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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발견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집의 깊이, 집의 아늑함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 빗소리 듣는 새벽
새벽에 비오는 소리를 듣는다. 소리라고 하기에는 지극히 고요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어떤 기척. 레이스 천을 뜨듯, 거미줄이 이어지듯 미세하게 이어지는 소리. 조용히 속삭이고 가만히 간질이며 하늘과 땅 사이에 길고 부드러운 발을 드리듯 새벽비가 온다.
고요한 빗소리가 주는 아늑함. 밤에 지핀 아궁이불이 온기를 가득 머금고 있는 따뜻한 이불 밑에서 새벽 빗소리를 듣는 일은 세상에 대한 깊은 안심, 안도의 기쁨이다.
비오는 날의 집은 마치 오래된 원시의 움막같이 따뜻하고 정겹다. 어둑해진 방 안은 어둠으로 오히려 더 뚜렷해진 질감을 드러낸다. 서까래 사이로 드러난 흙 천장은 비오는 날이면 마치 습기가 배인 듯 더 붉어진다. 마루 쪽으로 난 띠살문에는 밝은 날과는 또 다른, 한풀 꺾여 깊어진 빛이 어둔 방을 비춘다. 십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집은 여전히 새롭다.
집이 주는 아늑함, 따뜻함, 평화로움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이 방의 느낌은 왜 이리 깊을까? 왜 이리 다정할까? 집이 백년 쯤 되면 그 만큼의 시간이 배어 있어서 그럴까?
▶ 서까래, 대들보, 그리고 방과 방의 깊이에서 집의 깊이를 느낀다. ⓒ김혜련
# 집이 주는 푸근함과 편안함
집이 주는 느낌은 공간의 비례나 적정한 공간 분할에서 온다. 이를테면 한옥의 낮은 천장, 작은 방, 홑집의 방과 방의 길이로의 연결 등이 주는 아늑함과 깊이감이 있다. 가장 직접적인 느낌은 건축 재료에서 온다.
이 집의 주재료는 나무와 흙, 한지다. 흙이 주는 따뜻함, 부드러움, 오래된 나무들이 주는 단단한 편안함, 그리고 한지라는 종이의 질감. 재료들 고유의 성격이 이 집의 느낌의 원천이다.
집의 기초인 기둥, 도리, 서까래, 대들보 등은 나무로 되어 있다. 이 나무들은 백년 쯤 된 나무들이다. 오래된 나무는 검고 윤이 난다. 만지면 거친 듯하면서, 반지르르하고 따뜻하다. 새롭고 화려한 나무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움, 겹겹이 쌓인 시간의 고요한 축적이다.
거대한 물고기 뼈 화석처럼 검고 구불구불한 서까래, 곡선의 풍만한 배를 드러내는 대들보는 집의 부드러움이 어디서 오는지 알 게 한다. 바슐라르는 “곡선의 우아함, 거주에의 초대다.” 라고 말한다. 그렇다. 이 집의 우아함은 곡선에서 온다. 곡선은 부드럽고 따뜻하다.
그렇다고 해서 집 전체가 곡선이 된다면 곡선의 우아함은 곧 번잡과 무질서가 될 것이다. 곧고 강건한 기둥과 도리들이 직선의 강건함으로 서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직선과 곡선, 단단함과 부드러움의 조화로 집은 편안하고 아름답다.
흙으로 된 천장은 밝고 푸근하다. 흙벽 또한 연하고 따뜻하다. 흙은 밥처럼 무미(無味)하다. 평생 밥을 먹어도 밥에 질리지 않는 이유가 밥에 특별한 맛이 없기 때문이듯, 흙 또한 그렇다. 결코 지루해지거나 지치지 않는다. 흙이 주는 신뢰다.
흙으로 된 집에서는 몸이 편안하다. 아파트나 현대식 재료를 쓴 집에서 오래 있으면 몸이 갑갑해지는 것과 다르게 몸이 가볍고 편안한 것은 흙이라는 재료의 특성에서 온다.
▶ 한지 바른 창으로 들어오는 반투명의 빛 ⓒ김혜련
한지의 미묘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한지의 특성을 표현하기에는 내 언어가 우둔하기만하다. 우선 그 빛깔이 그렇다. 그냥 흰빛이라고 하기엔 한참 모자라고, 미색이라고 해도 정확하지 않다. 한지를 보면서 흰 빛 하나에 얼마나 다양한 층위가 있는지 알게 된다. 염색하기 전 비단의 빛깔? 우유 빛이 섞인 부드러운 흰 빛? 단지 유백색이라고 하기에는 모자라는 색의 깊은 층이 있다. 고수(高手)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귀한 흰색’이고 ‘젖빛’이다. (황인범 목수는 <작은 한옥 한 채를 짓다>에서 한지 빛을 ‘고귀한 흰색’으로, <아름지기의 한옥 짓는 이야기>의 저자 정민자는 ‘젖빛’으로 표현했다.)
게다가 그 질감에 이르면 더욱 말이 모자란다. 한지는 평면이 아니다. 평면인 종이가 평면이 아니다. 한지가 평면이 아닌 것은 다른 종이와 비교해보면 알게 된다. 두께는 어떤 종이보다 얇지만 그 질감은 어떤 종이와도 비교할 수 없게 풍부하다.
사진과 그림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같은 사물이라도 사진과 그림은 다르다. 여러 측면에서 그러하지만 질감의 차이가 있다. 분명 같은 평면이지만 그림은 사진이 지니지 못한 깊이와 두께를 갖는다. 시각적으로 평면으로 보이나 실제로 평면이 아닌 것이다. 한지도 그렇다. 시각적으로 평면이지만 평면이 아니다. 수백 수천 겹의 섬유질이 얼키고 설키고… 그런 과정을 거쳐 한지 한 장이 만들어진다.
