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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에 배어있는 뜨거운 여성운동의 숨결

페미니스트 뉴욕에 가다④ 뉴욕의 근교 도시 보스턴으로 (주연)  feminist journal ILDA



보스턴은 뉴욕 여행을 하면서 당일 혹은 1박 2일 일정으로 다녀오기 좋은 인근 도시 중 하나다. 뉴욕에서 버스를 타고 가면 약 네 시간 정도 소요되는데, 썩 가깝다고 할 순 없지만 하버드 대학, MIT 등이 위치하고 있고 ‘보스턴 학살’,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났던 탓에 독립혁명에도 큰 영향을 미친 도시라, 미국 역사의 단면을 볼 수 있는 매력적인 도시다.

 

보통 보스턴 여행은 보스턴을 돌아보는 방법 중 하나인 ‘프리덤 트레일’을 따라 보스턴의 역사적 장소를 연결하는 도로 위의 빨간 선으로 약 4km를 걷는 것을 추천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당일 일정으로 보스턴에 갔다 왔기 때문에 많은 곳을 볼 시간은 없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콘서트에 가야하는 일정이었기 때문에 ‘프리덤 트레일’의 일부인 보스턴 커먼 파크 주변과 퀸시 마켓 주변을 돌아보고, 하버드 대학을 둘러본 정도여서 많은 경험을 하지는 못했다.

 

비록 일부를 보긴 했지만 ‘프리덤 트레일’은 미국 역사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흥미로운 코스일 것이다. 역사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뉴욕과 다른 보스턴의 분위기를 접하면서 주요 명소를 천천히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코스가 될 수 있다.


▶ 보스턴의 역사적 장소를 연결하는 '프리덤 트레일' 코스 중 하나인 파크 스트리트 교회(Park Street Church) ⓒ주연


미국 여성운동과 여성학 역사에 큰 획을 그은 곳

보스턴은 앞서 말했듯이 미국 역사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건들이 있었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뉴욕과 함께 여성운동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기도 하다.

 

1960년대는 반전 운동과 함께, 전쟁으로 인해 일터에 나가기 시작한(남성들의 베트남전 참전으로 인한 인력 부재를 여성들이 메우기 시작했다) 많은 여성들이 일자리에서 성차별, 임금차별을 경험하게 되고 그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일어난 여성해방운동이 태동되던 시점이었다. 보스턴은 페미니스트들의 주요 거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1969년에는 미국 내 최초의 ‘페미니스트 컨퍼런스’가 보스턴 엠마누엘 칼리지에서 개최되었다. 이후 미국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 ‘브래드 앤 로즈’(Bread and roses)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 단체가 하버드 대학이 소유하고 있던 건물에 자리 잡았다가 쫓겨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 일로 인해 많은 여성들이 힘을 모아 연대하면서 만들어진 후원금으로 1972년 ‘여성 센터’(Women’s center)가 문을 열었다. 이 여성 센터는 현재 미국 내에서 가장 오랜 기간 운영되어 오고 있는 여성 센터라고 한다.

 

유명 대학들이 소재한 교육의 도시, 보스턴의 특징답게 대학 내 ‘여성학’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움직임도 보스턴에서 일어났다. 1970년대 보스턴 소재의 대학을 다니는 여학생들이 여성의 역사와 여성 문학에 대한 강좌를 만들어 달라고 각 대학에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74년에는 보스턴의 노스이스턴 대학 학생들이 ‘여성학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여성학 강의, 교재, 자료 리스트를 만들어 제공하기도 했다.

 

‘보스턴 여성 건강 공동체’의 연구와 활동


▶ 보스턴 여성 건강 공동체에서 발간한 <우리 몸, 우리 자신>(Our Bodies, Ourselves) 표지 이미지


베스트셀링 도서, 페미니스트들이 꼭 읽어야 할 클래식! 약 30개국에서 번역, 발간된 <우리 몸, 우리 자신>(Our Bodies, Ourselves)은 보스턴에서 탄생한 책이다. 비영리단체인 ‘보스턴 여성 건강 공동체’(Boston Women's Health Book Collective)에서 발간한 이 책은 여성의 건강과 섹슈얼리티, 젠더 정체성, 피임, 낙태, 임신, 출산, 가정폭력, 완경(폐경) 등 여성의 몸과 관련된 다양하고도 세밀한 정보를 담고 있다.

