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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나’를 위한 쇼핑을 해볼까
페미니스트 뉴욕에 가다⑦ 소유 이상의 가치를 담다 _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뉴욕 여행을 갔다 왔다고 주변에 이야기하면 듣게 되는 말이 있다. “그래서 뭐 사왔어? 쇼핑 뭐 했어?”
사실 뉴욕엔 한번쯤은 들어본 적 있는 유명한 브랜드 샵들과 우드버리(Woodbury) 및 센트리21(Century21) 등의 아울렛 매장들이 있어서 쇼핑하기에 좋은 도시이긴 하다. 쇼핑 거리로 유명한 소호(Soho), 이스트 빌리지(East Village), 타임스퀘어(Time Square) 등에는 크고 작은 샵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여행자인 우리의 눈길과 발길을 사로잡아, 그 유혹에 흔들리기도 한다.
여행 중에 종종 그런 유혹에 빠지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고 작은 즐거움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쇼핑과 소비에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보다 조금 더 흥미로운 쇼핑을 할 수 있는 곳들을 소개해 볼까한다.
▶ 뉴욕 독립출판물 서점 블루스토킹즈(Bluestockings)에서 열린 워크숍 ⓒbluestockings.com
다양한 세상과 만나는 독립출판물 서점, 블루스토킹즈
▷ 블루스토킹즈(Bluestockings) -172 Allen Street, New York. 로어 이스트(Lower East)에 위치한 블루스토킹즈는 100% 자원봉사자들로 운영되고 있는 서점으로, 공정무역 카페와 함께 구성되어 있다. 대형서점들에 비하면 굉장히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약 6천 권의 책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구경하다 보면 조금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책들은 페미니즘, 젠더, 퀴어, 자본주의, 지구환경 변화, 정치, 교육, 인종 등 다양한 주제로 분류되어 있다. 잡지 및 만화 포스터, 엽서 등 약간의 굿즈도 판매하고 있으며, 지역 커뮤니티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안내 및 팜플렛도 구비하고 있다. 저녁에는 워크숍, 세미나, 영화 상영회 등도 열리기 때문에 미리 홈페이지에서 확인하고 관심 있는 게 있으면 참여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영어 원서로 된 책은 읽을 일이 없어,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도 한번쯤 구경해 보기를 추천한다. 책의 세부적인 내용을 읽지 않더라도 단지 제목과 목차만 봐도 어떤 주제들이 이슈가 되고 있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생각보다 꽤나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책의 표지 디자인을 살펴보면서 책의 내용과 특성을 추측해 보는 것도 추천하는 놀이다.
▶ 블루스토킹즈(Bluestockings)에서 구입한 책. ⓒ주연
이 서점에는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프로젝트>(The Feminist Utopia Project), <날 좋아할 필요는 없어>(You don‘t have to like me), <예스의 의미는 예스야>(Yes means yes) 등의 페미니즘 관련 책이 많았다. 역시 미국에서도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많구나 느꼈다. <예스라고 말하기 전에>(Before I Do: A Legal Guide to Marriage, Gay and Otherwise) 같이 동성 커플에게 전하는 결혼 조언에 대한 책이 나온다는 것도, 역시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나라답구나 싶었다.
<나에게 폴리아모리에 대해 물어봐>(Ask me about Polyamory), <모노가미의 실패 원인>(Undoing Monogamy) 등을 보면서 젠더, 섹슈얼리티 뿐만 아니라 연애 및 관계에 있어서도 다양한 논의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들을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로웠다.
어떤 시선을 가지고 서점을 둘러보느냐에 따라 내가 봤던 것과 전혀 다른 특이점을 발견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작은 서점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우리가 몰랐던 세상의 단면을 보는 재미란 그런 것이 아닐까. (bluestockings.com)
여성친화적인 섹스토이 샵, 베베랜드
▷ 베베랜드(Babeland) 어둡고 음흉한, 들어가면 어딘가로 잡혀 들어갈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성인용품 샵들은 그동안 우리가 즐거움을 추구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방해가 되는 요소로 한 몫을 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미지를 과감하게 깨뜨릴 경험을 뉴욕에서 해 본다면 잊지 못할 추억이 되지 않을까 싶어 성인용품 샵이 아닌 ‘섹스토이’ 샵을 추천한다.
