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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오리가 난다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생명의 명랑성①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1.

 

“꽈악, 꽉, 꽈악꽈악 꽉꽉꽈아악~”

 

아직 어슴프레한 아침 공기를 가르며 소리가 온다. 그 소리에 잠자던 몸속에서 스멀거리며 무언가가 올라온다. 따뜻한 이불을 걷어내고 자리옷 차림으로 긴 담요 한 장을 몸에 두르고 집 앞의 양피못으로 간다.

 

오리들이다! 겨울이면 어김없이 오는 생명들. 오리 소리다. 수십 마리의 오리가 양피못에 앉아 유유히 물살을 가르고 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십여 마리의 오리 떼가 왔다. 그 후로 해가 지나면서 점점 늘어 이제는 육칠십 마리가 떼 지어 온다.


▶ 못에서 노는 오리들


밤에 와서 자고 아침이면 날아오른다. 제 각각의 무리가 있어 함께 움직인다. 새벽에 나가면 오리들이 물속에서 노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점점이 검은 색으로 보이다가 차츰 밝아오면 형체가 뚜렷해진다. 못가에 앉아 오리가 날기를 기다린다. 해가 어느 정도 오르면 오리들은 먹이를 찾아 들로 날아간다.

 

오리가 날 때, 육중한 몸으로 물을 가르며 날아오른다. 오리는 제비처럼 날렵하게 날지 못한다. 날개는 짧고 몸은 무거운 오리가 날아오르는 모습은 마치 물수제비를 뜨듯 퉁, 퉁, 퉁, 날개로 물을 가르며 퍼덕이다가, 허공을 차고 오르는 형상이다. 그 때 오리의 온 몸에서 튕겨 나오는 힘의 약동! 그 ‘통 몸’이 주는 생동감에 세상이 잠시 흔들린다. 존재를 모르던 공기가 갑자기 제 존재를 알리며 일제히 갈라선다.

 

저녁이 되면 오리들은 다시 연못으로 돌아온다. 오리가 물 위로 내려앉을 때 또한 가볍지 않은 몸이 내는 육질(肉質)의 둔중한 소리가 들린다. 퉁 퉁 퉁, 퍼드덕 퍼드덕…

 

고요한 새벽, 살아있는 살(肉)의 싱싱한 소리. 생기롭고 발랄한 커다란 소리. 그 소리에 내 안의 잠자던 세포들도 ‘퍼드덕’ 함께 깨어 일어난다.

 

2.

 

남산 집에서 첫 겨울을 맞이하던 때, 오리들을 만났다.

 

꽥꽥, 꽤액, 꽥꽥꽥~

 

오리 소리에 깼다. 이른 새벽 담요를 둘둘 말고 어두운 양피못으로 갔다. 어스름한 어둠을 가르고 오리들이 막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내 안에서 소리가 나왔다.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소리.

 

웃음이었다. 오리 몸짓처럼 퉁퉁거리며 껄껄거리며 생짜의 웃음이 올라왔다. 당황스러웠다. 웃고자 하지 않았는데 몸이 저절로 웃다니…

 

그 몸의 소리를 잊을 수 없다. 웃음은 내 몸이 오리의 몸에 공명(共鳴)한 소리였다. 오리의 ‘퍼드득’거리는 생명의 약동이 내 몸을 건드려, 내 몸이 함께 ‘퍼드득’거린 것이다. 여러 개의 종이 놓인 공간에서 종 하나를 치면 다른 종들이 따라 울리는 것처럼 내 몸이 오리의 몸을 따라 울렸다.

 

나는 마치 몸을 살리는 오래된 비밀문서를 전해 받은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타 생명과 공명하기. 그러면 내 생명이 함께 살아난다!’

 

▶ 웃음. <영원의 건축>(크리스토퍼 알렉산더)에 나오는 사진을 보고 필자가 그린 것. ⓒ김혜련

 

3.

 

그런데, 타 생명과의 공명은 아무 때나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이곳에서는 늘 생명을 지닌 존재들, 자연을 만나고 접한다. 하지만 오리를 만났을 때의 그런 몸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오히려 그건 드문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 순간이 언제일까? 그저 아름다운 자연에 감탄하거나, 오래 기억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거나, 사진을 찍는 그런 순간이 아니었다.

 

초등 삼학년 때였다. 어릴 때부터 중이염을 앓았던 아버지의 뇌에 이상이 생겼다. 병원에서 응급 침대에 실려 가는 아버지를 보았다. 평소엔 그리 커 보였던 아버지가 아주 작았다. 작고 구겨진 아버지의 몸은 마치 벌레처럼 보였다. 아버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두려웠다. 엄마를 찾았다. 엄마는 동생을 업고, 병원 긴 의자 모퉁이에 앉아 온몸을 앞뒤로 흔들며 “주여, 주여!!!~” 하나님을 찾고 있었다. 엄마는 다른 세계로 가 있었다. 외로웠다.

