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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인 교수 인종차별 사건, 그 후 8년

<도영원의 젠더 프리즘> 세계 인종차별 철폐의 날을 맞아


※ 세상을 바라보는 20-30대 페미니스트들의 관점과 목소리를 싣는 ‘젠더 프리즘’ 칼럼입니다. 필자 도영원님은 영국 글래스고대학교에서 인권과 국제정치 석사를 전공하고, 현재는 한국에서 프리랜서 인권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해외유학생 신분으로, 反인종차별 집회에 참여하다

 

오는 3월 21일은 내게 특별한 날이다. 2015년 3월 21일, 스코틀랜드에서 유학 중이던 나는 인종차별 반대 집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글래스고 시내로 나갔다. 그 날의 집회는 다른 어떤 집회보다도 대규모였다- 반 년 뒤에 열린 스코틀랜드 독립 응원 집회를 빼면 말이다.

 

터키 난민 출신인 같은 과 동기가 단상에 나가 자신이 경험한 인권침해를 고발하고, 시민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았다. 나이지리아 출신 유학생이던 당시 남자친구와 한국인 여성인 나에게 일부러 활짝 미소를 지어 보이던 지역주민들의 얼굴도 기억난다. 외국인 시위자들에게 최선을 다해 지지의 의사를 전하려는 그들의 마음이 와 닿았다. 집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태어나서 최고의 생일파티였어!”

 

3월 21일은 세계 인종차별 철폐의 날이다.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서 지지의 미소를 받게 되는 경험을 한다면, 한 인권노동자의 생일로서 이보다 좋은 날은 없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와 외국인 유학생이 아닌 원주민의 입장이 된 지금은 질문하게 된다. 내가 그 날의 반(反)인종차별 집회에서 느꼈던 것 같은 연대감을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이주민들에게 주고 있을까?

 

▶ 3월 19일 이주단체들 주최로 열린 2017 세계 인종차별 철폐의 날 기념대회 ⓒ출처: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페이스북

 

외국인혐오와 여성혐오 동시에 저항한 보노짓 후세인

 

이쯤에서 2009년에 국내에서 있었던 버스 인종차별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보자. 2009년 7월 어느 날, 한국인 동료와 버스에 타고 있던 인도인 성공회대 교수는 한 승객으로부터 ‘냄새 나는 새끼’, ‘아랍’, ‘더러워’ 등 난데없는 욕설 세례를 받았다. 교수의 여성 동료가 항의하자, 동료에게도 모욕과 폭행이 따라왔다. 그 모욕의 주된 내용은 ‘한국 여자가 깜둥이를 만난다’는 것이었다.

 

인도인 교수와 동료는 고군분투 끝에 가해자를 끌고 경찰서까지 갔지만, 수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경찰은 검은 피부의 그가 한국 대학의 교수라는 사실을 믿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폭행을 가한 승객에게는 정중하게 행동했다. 인종차별을 처벌하는 법안이 달리 없었기에 교수는 그를 모욕죄로 고소했다. 가해자는 벌금 100만원의 경미한 처분을 받았다.

 

피해사실 자체부터 법의 미비함, 경찰의 부적절한 대응까지 문제적인 부분이 너무나 많은 사건이다. 하지만 이는 인종차별 행위에 대해 사법적 판단(모욕죄)이 내려진 국내 최초의 사례이기도 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아리송하다. 보노짓 후세인 성공회대 교수가 경험한 혐오폭력은 아마 한국에서 단일 사건으로서 가장 많은 언론의 관심을 받은 인종차별 사례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마따나 이 사건은 한국에 거주하는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혐오에 비하면 특별히 더 폭력적인 사건이 아니다. 이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사례를 조사하면서 나는 그를 인터뷰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많은 흥미로운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한국 사회에서 인종차별의 심각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부각된 것은 인권운동가로서 그의 업적이나 다름없다. 그는 대학교수라는 권위를 이용해 경찰과 가해자에게 사과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반드시 법적으로 고소를 해서 한국에 혐오범죄가 처벌받는 선례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아시아의 인종차별을 다루는 연구자였던 그에게 이것은 하루 이틀 벼르고 있던 기회가 아니었다. 성공회대와 동료 활동가들의 도움을 받아 기자회견을 열어 문제를 공론화시켰다. 이 움직임이 이후에는 차별금지법 입법운동과도 만났다.

 

그런데 그가 공론화하려고 했던 것은 사실 단순히 인종차별이 아니었다. 후세인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외국인혐오와 여성혐오가 종종 교차하여 나타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버스 인종차별 사건을, 유색인종인 그를 향한 인종주의적 폭력이자 외국인 남성과 함께 있던 한국인 여성을 겨냥한 여성폭력으로 보았다. 기자회견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의 이름(성·인종 차별 대책위원회)도 인종과 성에 기반한 폭력에 반대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 대부분의 언론은 사건에서 여성혐오의 색깔을 빼고, 그를 ‘후진국형 인종차별’의 무력한 피해자로 묘사했지만 말이다. 여성주의에 대한 관심이 지금처럼 높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다.

