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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세상 속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생명의 명랑성②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_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1.

 

새벽부터 소리가 온다.

 

“쯔빗 쯔빗 쯔빗” 박새 소리, “봉봉봉 봉 봉봉봉” 후투티 소리, “찌익 찌이익 찍” 직박구리 소리. 알락할미새와 딱새, 참새… 작은 새들이 포르르 포르르 서로 위로 날았다 아래로 날았다 곡예를 한다.

 

▶ 딱새 새끼들. 현관 마루 위에 알 여섯 개를 낳아 부화된 새끼들이다.  ⓒ김혜련

 

봄은 온통 소란스럽다.

 

생명들의 소리. 새들은 짝짓기를 위해 새벽부터 한 해 중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짝을 만난 암수는 집을 짓기 시작한다. 현관 마루 쪽 윗부분에 딱새가 온갖 것들을 물어다 쌓기 시작한다. 가느다란 철사, 지푸라기, 솜, 머리카락, 이끼…

 

이곳에서 봄을 맞이한 첫 해, 새벽에 일찍 눈이 떠졌다.

 

“세상에, 이런 일이!”

 

스스로 놀라웠다. 평생 야행성인 내가 새벽에 눈을 뜨다니! 수 십 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거의 전투였다. 알람 두세 개를 틀고, 마지막 알람 소리에 로봇처럼 몸을 벌떡 꺾어 일으켜 허겁지겁 달려 나가는 나,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내릴 역을 지나치는 나, 고3 담임 때는 꺽꺽 울면서 일어나던 나, 지리산 수행처에서는 여러 사람이 같이 자는 방에서 다들 일어나 대형 청소기를 돌려도 아랑곳없이 자고 있어 놀림거리가 되던 나…

 

그런 내가 알람 하나 없이도 새벽에 눈이 떠졌다. 밖이 너무 궁금해서 더 잘 수가 없었다. 매일매일 새로워지는 마당이, 밭이, 들판이, 산이… 놀라웠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한 기쁨이 가슴에 넘실거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던 새로운 생명들이 계속 나타나는 조화에 어리둥절했다. 그 생명들을 따라 새벽에 어디까지고 걸어 나갔다. 어느 날은 칠불암 꼭대기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어느 날에는 수목원 한복판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모를 내가 있어 그 새벽에 생명들 따라 헤매고 다니는 듯 했다.

 

▶ 둥글레싹. 뾰루지처럼 땅에서 솟아나는 싹들.   ⓒ김혜련

 

2.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간다. 동물들만이 아니다. 땅 속은 더 소란스럽다. 매화나무 아래 흙더미 속에서 무언가 와글거린다. 메마른 흙들이 부슬부슬해지고 봉긋해진다. 살짝 걷어보면 새싹들이 머리에 흙을 이고 고개를 내밀고 있다. 나무 아래뿐이 아니다. 앞뜰 화단이 수런거린다. 구근들이 올라온다. 허리를 숙이니 화단에는 뾰루지처럼 빨간 싹들이 하나, 둘, 셋… 열다섯… 스물… 서른… 마구 솟아나고 있다. 둥굴레 싹, 작약 싹이다!

 

뒤뜰 돌담 주위에 아기 주먹만 한 동그란 것들이 땅 속에서 쑥쑥 솟아나고 있다. 이게 뭐지? 꽃이다! 꽃이 맨주먹을 날리듯 땅에서 불쑥 솟아나고 있다. 머위 꽃 봉우리다.

 

뒷문을 열고 밭으로 나온다. 양지쪽엔 개불알꽃이 벌써 피어 보랏빛 작은 얼굴들을 해를 향해 한껏 내밀고 있다. 냉이, 광대나물, 꽃다지, 질경이, 바랭이, 쇠뜨기… 온갖 풀들이 씩씩하게 올라온다.

 

골목길을 걸어 들판으로 나온다. 들판 가득 어떤 기운들이 피어나고 있다. 여기저기, 저기여기, 딱히 어디라고 짚어말 할 수 없는 온 땅에서 고요한 열기(熱氣)로 솟아나는 생명들. 생명들이 돋아나고 있다! 아지랑이 같고, 안개 같은 모호하고 육중한 느낌이 몸을 채운다. 언어화하기 이전에 이미 몸이 알아차리는 힘.

 

발이 제일 먼저 느낀다. 발밑의 땅이 달라졌다. 며칠 전만해도 딱딱하게 굳어있던 땅이 부드럽다. 마치 이스트에 잘 부풀려 구운 식빵처럼 폭신하다. 산 쪽으로 오르는 오솔길에서 발은 기쁘다. 기쁜 발은 평소에 가지 않았던 먼 곳까지 걷고 또 걸어간다.

 

약수터 가는 길에서 이른 아침 세상에 나온 야생의 동물들을 만난다. 고라니가 뛰고, “다다닥 딱, 다다다다” 딱따구리가 나무 쪼는 소리가 새벽 공기를 연다.

 

▶ 봄을 알리는 산수유 꽃.     ⓒ김혜련

 

3.

 

“봄이 오니 가슴이 스멀스멀 가려워요.”