 

두려움과 외로움으로 어쩔 줄 모르던 내게 들어온 게 있었다. 유리창이었다. 겨울의 햇살이 비치고 있던 유리창은 병원에서 가장 따뜻하게 느껴지는 사물이었다. 나는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울었다.

 

그 때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넌 울 수도 있구나!”

 

창밖엔 병원의 조그마한 뜰이 있었다. 폭설로 눈이 가득한 뜰에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키가 작은 어린 소나무였다. 나무는 자기 키보다 더 크고 무거워 보이는 눈을 뒤집어쓰고 홀로 서있었다. 내게 말을 건넨 건 그 소나무였다. 어린 소나무가 내게 “넌 울 수 있구나, 난 울 수도 없어. 엄마도 아빠도 없어” 라고 말했다.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두려움과 외로움도 사라졌다.

 

이 일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어떻게 나무가 내게 말을 할까? 어릴 때의 경이로운 의문은 나이가 들면서 풀렸다. 그 소리는 나무가 한 말이 아니라 내 속에서 나온 말이라고. 어린 나무와 나는 깊은 동질감 속에 놓였고, 그래서 마치 나무가 내게 말한 것처럼 들린 거라고. 그 말에 위안을 받은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던 거라고.

 

▶ 오리가 막 날아오르는 모습   ⓒ그림: 김혜련

 

어린 시절의 경험은 지금 내가 여기서 맞이하는 생명에 대한 감수성과 연결되어 있으리라. 내 안에 죽지 않고 살아있는 근원적인 생명의 힘, 그것을 생명의 명랑성이라고 해아 하나… 어떤 순간에도 끝내 생명을 생명으로 살아있게 하는 힘 말이다.

 

지리산에서 장마철이면 거대한 나무들이 급류에 휩쓸려 내려오곤 했다. 그 나무들이 계곡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보면 경이로웠다. 뿌리 뽑힌 나무가 잎을 틔우고, 다음 해 봄에 꽃을 피웠다.

 

어떤 경우에라도 생명을 생명으로 피워내는 힘, 뿌리가 뽑히고 쓰러져 누웠어도 생명이 다할 때까지 생명인 그것. 그것이 생명의 ‘근원적 명랑성’이라고 나는 믿는다. 노숙을 하며 빌어먹어도 한 끼의 밥을 먹게 하는 힘, 따뜻한 햇살 속에서 기지개를 켜고 햇볕을 향해 저절로 몸을 돌리는 그 힘 말이다.(그 힘을 질식시키는 사회야말로 최악의 사회라고 생각한다.)

 

내 몸도 마찬가지다. 거의 사그라진 것 같은 몸 안에 생명의 힘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지니고 있었던, 사그라질 수 없는 근원적 생명의 선성(善性), 명랑성 말이다.


그 힘이 타 생명과 공명할 때, 몸은 스스로 떨고 진동하며 자신이 생명임을 드러낸다. 그러니 다른 생명과 공명할 일이다.

 

속이 비어있는 종이 스스로 울리듯, 비어있는 몸이 떤다. 내가 나에게만 사로잡혀 있을 때 몸은 닫힌다. 피해의식과 분노에 사로잡힐 때 몸은 굳는다. 다만 내가 나를 비워낸 어느 의도치 않은 순간, 나는 열린다. 열려서 타 생명과 하나가 된다. 그럴 때 나는 생명의 근원에 닿는다. 잃어버린 몸의 명랑성을 되찾는다.

 

4.

 

오리가 난다. 큰 오리만큼 통짜배기 느낌을 주는 새는 거의 없다. 말 그대로 ‘통 몸’이다. 그 팽팽한 통 몸이 물을 박차고 오르는 순간, 통 몸의 생명력이 폭발하는 느낌을 준다. 통 몸이 발산하는 통짜배기 힘이 오리 힘의 정체다. 그건 쪼개지기 전의 거대한 통나무가 주는 힘과 같다. 진정 대지의 힘의 현현(顯現)이다.

 

▶ 머위 잎을 뜯으며 즐거워하는 하늘이  ⓒ김혜련


이 힘은 ‘하늘이’가 펄쩍거리며 마당을 마구 뛰어다닐 때도 있다. ‘하늘이’는 무심히 있다가도 갑자기 통통통 솟구치는 걸음으로 뛰어다니거나, 몸을 뒹굴리며 뭘 신나게 물어뜯거나 한다. 자신 안에서 생명이 약동할 때 하는 몸짓이다. 그럴 때 하늘이의 몸은 오동통하고 쫄깃한, 생살의 생기로움으로 가득하다.

 

오리가 날고, 

하늘이는 통통 거리고, 

나는 웃는다.

 

같은 생명의 몸짓이다. 생명의 명랑성, 삶의 고갱이다!  -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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