓지 않은 뜰에서 한 할머니가 그네에 앉아 지난 시간 속의 자신‘들’과 해후하고 있다. 그네가 앞으로 뒤로 조금씩 흔들릴 때마다 그녀에게 어떤 여자의 얼굴이 어떤 장면과 함께 다가온다. 그녀는 이 여자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대화의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나는 미래의 나인 이 할머니와 각각 다른 연령대의 나인 상이한 여자들의 조우에서, 뭐랄까 약간 신비스러운 기운과 함께 어떤 지지나 격려-“괜찮아, 잘 살아왔어” 같은-가 내게 주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후 나는 때때로 그날의 상상을 떠올렸다. 아우라로 충만한 어떤 일회적 사건 같았던 그 상상은, 그러나 반복될 수 없었고 다만 기억될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기억하며 ‘나의 할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의 나를 기다리고 있는, 지금의 나를 고요히 바라보고 있는 그 ‘나의 할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늘 위로받는다. 이 위로의 성격이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다. 일종의 꿈같은 것이다. 어떤 낯선 그리움을 닮은. 내 무의식의 문양을 양화로 드러낸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큰 역사의 맥락에서 발터 벤야민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완성에 도달한/도달할 역사의 이미지를 현재의 ‘지금 시간’에서 선취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선취된 이미지에 입각해 현재를 조직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여기서 ‘지금 시간’(Jetztzeit)이라는 것은 현재가 과거와 조우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나는 내가 이십 대에 상상한 ‘늙은 나/나의 할머니’와 야나기 미와의 ‘나의 할머니들’ 작업을 개인의 역사라는 차원에서 벤야민과 유사한 관점으로 이해한다. 말하자면 개인사로 느끼고 이해하는 역사철학인 셈이다. 과거와 현재의 조우인 ‘지금 여기’의 시공간이 있고, 또 그 ‘지금 여기’에서 선취한 미래 ‘할머니’의 시점이 있다. 그 시점에서 현재의 나를 이해하고 구성할 수 있다면, 우리는 개인의 역사를 무의미한 선형적 진행에서 해방시켜 새로운 의미망, 새로운 시간성의 맥락 안에 놓을 수 있지 않을까.

 

혈연, 가족과 무관하게 해방된 세계

 

야나기 미와의 ‘나의 할머니들’은 미래의 시점에 존재하는 ‘늙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서 현실로 불러낸 것인데, 약속이나 한 듯이 그 모습들은 혈연이나 가족과 무관하다. 이것이야말로 이 이미지들을 징후적으로 보게 만드는 지점이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노년의 평화와 행복, 지혜를 부모에게 부가된 훈육의 책임과는 상관없이 ‘마음껏 손주들을 우쭈쭈 해줘도 되는’ 삶에서 찾고 있다면, 야나기 미와는 그런 통상적 노년의 이미지를 탈혈연적으로 확장시키거나 아예 그와 전혀 무관한 할머니들을 소개하고 있다.

 

▶ 야나기 미와(Miwa Yanagi) ‘Fairy Tale’ 시리즈 중에서   ⓒyanagimiwa.net

 

그녀가 ‘할머니들’ 시리즈 이후에 작업한 ‘Fairy Tale’(순진무구한 노파와 무자비한 소녀들의 믿기 힘든 이야기) 시리즈에도, 역시 기존과는 다른 이미지의 여성들이 등장한다. 일본 동화를 비롯해 <헨젤과 그레텔> <라푼젤> <백설공주> <신데렐라> <잠자는 미녀> 등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서구의 동화를 재연출하고 있는 이 시리즈에서, 할머니와 소녀는 서로 묘하게 에로틱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거울 이미지로 짝패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는 순진무구한 소녀의 이미지도, 그처럼 순진무구한 소녀들을 괴롭히고 착취하면서 자신의 검은 욕망을 채우는 마귀 할머니의 이미지도 없다. 오히려 이 이분법적 구도 자체가 의문시되고 전복되면서 소녀와 할머니는 새로운 짝패로 등장하는 것이다.