 

특히 여성의 성적인 욕망, 성정체성 등에 대해서 이야기함으로써 성적인 관계나 활동에 있어서 남성이 적극적이고 주도적이고 여성은 수동적이고 유순하다는 편견을 깨뜨리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1970년 열두 명의 보스턴 페미니스트 활동가에 의해서 집필된 이 책은 처음에 136페이지의 도서로 만들어졌고, 이건 미국에서 여성의 건강에 대해 여성이 쓴 첫 번째 책이었다고 한다. 여성들이 직접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썼다는 점으로 인해 많은 여성들에게 공감을 얻었고, 별다른 홍보 없이 25만부가 판매되는 성과를 얻었다. 이후 1973년 ‘보스턴 여성 건강 공동체’에 의해 276페이지 책이 만들어졌고,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왜곡되지 않은 여성 건강 정보를 전달했다.

 

가장 최근에 발매된 개정판(2011년)에서는 페미니즘 운동 안에서도 논의가 지속되고 있는 MTF, FTM 트렌스젠더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시킴으로써 지속적으로 여성의 건강과 성, 그리고 몸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흑인 페미니즘의 태동, ‘컴바히 강 집단’

 

또 하나 보스턴에서 일어난 여성운동 중 중요하게 언급해야 되는 것은 백인 여성이 아닌 다른 인종의 여성들의 페미니즘이다. 1974년 보스턴에서는 ‘컴바히 강 집단’(Combahee River Collective)이라고 하는 흑인 페미니스트와 레즈비언들이 결속하여 만든 단체가 생겼다. 이 단체가 만들어진 계기가 된 것은 1973년 뉴욕에서 열린 ‘흑인 페미니스트 협회’(National Black Feminist Organization)였다고 한다.

 

단체의 이름은 흑인 민권 운동가이자 여성으로서 매우 드물게, 남북전쟁 당시 정찰병 및 스파이로 활동하며 큰 역할을 했던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이 이끌었던, 1863년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약 750명의 노예를 해방시킨 ‘컴바히 강 습격’을 기리는 의미에서 지어졌다.

 

‘컴바히 강 집단’은 일명 ‘화이트 페미니즘’(white Feminism)이라고 불리는 백인 여성들 위주의 여성운동이 자신들의 요구를 전달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흑인 민권 운동 내에서 일어나는 여성혐오와 민족주의에 대항하며 페미니즘에 관한 논의를 이끌어냈다.

 

이들이 발표한 ‘컴바히 강 집단 성명서’(The Combahee River Collective Statement)는 흑인 남성들과 백인 페미니스트들, 그리고 이성애자에게 화두를 던져준 강력한 성명서로 평가 받고 있다. 현대 흑인 페미니즘(Black Feminism)의 기원, 우리가 믿는 것, 흑인 페미니스트 단체 조직의 어려움, 흑인 페미니스트들의 이슈와 프로젝트의 네 가지로 구성된 성명서는 그들의 의지를 보여주는 아래의 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흑인 페미니스트와 레즈비언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실행해야 하는 매우 확실한 혁명적인 과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투쟁과 평생을 바쳐야 하는 일에 대해 준비되어 있다.” (As Black feminists and Lesbians we know that we have a very definite revolutionary task to perform and we are ready for the lifetime of work and struggle before us.)


