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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轉換) 아홉 번의 해가 바뀌었다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연재 전반부를 끝내며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연재.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feminist journal ILDA
‘이 시대 많은 이들이 함께 겪는 모습일지도 몰라’
글의 전반부가 끝났다. 여기서 내가 한 일은 ‘일상으로 내려오기까지의 과정’을 쓴 것이다.
처음 부분에는 ‘집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과정을 축약적으로 그렸다. 그리고 살아갈 지역과 마을, 집을 찾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썼다. 집을 고치고, 첫날밤을 맞이하는 이야기를 쓸 때는 스스로 고양됐다. 그러나 집을 지었다고 해서, 내 우주를 만들었다고 해서 삶이 끝난 건 아니었다. 새로운 우주에서 살아가야 할 나는 과거에 구성된 나였다. 그 나를 맞이하고 받아들이는 쓰거운 시간들의 이야기를 썼다. 밥과 몸의 역사를 돌아보는 힘든 시간들을 가지기도 했다.
그냥 일상적 삶을 쓸 수도 있는데 ‘일상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을 쓴 것은, 내가 글을 쓰는 이유와 관련이 있다. 나는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삶’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에게 계속 물어왔다. 내 삶이 ‘귀촌’이라는 형태에 속하는 것인가? 자연으로 돌아가기? 아니면 ‘일상의 재발견’인가? 꼭 그렇진 않았다. 그런 개념으로만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건 일종의 ‘전환’(轉換)이었다. 삶의 전환. 내 개인의 역사 속에서 이 전환의 의미는 무엇인가? ‘전환하지 않으면 망(亡)한다’는 절박감이 있었다. 단순히 사는 지역을 옮기는 문제가 아니라 삶의 태도와 양식을 변화시키는 일이었다.
어떻게 살아왔든 대부분의 사람은 중년기에 자기 부정과 절망에 부딪힌다. 그 절망을 어떻게 살아가는가는 또 다른 이야기지만, 삶을 통합하려면 그동안 삶에서 소외시켰던 부분을 살아가야 한다. 내 경우는 가장 근원적인 것을 소외시켰다. 밥, 집, 몸, 생명… 내게는 숨 쉬기처럼 당연한 일상이 없었다는 자각. 평생 밥을 먹었지만 ‘밥’이 없고, 평생 몸을 지니고 살았지만 ‘몸’이 없고, 평생 집에서 살았지만 ‘집’이 없다는 자각이었다.
이 자각은 자기 탐구의 끝에서 왔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고 했고, 결핍 없는 충만한 자신을 만나고 싶었다. 평생의 방랑과 추구, 그 끝에 온 자각이었다. 온갖 관념의 세계를 헤매고 방랑한 끝에 만난 게 ‘아무 것도 아닌’ 세계였다는 역설. 그 역설이 지극히 개인적인 일일 뿐만 아니라, 이유야 어쨌든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겪는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직관. 그런 것이 글을 시작하게 했다.
그러니 내가 쓰고자 하는 것은 관념에서 구체적인 일상으로 내려오는 ‘과정’이다. 그 과정 속에서 겪은 지루함과 고됨, 권태로움, 자신과의 싸움, 그러면서 조금씩 쌓여간 어떤 삶의 견고함, 단순한 기쁨, 심미적 아름다움, 고요한 시간….
▶ 마을 양피못 겨울 풍경 ⓒ김혜련
반복과 시행착오 속에, 아홉 번의 해가 바뀌다
전환은 그저 오지 않는다. 휴대폰이나 세탁기를 바꾸는 게 아니라 삶을 바꾸는 일은 지난한 과정이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며 살아온 삶에서 실패하거나 절망한, 참담한 시간을 겪고, 전환은 온다. 그것도 아주 서서히, 더디게… ‘아차’하는 순간 눌렸던 스프링처럼 과거의 몸과 마음으로 되돌아가 있는 자신을 돌이켜 세우는 무수한 반복과 시행착오 속에서. 정직하게 시간을 들인 만큼, 몸을 움직인 만큼, 꼭 그만큼씩.
처음 삶을 바꿨을 때, 그 때는 삶이 온통 시적 감흥으로 넘쳤다. 모든 것이 시였고, 신선하고 아름다웠다. 그 때 나는 내가 발견한 ‘새로운’ 삶에 대해 말하고 싶은 충동으로 넘쳤다.
“삶을 바꿔 봐, 그러면 달라져~”
그런 나를 눌러 앉힌 것이 있다. 삶은, 일상은 그런 시적 감흥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익혀온 고단한 시간들이었다. 내가 새롭게 만난 세상에 대해 말하고 싶은 충동은 과거라는 습관이 하는 일이었다. ‘그런’ 나를 바꾸고자 들어온 삶에서 나는 ‘그런’ 나를 계속 만났다.