“그래, 뭔지 모르지만 기뻐. 기쁜 것이 올라 와~”

“어디론가 하염없이 떠나고 싶어요”

 

낮에 장보러 나갔다가 만난 아줌마들과 서로 미소를 띠고 “그래그래, 맞아 맞아” 하며 맞장구를 친다. ‘뭔지 모르지만 기쁜 것’ 그것이 가슴에서 올라온다고 늙은 얼굴이나 젊은 얼굴이나 함께 웃는다.

 

경주의 봄은 더 시끄럽다. 산으로 들로 사람들이 넘친다. 주말엔 아예 집 밖엘 나가지 않는다. 울긋불긋한 등산복 차림의 남녀노소로 넘쳐난다. 칠불암 가는 길은 우리 동네를 거쳐 가니 사람들이 무리 져 가는 모습을 본다. 밭에서 일하다 보면 “아줌마, 칠불암 가는 길이 어디에요?” 큰 소리로 묻는 목소리가 그 어떤 계절보다 많은 때가 봄이다. 수목원 입구는 주차장이 모자라 길에 세워둔 차들 때문에 다른 차가 다니기 어려워진다.

 

봄이 되면 다들 몰려나온다. 왜들 이리 몰려다닐까? 궁금해지다가 문득,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걸 안다. 봄의 생명 중 어느 것 하나 가만히 있는 것이 있던가? 사람도 생명이긴 마찬가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아파트 안에 갇혀서 봄을 나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다. 생명 하나 저절로 자라지 못하는 공간 아닌가? 그곳에서 내 생명이 갑갑해지는 건 당연한 일. 그러니 밖으로 나돌아 다닐 수밖에!

 

“우라질, 날씨가 왜 이리 좋은 거야?”

 

도시에서 직장 다니던 때의 봄날, 난 이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봄이 되면 출근하는 버스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이 버스를 타고 직장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다. 햇살이 유난히 좋은 날은 학교 교문을 들어서면서 저절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아이들은 더 했다. 아침에 세수 하면서 늘 운다고 하는 아이, 창문 밖으로 뛰어 내리고 싶다는 아이, 학교 담장을 넘어 달아나고 싶다는 아이, 어딘가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다는 아이…

 

당연했다. 봄의 생명을 가두어두니, 생명이 몸부림쳤다. 거역할 수 없는 생명의 약동이었다.

 

▶ 매화나무 아래 흙더미를 살짝 걷어보면 새싹들이 머리에 흙을 이고 고개를 내민다.  ⓒ김혜련

 

4.

 

약동하는 생명의 힘은 언제나 내 안과 밖에 있어왔다. 그런데, 나는 왜 이제야 생명의 힘을 절절하게 느끼는 걸까? 내가 생명이라는 사실을 명명백백히 알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다른 생명과 공명하며 기뻐하는 걸까?

 

지리산의 자연은 아름다웠다. 봄이 되면 멀리 있던 산이 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하룻밤 자고 나면 한 발짝, 두 밤 자고 나면 또 한 발짝… 그러다 어느 날 문득 한 뼘 앞까지 다가와 “메롱~” 하면서 웃었다. 마치 어릴 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는 듯 했다. 눈을 감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고 돌아서면 어느 새 한 발 짝씩 몰래 다가왔던 동무들처럼 산이 매일 한 발짝씩 다가왔다. 거대한 먼 산이 며칠 만에 온통 연두 빛으로 부풀어 올라 눈앞에 다가오면 봄이 온 거였다.

 

그 때 자연의 아름다움엔 어떤 결핍과 초조가 있었다. 자연은 경이로웠지만, 나는 자연에 속한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연과 대비되었다. 저토록 완벽한 존재와 불완전한 나, 아직도 자신을 찾지 못한 나… 자연의 아름다움이 절실할수록 나의 결핍은 더 초라하게 드러났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자연과 분리되지 않는다. 봄의 자연이 불러일으킨 생명의 축제 속에 나도 있다. 그저 바라보고 구경하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그 안에 있는 존재가 되어 있다.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늘 ‘저 너머’를 바라보다가 지금 여기, ‘이 세상’으로 온 거다. 비로소 세상 속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이 보인다. 하찮게 여겨, 보이지도 않던 것들이 보인다. 작고 여린, 세세한 생명들이 보이고, 그것들이 작지 않은 생명임이 보인다. 봄의 터져 나오는 기쁨에 온 몸을 담글 수 있어졌다. 나 또한 그 숱한 생명의 하나로 이 지상에 함께 존재한다는 연대감에 깊이 안도할 수 있어진 것이다.

 

자동차를 타고 스쳐지나가듯 살아가던 세상을 다르게 살고 있다. 집을 가꾸고 마당에 꽃과 나무를 심고 밭에 채소를 기르며 이곳에 ‘머물러’ 살고 있다. 세상에 진득하게 몸을 맞대고 살아가는 이가 느끼는 삶에 대한 신뢰, 생명에 대한 기쁨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아간다.

 

▶ 머위꽃 봉우리. 땅 속에서 작은 주먹이 올라온다!   ⓒ김혜련

 

5.

 

새벽부터 소란스런 새들과 와글거리는 마당의 새싹들, 밭의 풀들, 들판의 생명들, 뭔가 기쁜 것이 스멀거린다는 아줌마들, 산으로 들로 떼 지어 다니는 사람들… 모두 다 봄의 생명의 약동을 자신들 속에서 피워내는 존재들이다.

 

봄이다, 바로 이 세상 속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이다!  _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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