▶보스턴에서 구매한 엽서. 조신한 여성은 역사를 만들지 못한다. Well be-haved women seldom make history ⓒ주연

 

‘라이엇 걸 데이’ 지정한 페미니스트 도시, 보스턴

 

또 하나 흥미로운 정보는, 보스턴시가 ‘라이엇 걸 무브먼트’(Riot Grrrl Movement)의 대표주자인 캐슬린 한나(Kathleen Hanna)의 업적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2015년 4월 9일을 ‘라이엇 걸 데이’(Riot Grrrl Day)로 지정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보스턴은 ‘가장 쿨하고 페미니스트 친화적인 도시’로 다시 한 번 명성을 드높였다.

 

‘라이엇 걸 무브먼트’는 1990년대 초, 여성 인디 펑크, 락 밴드들이 진행한 페미니즘 운동이다. 대표적인 밴드는 캐슬린 한나가 멤버로 있었던 ‘비키니 킬’(Bikini Kill)과 브랫모바일(Bratmobile), 익스큐즈 17(Excuse 17), 그리고 슬리터-키니(Sleater-Kinney. 가수이자 배우, 작가인 캐리 브라운스타인(Carrie Brownstein)이 멤버로 속해있다. 그녀의 대표작으로 스케치 코미디 시리즈 포틀랜디아(Portlandia)와 영화 캐롤(Carol) 등이 있다.)

 

이 밴드들은 강간, 가정폭력, 성차별, 가부장제, 섹슈얼리티 등의 주제를 담은 노래를 만들어 공연했다. 많은 여성들에게 동기 부여가 될 수 있는 메시지를 전달했으며, 음악업계 내에 여성단체를 조직하고 정치적 활동을 하며 목소리를 냈다. ‘미국 중산층 백인 펑크족 여성들’을 위한 운동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음악적 특성상 선호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겹치는 부분은 어쩔 수 없지 않나 라는 생각도 든다. 또 남자들을 혐오하는 악마들이니 어쩌니 하는 비난도 있었는데, “우리는 남자를 싫어하지 않는다(we are not anti-boys). 우리는 여자들을 지지할 뿐이다(we are pro-girls)’ 라는 멋진 말을 남기기도 했다.

 

라이엇 걸 데이 기념일 선언서의 내용 중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들어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어린 소녀들은 자신들이 보지 못한 무언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녀들은 다른 소녀들이 드럼 스틱, 베이스, 마이크를 드는 모습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소녀들이 페인트 붓을 들고 펜을 들고 그들의 이야기를 큰소리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Because: Our young women can’t be what they can’t see. Girls need to see other girls picking up drumsticks, basses and microphones. They need to see other girls picking up paintbrushes and pens, and telling their stories loudly.)

 

소녀들에게 이런 여성운동을 기리는 기념일이 만들어지는 도시라니, 보스턴의 매력이 몇 배로 느껴지지 않는가? 미국 혁명의 역사가 있는 도시, 명문 대학이 있는 교육의 도시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앞으로 보스턴을 페미니스트의 도시로 기억해도 될 것 같다.

 

그리고 그 흔적을 찾아가는 우리만의 여행 코스를 만드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스턴을 다시 방문하게 될 때는 조금 더 페미니즘 파워를 업그레이드해서 가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이런 다짐도 했으니, 오늘은 파워-업을 위해 ‘비키니 킬’의 “돈 니드 유”(Don’t need you)를 들으면서 나를 가두고 옭아매는 존재, 규제, 벽들을 내 마음 속에서 시원하게 날려버릴 거다. “난 네가 필요 없어, 난 나로서도 충분하거든.”

 

“내가 귀엽다는 말을 네가 할 필요 없어, 내가 괜찮다는 말을 네가 할 필요 없어, 너의 보호는 필요 없어, 잘 자라는 키스도 필요 없어, 난 네가 필요 없어, 필요 없어. 우리 여자들은 네가 필요 없어.” (Don't need you to say we're cute. Don't need you to say we're alright. Don't need your protection. Don't need no kiss goodnight. Don't need you don't need you. Us girls don't need you) - 비키니 킬의 “돈 니드 유” 중에서.   (주연)  feminist journal 일다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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