 

‘엘리베이터 걸’에서 ‘나의 할머니들’로, 그리고 다시 ‘Fairy Tale’로 이어지는 그녀의 작업은 의도와 배경, 그리고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가부장적 일본 사회에서 ‘여자’가 어떻게 구성되고 소비되는지 질문하고 있다.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전시된 “Windswept Women”은 이 질문에 대한 그녀 나름의 통쾌한 답변일지 모른다. 무수한 산들과 대지를 발밑에 두고 거센 바람이 회오리치는 하늘을 머리에 인 채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춤을 추고 있는 이 거대한 여성 형상들은, 이제 막 천지를 창조하고서 터질 듯한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과도하게 크거나 과도하게 늘어지고 쳐진 가슴을 장착한 이 태곳적, 신화적 여성들은 문명사가 만들어낸 ‘여성/성’을 바람에 다 날려버리며 ‘여성 존재’ 자체를 강렬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전시된 야나기 미와(Miwa Yanagi)의 ‘Windswept Women’ 중에서  ⓒyanagimiwa.net


전작 시리즈부터 이 ‘바람 여자들’ 사진에 이르기까지, 야나기 미와의 작업을 관통하는 관점 중 하나는 소녀와 할머니야말로 여성의 모든 가능한 존재태들의 양대 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소녀와 할머니가 내뿜는 존재감에 비해 일반 여성의 존재는 시시하다(고 할 수 있다). 소녀는 아이와 여성의 경계 존재로서, 할머니는 여성의 제한된 여성성과 성역할을 넘어선 존재로서, 가부장제 사회 규범과 자본주의 성문화가 손쉽게 포획하거나 관리하기에는 너무나 모호하거나 무섭도록 제멋대로이거나 치명적으로 잉여적이다. 한마디로 젠더 규범/규격에 딱 맞아떨어지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이들의 이미지는 우에노 치즈코가 ‘여학교 문화’라고 부른 문화 세계의 핵심 주인공들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미디어 세계 속에서 여학교 문화는 그 영토를 깊고도 넓게 확대해 가고 있다. 나이를 아무리 먹든 ‘소녀’로 인식하는 30대 그리고 50대 여자들, 금단의 ‘썩은녀’ 문화. 남성의 사각지대였던 이 암흑대륙이 때때로 환상의 아틀란티스가 바다에서 부상하듯 그들의 눈앞에 홀연히 나타났을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라고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2010)에서 쓰고 있다. 여기서 ‘그들’이란 여성 남성 가릴 것 없이 가부장제 수호자들, 혹은 젠더 수호자들을 의미한다. 야나기 미와의 ‘나의 할머니들’이 보여주는 세상도 이 가부장제-젠더 수호자들을 당혹에 빠뜨릴 ‘환상의 아틀란티스’의 일부다.

 

‘나의 할머니들’ 시리즈가 창조해낸 ‘환상의 아틀란티스’에서, 할머니가 된다는 것은 이제 본격적으로 자유인으로 활개를 치며 (마치 숨겨놓았던 날개를 꺼낸 듯이!)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처럼 ‘자유인으로 활개를 친다는’ 것이 시간과 장소 혹은 공간과 관련해 어떤 의미와 형태를 띠는가에 대해서는 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는 자유/인이라는 표상 자체가 나이 듦과 함께 바뀔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는 말이다.

 

무대를 연출하고 사진을 찍기 전에 아티스트와 인터뷰 당사자 간에 어떤 대화가 오고갔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나의 할머니들’ 시리즈가 보여주는 할머니들은 자유인의 위치에 있다. 현실 속의 할머니들이 (할아버지들도 마찬가지다) ‘손주들 보는 권리와 의무’를 가장 달콤하고 뿌듯한 행복이라고 말하곤 하는데 반해, (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는 강요된 것이리라) 이 사진 속 할머니들은 가족이나 혈연관계를 넘어서 자기만의 고독한, 혹은 화끈한, 혹은 혈연과 무관한 ‘나의 아이들’과 함께하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다. 이 세상은 혈연 혹은 이성애 중심의 재생산 노동과 역할에서 해방된 세상이기도 하다.

 

나는 그 할머니들을 보면서, 인터뷰에 응한 여자들이 꿈꾸는 50년 후의 삶이란, 노동과 (이성애/가족 중심) 로맨스, 양육이나 재생산에 얽매어 있는 현재로서는 불가능하지만 ‘그때’는 가능할, 꼭 한번쯤은 적극적으로 살아보고 싶은 대안적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누군가 꿈꾼다는 점에서, 그와 같은 삶은 또한 현재의 실존 환경 속에 일종의 예언처럼 숨겨져 있는 씨앗과 같다는 것을 알았다.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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