시각적으로 평면인데, 평면으로 느끼지 않는다. 이게 무슨 말인가? 오래 바라보다보니 그렇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해야 하나. 한지의 느낌은 촉각적 차이는 분명하지만, 시각적으로도 그 질감의 층위가 느껴진다. 종이 한 장이 한 없이 깊고 풍요로운 느낌을 준다는 사실을 나는 한지로 된 벽과 문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가 깨쳤다. 무슨 선(禪)적 깨우침처럼!
실제로 한지는 그토록 얇은데도 불구하고 잘 찢어지지 않는다. 오래된 문에 붙여놓은 한지는 그 오랜 시간 비바람에 노출되어도 찢기지 않는다. 한지가 쉽게 찢어지는 건 햇빛에 바랬을 때 그렇다. 마치 무명천이 오래 햇빛에 바래면 날깃날깃 ‘해지는’ 것처럼 한지도 그렇다. 찢어지기보다는 ‘바랜’다. 찢어지는 게 아니라 ‘해어진’다.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하고 연약하지만 엮어 놓으면 동아줄처럼 질기고 질기다.
한지가 주는 느낌의 정점은 한지를 바른 문에 빛이 들어올 때다. 실크벽지는 빛을 반사하지만 한지는 빛을 머금고 있다. 빛을 ‘반사’하는 것과 ‘머금는’ 것은 느낌의 차이가 크다. 실크벽지는 그저 매끄러운 느낌이다. 반면 빛을 은은하게 흡수해서 머금고 있는 한지는 무언가 신성하고 따뜻한 것에 자신이 담겨 있는 느낌을 준다. 남쪽 창에 한지가 머금은, 은은한 반투명의 빛이 들어올 때 몸은 알 수 없는 깊은 느낌으로 떨린다.
▶ 문 손잡이. 철물이 주는 단단함 ⓒ김혜련
문고리와 걸쇠들은 철물로 되어 있다. 작고 소소한 부분이지만 철이 주는 강인함이 집 전체의 부드러움에 한 점 포인트처럼 단단하게 찍힌다.
# 감각한다는 것
집의 재료들이 주는 아름다움은 물질성이 주는 깊은 미(美)적 체험이다. 살아있는 물질은 감각을 깨운다. 나는 오래도록 촉각을 상실하고 살아왔다. 도시에서의 대부분의 경험은 시각에 편중되어 있다. 아파트에서 내가 집과 접촉하는 일은 문손잡이 잡는 것, 전등 스위치 켜고 끄고 하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부드러우면서 단단한 벽, 거칠지만 따뜻한 기둥, 등을 대고 누우면 바삭하게 마른 견고한 방바닥. 등이 곧게 펴지고, 발이 사뿐하다. 문지방을 넘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나의 오감은 깨어난다. 감각한다는 것은 사물과 구체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구체적 만남은 삶을 견고하고 풍성하게 한다.
# 공간의 자기 표정
집의 깊이와 아름다움은 재료 뿐 아니라 구조 자체에서도 온다. 한옥은 평면적 구성이 아니다. 나무와 나무가 엮이는 방식, 서까래와 대들보의 구조가 입체적이다. 또한 공간의 구조가 비(非)균질적이다. 전통의 공간은 공간을 붙여나가는 방식으로 공간을 구성한다. 전혀 이질적인 공간을 붙여나가는 식이다. 그럴 때 공간에는 입체감과 위계성이 생긴다.
각 공간은 자기 표정이 있다. 방마다 개성이 있고, 존재의 결이 느껴진다. 안방이 지닌 표정과 건넌방이 지닌 표정은 완전히 다르다. 무표정한 평면의 공간에 필요한 장식이나 꾸밈이 이 공간에는 필요 없다. 열한 평 밖에 안 되는 작은 집에서 느껴지는 그윽한 깊이는 바로 이 비균질적인 입체감, 위계성에서 온다.
▶ 흙벽과 대들보 ⓒ김혜련
현재 우리가 주로 거주하는 주거 공간, 특히 아파트는 공간 구성이 평면적이다. 평면의 동일한 공간을 잘라나간, 균질의 공간이다. 그런 공간 구성은 효율성은 있어도 위계성은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면 공간에서 깊이감이나 개성적인 표정이 생겨나지 않는다. 공간의 표정이 없으면 이 공간이 저 공간 같고, 저 공간이 이 공간 같아진다. 그 공간에 있는 몸 또한 평면적이 된다. 답답하고 납작해진다.
# 오래된 집, 비오는 날의 풍경
나는 낡고 오래된 집에 살면서 공간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안다. 평생 집에서 살았지만 집이 없었던 내게 이 집은 집이 무언지 ‘겪게’ 한다. 공간과 내가 따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공간이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 공간과 나는 결국 하나라는 것을 삶으로 알게 한다. 공간을 인식하지 못하는 삶은, 몸 없는 정신처럼이나 허공에 뜬 삶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비오는 소리를 듣는다. 한 없이 가슴이 둥글어지는 소리. 가슴이 젖는다. 오래된 흙 담 벽이 습기에 저절로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맺혀있던 아픈 것들이 빗소리에 스르르 무너져 내린다. 젖은 가슴은 둥글게 열린다. 봄비 내리는 날, 오래된 집에서 온 몸과 영혼이 축축이 젖어, 나 자신이 비오는 날의 풍경이 된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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