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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학대한 몸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내 몸의 역사②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Feminist Journal ILDA

 

이십대 나의 양식 ‘빈속에 깡 소주’

 

“소주 먹고 죽자~”

 

빈속에 깡 술을 들이붓고, 줄 담배를 피운다. 아침에 쓰린 위를 부여잡고 변기로 기어간다. 눈물, 콧물 다 흘리며 토한다. 죽을 것 같다.

 

“하느님, 한 번만 구해주시면 다시는 술 안 마실게요.”

 

저녁에 또 마신다. 소주, 맥주, 막걸리… 되는대로 마신다. 아무도 날 건드리지 못한다. 아무데나 쓰러져서 운다.

 

돌봄을 받아보지 못한 몸은 자신을 돌볼 줄 모른다. 학대받은 몸은 자신을 학대한다. 이십대부터 지속된 내 몸에 대한 학대와 방치는 내가 대접받은 대로 내 몸을 대접하는, 익숙한 방식이었다.

 

“계속 그렇게 술 마시고 밥을 대충 먹다간 위가 다 헐고 위하수가 될 겁니다.”

 

위가 아파 병원에 가니 의사가 한 말이다. ‘위하수가 뭐냐’고 하니 위가 아래로 처지는 현상이란다. 그렇게 되면 어찌 되느냐는 내 물음에 상세하게 대답한다. 위가 무력해져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다며 이야기한 증상들은 끔찍하다. 그건 살아도 죽은 것과 다름없다.

 

밥상에서 언제 화난 엄마의 주먹이 날아올지 모르니 밥 먹는 자리는 불안했다. 긴장 속에서 재빨리 먹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게다가 고3 일 년 내내 밥을 물에 말아서 ‘마셔버린’ 습관은 그냥 몸에 배어 버렸다. 늘 대충 먹고, 허겁지겁 먹고 살았다. 아니, 먹는 일 자체를 경멸했다. ‘빈속에 깡 소주’ 이십대 나의 양식이었다.

 

삼십대 ‘이혼 후 4-5년’ 한계에 다다른 몸

 

“탈진 상태입니다. 어떻게 몸을 이 지경이 되도록 놔뒀나요?”

 

아침에 깨어나 일어나려하자 몸이 일으켜지지 않는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다. 학교를 결근하고 병원에 가니 의사는 비난인지 야단인지 모를 말을 한다.


‘삼십대 초반에 이혼을 겪었다. 어린 자식과 헤어졌다. 직업을 가지고 여성학과 석사 과정을 마쳤다.’

 

이 간단한 몇 줄의 서술에는 몸이 겪은 과도하고 처참한 시련이 숨어 있다.

 

이혼은 정신과 몸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삶의 주요 사건과 스트레스 지수를 재는 지표에 따르면 배우자와의 사별 다음으로 큰 스트레스다.(배우자 사망 100, 이혼 73, 별거 65, 투옥 63, 가까운 가족의 사망 63, 본인의 상해 또는 질병 55. -크리스티나 베른트 <번 아웃>에서)

 

이혼까지 가는 과정의 숱한 갈등을 몸으로 다 견뎌내야 했다. 한 여름에 윗니 아랫니가 덜덜 부딪히며, 몸은 한기(寒氣)에 떨었다.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등이 무겁고 아파서 잘 펴지지 않았다. 술에 취해 쓰러졌고, 어깨 인대를 다쳤다.

 

아이와 헤어진 고통은 환청으로 왔다. 밤이나 낮이나, 길거리에서든 집안에서든, 어디에서나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환한 대낮에 저절로 무릎이 꺾여 지하도 계단에 주저앉아 통곡이 터져 나왔다.

 

▶ 폭풍우에 무너진 담처럼 무너진 몸  ⓒ 김혜련

 

직장을 다니면서 여성학과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입학하고 난 뒤는 거의 투쟁이었다.

 

“제겐 그 두 가지 모두 꼭 필요해요. 직업은 밥줄이고, 여성학은 정신 줄이에요. 어느 것 하나라도 놓으면 살 수가 없어요!”

 

여성학과 면접 때 선생님 한 분이 말했다. 이 대학원의 여성학과 역사상, 직업을 가지고 공부한 사람은 없었다고. 그만큼 공부가 힘들다, 직업을 가지고 공부하려는 건 너무 많은 것을 가지려하는 게 아니냐고.

 

그 때 나는 절박하게 외쳤다. 몸의 줄을 놓으면 굶어 죽고, 정신의 줄을 놓으면 ‘미친년’이 된다. 난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 어느 것도 놓을 수 없는 절박함, 그게 당시의 내 상황이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오전으로 당겨 하고 대학원으로 달려가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하는 일은 몸에 과부하가 되었다. 밤에는 늘 몸이 퉁퉁 부었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마른 옥수수수염처럼 바스스 부스러졌다. 생리 혈은 붉은 빛이 아니라 검은 빛이었다. 혈액은 초콜릿처럼 진득하고 딱딱했다. 그나마 불규칙했다. 자주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었다.