사실 뉴욕은 게이 친화적 동네로 알려져 있는 그리니치 빌리지 등에서 쉽게 섹스토이 샵을 발견할 수 있다. 커다란 투명한 유리 너머로 전시되어 있는 무언가가 조금 보인다는 건 마음의 장벽을 조금 낮춰주긴 하지만, 그렇다고 막상 들어가려고 슬그머니 보면 남성 마네킹이나 남성 대상 용품들이 보여서 문을 활짝 열어제끼고 들어가기가 어렵다. 나도 결국 밖에서 흘깃흘깃 구경만 하다 들어가지 못한 경험을 했던지라, 여성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섹스토이 샵을 찾고 싶었다. 그러다 여성들의 즐거움을 위해 20년 넘게 활동을 해 온 분들이 설립하고 운영하고 있는 샵을 발견했다.
클레어 카바나(Claire Cavanah), 레이첼 베닝(Rachel Venning)이 설립한 베베랜드는 ‘안티 포르노 페미니스트’(Anti-pron feminist)들이 시선을 ‘프로 프레져’(Pro-pleasure)로 이동하기 시작한 시절에 생겼다. 퀴어나 트랜스젠더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아직 부족했던 때에 그와 관련한 정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두 여성이 오픈한, 여성들을 위한 섹스토이 샵이다.
▶ 여성친화적인 섹스토이 샵, 베베랜드(Babeland) ⓒbabeland.com
1993년 시애틀에서 처음 문을 열었고, 현재는 시애틀과 뉴욕 로어 이스트 사이드, 소호, 브룩클린에 오프라인 매장이 있으며(참고로 브룩클린 매장이 가장 최근에 오픈했고 소개에 의하면 가장 예쁘게 꾸며져 있다고 한다) 온라인 매장도 있다. 설립자인 클레어와 레이첼은 <섹스토이 101>(Sex toy 101), <모어가즘>(Moregasm)이라고 하는 책도 출간했다. 오프라인 매장에서는 ‘커플 마사지’, ‘오럴섹스 팁’, ‘즐거움을 위한 체위’ 등 다양한 세미나도 열리고 있다.
예쁘게 놓여져 있는 귀여운 디자인의 용품들을 보고 있으면 사고 싶다는 생각뿐만 아니라 ‘그동안 왜 이런 쇼핑을 하지 못했을까’ 라는 안타까운 마음마저 든다. ‘모든 침실의 서랍에 바이브레이터가 있게 하는 것이 꿈’이라고 하는 베베랜드가 선택하고 판매하는 섹스토이를 쇼핑해 보는 것, 나를 위한 온전한 시간이 되지 않을까? (babeland.com)
페미니즘 파워-업! 굿즈를 살 수 있는 샵
최근에 온라인 펀딩 플랫폼 ‘텀블벅’을 통해서 페미니스트 관련 굿즈를 구매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작년 12월말에는 페미니즘 팝업 스토어 ‘후로파간다’가 일시적으로 열리기도 해서, 예전에 비해서는 국내에서도 다양한 것들을 접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는 샵이 아쉬웠었는데 뉴욕엔 그런 샵들이 있다.
①아더와일드(Ohterwild) -35 East 1st St. New York
아더와일드(Otherwild)는 옷, 액세서리, 디자이너 및 아티스트의 소품 등의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샵이다. 대부분의 상품들이 페미니즘, 퀴어 관련된 디자인으로 만들어져 있다. 가장 유명한 상품은 ‘미래는 여성이다’(The future is female)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로, 어린이용부터 어른용 그리고 다양한 디자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외에도 ‘우린 어디에든 있다’(We are everywhere) 가방과, 가슴 모양의 목걸이 귀걸이 등 귀엽고 세련된 상품들이 거침없이 우리의 지갑을 노린다.