 

인종차별과 성차별이 교차하는 메커니즘

 

거짓말 같던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이 혐오범죄냐 아니냐 하는 논쟁에 불이 붙고 이 사례가 다시 떠올랐다. 예전 기사들을 찾아보던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사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경찰이나 사법 관계자들이 ‘피해자가 외국인인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강조하는 등, 명백한 혐오폭력을 우연한 것처럼 비정치화하려는 움직임은 너무나 친숙했다. 피해당사자인 후세인 교수가 보기에는 전혀 취한 상태가 아니었던 가해자를 취객으로 묘사하는 언론의 모습도, 범인이 정신질환자라는 주장을 결코 물리기 싫어하던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 일부의 여론과 닮아있었다. 두 범죄자가 ‘주취자’와 ‘정신질환자’라는 것은 물론 매혹적인 가설이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이 사회가 외국인혐오와 여성혐오로 얼룩져있다는 ‘진실’을 외면하고, 사회적 약자를 향하는 폭력을 특정인의 ‘일탈’로 치부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처럼 인종주의에 기반한 배제와 여성에 대한 혐오는 어느 정도 유사한 메커니즘을 공유할 뿐 아니라, 오랫동안 부정적인 공생관계에 있기도 했다. 예컨대 ‘외국인 남성과 연애를 하는 자국인 여성’에 대한 혐오는 한국형 여성혐오의 클래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분노에는 여성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가부장적 사고방식과 이주노동자를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인종주의가 함께 깔려 있다. 이주노동자들이 일자리와 세금 혜택을 부당하게 취하는 것뿐만 아니라 ‘여자’까지 마음대로 가져간다는 식이다.

 

그런데, 이에 항의하는 여성의 목소리와 이주노동자 및 이민자의 목소리는 좀처럼 가까이에서 만날 일이 없었다. 여성들은 ‘내 몸은 나의 것’, ‘누구를 만나든 나의 자유’라는 여성주의 주장을 펼쳤지만,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민족주의와 가부장적 사고방식에서 배제되는 이가 여성뿐 아니라 이주민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이주민들이 주장해야 할 몫으로 남아있었다.

 

한 사람의 페미니스트로서 고백하건대, 내가 인터넷을 통해 주로 접했던 대중적인 페미니즘 운동이 갖는 이주민에 대한 태도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가부장제를 비판할 때 이민자나 외국인 여성의 경험이 차지하는 역할은 제한적이다. 비(非)한국인 여성들은 주로 한국 남성의 ‘매매혼’이나 ‘동남아 섹스관광’ 같은 현상을 비판할 때 ‘피해여성’으로서만 부수적으로 언급된다. 이와 유사하게 ‘한국 (유교) 사회의 성차별이 마치 이슬람 문화권의 그것마냥 심하다’는 의미인 ‘유슬림’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기도 했다. 이때 무슬림 여성은 살아있는 여성이 아니라, 한국여성이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 있는지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매개일 뿐이다.

 

외국인 남성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서양 선진국 출신으로 매너와 성 평등의식을 갖춘 가상의 백인 남성은 가부장적이고 이기적인 한국 남성에게 일침을 날리는 존재이다. 잘생긴 외국인 남성 패널들이 출연하는 어느 토크쇼에서는 시청자들의 카타르시스를 노린 듯 ‘선진국 남성이 지적하는 한국 남성들의 모순’이 연달아 터져 나오고, 이 발언들은 곧 젊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활발히 인용된다. 이 프로그램은 인기도 많고 문화 차이에 대해 생각할 점들을 던져주기도 하지만, 외국인 한 사람이 -사실은 대부분 개인의 주관적인 의견에 지나지 않는 것을- 출신국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처럼 말하는 설정 자체가 한국 시청자들이 한국인 이외의 사람들을 얼마나 피상적인 이미지로 소비하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화려한 이들의 그늘에서 실제 이주노동자의 대부분을 차지할 유색인종 외국인의 존재는 찾기 힘들다.

 

▶ 올해 3월 4일 열린 세계 여성의 날 기념행사에서 참가해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며 행진하는 아시아 여성들. ⓒ출처: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페이스북

 

‘차이’를 고찰하는 페미니즘, 인종주의에 저항하다

 

실제 한국인의 삶이 많은 수의 이주노동자나 결혼이민자와 긴밀하게 연결된 것에 비해, 우리 사회에 공유되는 이들의 삶에 대한 지식은 놀라울 정도로 제한적이다. 외국인 혹은 이주노동자라는 존재를 전략적으로 평면화한 표현들이 남성중심 사회에 일면 유쾌한 각성의 기회를 던져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성차별의 보편적인 성격이나 ‘외국’ 혹은 ‘이슬람’이라는 단어 하나로 요약할 수 없는 차이에 대한 고찰이 빠져 있다. 이런 표현은 여성혐오를 한국에 거주하는 ‘가장 보통의’ 한국여성 시민의 맥락에 한정시키며 이주민, 특히 여성 이주민의 경험에는 이중의 소외를 안긴다.

 

무엇보다, 인종주의적 접근은 같은 사회에서 억압의 경험을 일부 공유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태도로도 윤리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다. 퀴어 운동과 여성 운동이 서로에게서 지지와 응원을 얻어왔던 것처럼, 이제는 반(反)인종차별 운동도 공감하고 연대하는 포괄적인 페미니즘이야말로 내가 하고 싶은 페미니즘 운동이다.

 

한국의 인종주의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그리고 동시에 여성들에게 연대의 손을 내밀었던 보노짓 후세인 성공회대 교수의 투쟁이 8년째가 되는 올해, 우리는 그때로부터 어디까지 발전해왔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벚꽃대선을 앞두고 여성과 성소수자들은 어느 때보다도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차별금지법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외국인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때이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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