 

여성학이 주는 정신의 빛은 날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힘이었다.

 

“너는 왜 다른 여자들과 다르니?”

 

남편이 툭하면 하던 말이었다. 처음엔 반발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그 말에 주눅이 들었다. 내가 비정상인가? 세상의 다른 여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사는가?

 

여성학은 그동안 내가 겪은 고통들, 스스로 의심하며 괴로워했던 질문들에 답했다. 나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한 많은 것들이 사회구조적인 문제고, 내가 비정상이 아니라 정상이라는 것을 알려줬다. 그것도 ‘학문’의 이름으로!!! 나는 모호하고 찾을 길 없던 나를 찾았다. ‘없는 나’에서 ‘있는 나’가 된 것이었다.

 

하지만 몸은 아니었다. 몸은 탈진 상태로 갔다. 정신과 몸의 극도의 부조화. 잘못 산 삶의 대가를 몸이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이혼에서부터 여성학 석사과정을 마치는 4-5년의 시간 동안 난 평생 쓸 에너지를 다 쓴 듯 했다. 평상적인 상태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한 것이다. 마치 아이가 차바퀴에 깔리자 엄마가 순간적으로 차를 들어 올렸다는 일화처럼, 극단의 상황에서 나오는 농축된 생명의 에너지를 이 시기에 썼다. 내가 ‘사람’이 아니라는 생경하고도 처참한 인식이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몸은 온통 교감신경만이 살아 빨간 불을 켜고 “삐요, 삐요~”달렸다. 순간이 아니라 몇 달이 아니라 몇 년이 되는 시간 동안 있었던 일이었다.

 

어릴 때 엄마 여름 고쟁이 고무줄을 본 기억이 있다. 여기 저기 기운 베 고쟁이의 고무줄은 낡고 낡아 늘어져 있었다. 고무줄 특유의 탄력을 잃고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고 그냥 축 쳐진 고무줄. 그 모습은 어린 눈에도 생경했다. ‘고무줄이 죽었네.’ 그렇게 생각했다. 그 몇 년의 시간을 보낸 내 몸이 그러했다.

 

몸의 적응력은 놀랍다. 아침에 몸살이 있어 도저히 출근을 못할 것 같이 아파도 출근을 하면 몸은 하루를 견디어 주었다. 술독으로 뒤집혀 쓰라린 위는 ‘위청수’ 한 병으로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제대로 밥을 못 먹어도, 며칠 동안 밤을 새워도 몸은 충실한 집사처럼 적응하고 또 적응했다. 그러나 한계점에 이르자 늘어난 고무줄처럼 축 쳐져 다시는 회복되지 않았다.

 

▶ 황폐한 땅처럼, 피폐하고 착취당한 몸.  ⓒ 김혜련

 

그 후 십여 년, 지친 몸을 혹사시키다

 

여성학과 졸업 이후 직장을 그만 둘 때까지 십여 년의 세월동안 지친 몸을 다시 혹사하며 살았다. 아들이 초등학교 때 학교에 적응을 잘 못해서 일산에 있는 자유 학교로 옮겼다. 일산에서 서울에 있는 직장까지 출퇴근 시간은 왕복 3시간쯤 됐다. 7년쯤 그 생활을 하고 나니 몸은 배터리가 다 나가버린 건전지처럼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았다. (찰스 몽고메리는 <우리는 도시에서 행복한가>에서 출퇴근 시간이 3시간 이상이면 삶이 완전히 망가진다고 이야기한다.)

 

게다가 교사로 사는 일이 점점 불행해진 나는, 무언가 다른 일을 계속 만들었다. 여기저기 글을 쓰고 강연을 다니고, 모임을 하고… 과도하게 몸을 쓰는 일이 아예 습관이 되어 버린 듯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뭔가 불안하고 초조했다. (아동기부터 높은 수치의 스트레스를 습관적으로 접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스트레스의 부재가 오히려 권태감이나 자신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불러 일으켜 불안감을 조성한다. -게이버 메이트 <몸이 아니라고 말할 때>에서)

 

드디어는 무엇을 해도 즐겁지 않은, 아무리 즐거운 상황에서도 ‘즐거운데 짜증이 나는’ 기묘한 상태에 놓였다. 그 짜증이 몸이 ‘제발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신호라는 것은 추호도 몰랐다.

 

자기 학대의 역사

 

이십대 이후 ‘없는’ 내가 ‘있는’ 나를 찾아가는 과정은 치열했다. 그러나 그 과정은 학대받아, 무(無)가 되어버린 몸을 배려하고 살리는 방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몸을 피폐시키고, 착취하는 치열함이었다.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몸을 ‘배려하고’ ‘살리는’ 게 뭔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개념조차 없었다.

 

나는 ‘내 몸’을 다 갉아먹고 나서야 ‘나’를 찾았다. 어찌해 볼 수 없는, 자기 학대의 역사였다. 마침내 나는 몸이 죽어가는 신호를 보내도 알아듣지 못하는 일종의 정신착란, 마비환자가 되어 있었다.  (김혜련)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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