온라인 매장이 운영 중이고, LA에서 오픈된 매장이 첫 오프라인 매장이며, 뉴욕에는 작년 연말에 매장을 오픈했다. 내가 매장에 방문했을 때는 너무 아쉽게도 아직 공사 중이어서 공사 현장만 목격하고 왔는데, 뉴욕에 다시 가게 된다면 꼭 찾아가고 싶은 곳이다. (otherwild.com)
▶ 페미니스트와 퀴어들을 위한 굿즈와 섹스 토이, 책자들이 진열된 트롤 홀(Troll hole) 매장 내부.
②트롤 홀(Troll hole) -226 Knickerbocker Ave, Brooklyn
브룩클린 부쉬윅(Bushwick)이라는 동네에 위치한 ‘트롤 홀’(Troll Hole)은 사실 관광명소 등과는 좀 떨어진 곳에 있어서 가기 쉬운 곳은 아니다. 매장도 굉장히 아담한 규모로, 기대감을 가지고 방문했다가는 실망을 할 수도 있지만, 알차게 잘 꾸려져 있는 곳이다. 페미니스트와 퀴어들을 위한 섹스 토이, 굿즈, 출판물들이 작은 공간에 적절히 배치되어 구경하는 재미가 있달까. 그냥 쓱 보기엔 크기가 작아서 별거 없을 것 같지만, 한번 들여다보면 의외의 시간을 소요하게 된다.
남녀 간 임금 차별과 인종 간 임금 차별에 대항하고 소리를 내고자 한다는 목표가 있다고 하는 이 매장은 각자 직업이 있는 세 명의 남녀에 의해 설립되었다. 운영자의 스케줄에 따라 매장 운영 시간이 변경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방문하고자 한다면 홈페이지나 SNS를 통해 그 날의 운영 시간을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trollholenyc.com)
‘여성은 단일하지 않다’ 다양한 욕구를 반영한 샵
바비인형 같은 얼굴과 몸매, 단아하고 고분고분한 성격의 획일적인 여성상을 강요받는 우리들이지만, 실제로 우리는 너무나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또 너무나 다양한 생각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획일적인 그 여성성에 어울리는, 늘 언급되는 어느 유명 브랜드 샵이 아니라 다양한 우리, 진짜 우리를 위한 쇼핑을 할 수 있는 곳들을 찾고 싶었다.
①플러스 사이즈 여성들을 위한 ‘애비뉴’와 ‘모니프 C’
▷ 애비뉴(Avenue)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인 1987년에 만들어졌으며, 미국 여러 주에 걸쳐 총 약 5백 개의 매장이 있다고 하는 플러스 사이즈 옷의 대표적인 브랜드다. 미국 사이즈 14(한국 사이즈로는 88) 이상의 옷들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다. 가격 또한 중저가대로 부담 없이 고를 수 있는 수준이다. 옷뿐만 아니라 신발, 액세서리, 수영복, 속옷도 구매할 수 있으니 한국에서 구할 수 없었던 디자인의 옷들을 구매할 수 있을 것이다. (avenue.com)
▶플러스 사이즈 여성들을 위한 ‘모니프 C’(Monif C) 홍보 이미지. ⓒmonifc.com
▷ 모니프 C(Monif C) -2005년 의류 디자이너인 모니프와 딸 에밀리가 함께 만든 이곳은, 흔히 플러스 사이즈의 여성들이 입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심플하고 넉넉한 디자인의 옷이 아니라, 밝고 화려한 디자인의 옷을 선보인다. 자신감 넘쳐 보이는 옷들이 가득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어느 정도 노출도 가능한 옷들은 굉장히 섹시하게 느껴지고 아름답다. 가격대는 100달러 이상으로 조금 높은 편이긴 하지만,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사고 싶어지는 옷들이 있다. (monifc.com)
②비건 여성들을 위한 ‘S.W 베이직’과 ‘무슈’
▷ S.W 베이직(S.W. Basics) -238 W 10th St, New York. 모든 재료가 독성이 없는 유기농 내츄럴이며, 공정무역 농장에서 재료를 받아오는 자연주의 화장품을 구매할 수 있는 이곳 S.W 베이직. 한 화장품에 다섯 개 이상의 요소를 섞지 않는 심플한 제작으로도 알려져 있다. 얼굴용 스킨, 토너, 크림, 메이크 리무버와 바디용 크림, 스크럽, 오일 등을 구매할 수 있다. (swbasicsofbk.com)
▷ 무슈(MooShoes) -78 Orchard St, New York. 비건 레더(가죽으로 보이지만 가죽이 아닌 소재, 혹은 잔혹한 방법으로 취득한 동물의 가죽이나 털이 아닌 것으로 제작)로 만들어진 샌들, 부츠, 구두 등의 신발을 중심으로 가방, 티셔츠, 지갑 또한 판매하고 있는 샵이다. 지구 온난화의 원인이 되는 온실가스 배출의 18%가 축산 및 육류산업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를 줄이는데 동참하고 싶고, 자신이 원하는 세련된 가죽가방 및 소품을 가지고 싶다면 한번 방문해 봐도 좋지 않을까.