뭐든 삼 년은 해봐야 한다. 시적인 감흥이 사라지고 비로소 산문적 삶을 살게 될 때, 그 지루한 반복과 꾸준함으로 무언가가 바뀌었다면 그 땐 스스로를 믿어도 되지 않을까.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뭔가 떠들어대고 싶은 그 충동을 누르고, 겸허히 경험하고 꾸준히 배우자고. 우리에게 배움을 주거나 나를 변화시키는 드문 언어가 있다면, 오랜 반복의 경험에서 나오는, 삶의 두께가 고목처럼 켜켜이 쌓인, 그런 언어가 아니더냐고. 좋은 삶을 살아서 저절로 나오는 좋은 말을 하라고.
자신에게 한 약속을 지키며 살다보니, 내가 진짜 바뀌어 버렸는지, 언젠가부터 별로 떠들어대고 싶은 게 없어졌다. 새로 시작한 삶이 지루하거나 시큰둥해져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나를 추동하던 과거의 습관 하나가 떨어져 나간 거였다. 습관만큼 질기게 우리를 부여잡는 게 또 어디 있으랴. 과거라는 습관은 무시무시한 권력을 지니고 나를 휘둘러댄다.
그러니 지금 내가 글을 쓰는 일은 과거와는 다른 차원의 일이 되었다. 아홉 번의 해가 바뀌면서 나는 처음 이 삶을 살기 시작했을 때의 ‘나’가 상상할 수 없는 ‘나’가 되었다. 이렇게 말하니 뭐 거창한 것 같은데, 오히려 참 심심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 심심하게 사는 것, 별 볼 일 없이 살아도 괜찮은 내가 되었다고 할까.
빛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도 무언가를 하는 까닭
나는 우리 시대가 빛도 보이지 않는 긴 터널 속을 지나고 있다고 하는, 시대 진단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다. 그리고 빛이 보이지 않는 이 속에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나의 생각이 옳아서, 또는 내가 하는 일이 세상의 한줌 희망의 빛이 되리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세상은 서서히 망해갈 것이고, 망해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당할 것인지, 인간성을 상실해갈 것인지, 그 속에서 최소한의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서 나의 일을 한다”고 하는 임혜지(재독 건축가이자 작가) 같은 사람의 말에 공감한다.
“우리는 싸웠다, 그리고 졌다. 싸우고서 졌으니 다행이지, 싸우지도 못하고 저 송전선들이 들어오는 걸 보게 됐다면 어쩔 뻔 했냐!”는 밀양 ‘할매’들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졌지만(질 걸 알지만)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애쓰는 자들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나의 글쓰기도 그런 일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내게 쌓인 삶, 새로운 성장의 기록을 앞두고
후반기의 글은 이 집에서 살아온 이야기다. 근 십년을 살면서 내게 쌓인 삶에 관한 이야기다. 집을 중심점으로 해서 새롭게 배우고 겪은, 새로운 성장기라고 해야 하나? 집에서 만나고, 이루어간 밥과 몸과 자연과 생명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금 여기의 삶이다.
야마오 산세이의 <여기에 사는 즐거움> 서두에서 그의 아내 하루미씨는 “‘여기에 사는 즐거움’이란 ‘여기에 사는 슬픔’이자 ‘여기에 사는 괴로움’인 동시에 ‘여기에 사는 기쁨’이자 그것들을 넘어서 ‘모든 것은 즐거움’이라고 하는 삶에 대한 찬가”라고 했다.
그렇다. 여기에 사는 슬픔, 괴로움, 기쁨… 그 모두를 감싸고 있는 삶의 ‘근원적 명랑성’에 대한 찬가이다.
‘따로-같이’ 살며 배우는 관계, M과 함께
중요한 사실 하나를 덧붙인다. 만난 사람이 있다. M이다. 삶의 절실한 흐름이 만남을 가져다 준 것일까? 나는 그와 ‘따로-함께’ 살며, 배운다.
그를 통해 나는 일상이 어떻게 성화(聖化)될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 놀라운 삶의 경지를 한 존재의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겪게 되었다. 독특하고 희귀한 경험이다.
매일매일 밥하는, 반복적이고 때로는 괴로운 일이 지극한 아름다움이 되고, 하루 종일 나무를 다듬고 대패질을 하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이 어떻게 나비처럼 가볍고 희열에 찬 일이 되는지 알게 되었다.
지루한 일상이 빛이 되어가는 과정…. 그 투명하고 가볍고 고귀한 세계를 들여다보고, 조금씩 따라하다 보니 나 자신도 그렇게 닮아가는 시간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내 이야기 도처에 그의 숨결과 흔적이 함께 할 것이다. 그의 언어와 내 언어가 섞이고, 그의 생각을 내 생각인양 빌려 오기도 할 것이다. 일부러 그러지는 않겠지만, 삶의 물결은 이미 은연중에 젖어 있을 테니 말이다. (김혜련)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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