이 가게는 동네 고양이들에게도 인기인 장소로 알려져 있어서 고양이들이 종종 방문한다고 한다. 실제로 매장에는 유기되었다가 구조된 고양이들이 살아가고 있다. 무슈 매장을 방문하게 된다면 고양이와도 조우하게 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mooshoes.myshopify.com)
▶ 비영리단체 하우징 웍스(Housing works)의 중고물품 판매 매장 중 하나. ⓒhousingworks.org
③중고물품을 활용하는 하우징 웍스
▷ 하우징 웍스(Housing works) 사실 이 곳은 나와 조금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기도 한데, 10년 전 맨하튼에서 4개월가량 지냈을 때 봉사활동을 한 곳이기 때문이다. 뉴욕에만 여러 개의 매장이 있는 ‘하우징 웍스’는 비영리단체로, 수익은 노숙인과 HIV 감염인의 재활에 쓰인다. 매장이 꽤 여러 개 있기 때문에 자신의 숙소나 여정과 가까운 매장을 찾아가면 된다.
매장에서는 지역 주민들이 기부한, 이제 자신에게 필요 없는 옷, 신발, 가정용품, 책, 가구 등등 다양한 것들을 정리해서 재판매를 하고 있다. 뉴요커들의 손길이 담겨있는, 생각치도 못한 좋은 물품들을 득템할 수 있는 공간이다. 심지어 가격도 대부분 10달러 이하거나 말도 안 되게 낮은 가격으로 책정되어 있어서, 보물찾기를 하는 심정이 된달까. (housingworks.org)
‘소비’ 행위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다
뉴욕에는 아마 내가 소개하지 못한 샵과 미처 알지 못했지만 흥미로운 샵들이 더 많을 것이다. 훌륭한 생각을 가진 여성들이,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반영하고자 운영하고 있는 조그마한 샵들도 많을 것이다.
늘 똑같은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 같은 그런 곳들에서 벗어나 진짜 나에게 어울리는, 나를 위한 쇼핑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는 흥미로운 여행을 처음으로 이번 여행에서 할 수 있었다. 세간에 지루하고 딱딱하고 무서운 학문이라 일컬어지는 그 페미니즘이 ‘여행의 쇼핑‘이라는 카테고리에서도 나에게 새로운 시선과 즐거움을 제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 페미니즘, 퀴어 굿즈와 옷, 소품을 판매하는 아더와일드(Ohterwild) 홍보 사진. ⓒotherwild.com
그동안 내가 쇼핑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 어떤 소비를 하면서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는 어쩌면 ‘어떠한 형태의 것’을 강요받고 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부터 난 엄마가 사다주는 무언가를 받아들이면서 성장했고, 사회에서 사라고 하는 것을 구매하면서 살아왔다. 그냥 무언가를 ‘산다’, ‘소유한다’는 것 외에 나에게 쇼핑과 소비가 가지는 가치를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
이제 난 정말 나를 위한 소비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렇게 또 하나의 ‘생각하는 즐거움’이 늘어난다. (주연)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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