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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트럴파크에 ‘여성들의 호수’가 있다고?
페미니스트 뉴욕에 가다① 맨해튼 중심에서 여성들의 흔적 찾기
나는 지난 11월 2일 <섹스 앤 더 시티>를 비롯해 숱한 드라마와 영화의 배경이 된 도시이자,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은 가보고 싶어 하는 활달한 장소, 뉴욕으로 떠났다. 워낙 유명한 도시라 정보가 넘쳐나고 여행 가이드북도 많은 뉴욕이지만, 명소와 맛집 정보만으로는 우리 여성들,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뭔가 부족하게 느껴진다.
뉴욕에 가서 할 수 있는 뭔가 색다른 일이 있지 않을까? 뉴욕에 담겨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어떤 게 있을까? 페미니스트로서 뉴욕을 즐기고 싶다고 생각하는 분들을 위해, 나의 짧은 10박 11일 간의 뉴욕 탐방을 공유하고자 한다. 그 첫 번째 이야기는 바로 뉴욕의 상징, 센트럴파크에서 시작한다.
뉴욕의 심장, 센트럴파크!
▶ 맨해튼의 중앙에 있는 도시공원, 센트럴파크. ⓒ주연
뉴욕에 있는 동안 가장 많이 갔던 곳이 센트럴파크(Central Park)다. 머물렀던 숙소가 가깝기도 했고, 왠지 아침 산책을 센트럴파크에서 해줘야 좀 뉴요커 같은 기분이 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매번 공원에 갈 때마다 다양한 사람, 다양한 장면을 보게 되는 즐거움이 있었던 그 곳, 역시 센트럴파크는 두 번 이상 가줘야 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센트럴파크는 맨해튼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가로는 5th 애비뉴와 8th 애비뉴, 세로는 59th 스트리트부터 110st까지의 면적을 차지한다. (참고로 뉴욕 맨해튼은 길쭉한 바게트 빵처럼 생겼는데 가로는 1~11th 애비뉴, 세로는 1~220th 스트리트+로어 맨해튼의 숫자로 표시되지 않는 스트리트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애비뉴와 스트리트 숫자만 알고 있으면 길 찾기가 매우 용이하다. 길치라도 찾을 수 있어요!)
뉴욕의 얼굴이기도 하고 심장이기도 한 이 명소는 수많은 드라마나 영화에도 등장했던 터라, 맨해튼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한번 꼭 가보고 싶은 장소다. 공원 잔디밭에 누워 뉴요커처럼 책을 읽고 싶은 그런 로망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치만 대한민국 동네 공원들의 모습을 생각하고 그냥 무작정 갔다가는 혼란에 빠질 수 있는데, 센트럴파크의 면적은 상당히 넓다. 공식적인 발표에 따르면 3.41㎢ 즉 백만 평이다. 백만 평이라니? 백 평도 감이 안 잡히는 소시민으로서는 대체 어느 정도인가 싶은데 여의도 전체 면적보다 좀 큰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걸어서 다 돌아보려고 하는 건 추천하지 않는다. 자전거를 빌려 탈 수 있고, 자전거 도로가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고 공원을 돌아보는 게 좋겠다. 센트럴파크에 갈 때는 가기 전에 공원 지도를 살펴보고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을 찜해두고 그 경로에 맞게 움직이는 게 좋다. 물론 그냥 돌아다니면서 예상치 못한 것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포기할 순 없으니까, 시간을 넉넉히 잡고 기본 경로를 유지하되 주변을 천천히 보면서 핫도그도 사 먹고 잠시 잔디밭에 앉아 멍 때리기도 하는 그런 일정을 잡으면 좋지 않을까.
‘여성들의 호수’와 ‘여성들의 파빌리온’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센트럴파크와 관련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나는 공원에 가기 전에 센트럴파크 홈페이지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투어 중 하나를 신청했다. ‘미드 파크 웰컴 투어’(Mid-Park Welcome Tour)로, 77th 스트리트에서 시작해서 79th 스트리트에서 마무리되는 약 1시간 가량이 소요되는 투어 프로그램이었다.
투어 가이드를 해주시는 분은 센트럴파크를 관리하는 비영리단체 ‘센트럴파크 보호협회’(Central Park Conservancy) 소속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중년여성 두 명이었다. 한 명이 투어를 주도해서 이끌고, 다른 한 명은 보조 역할을 하면서 투어 동안 뒤쳐지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해주셨다. 투어 내내 설명도 잘 해주시고 센트럴파크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어김없이 드러내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미드 파크 웰컴 투어’는 센트럴파크의 역사를 듣고, 미드 파크의 주요한 장소들을 돌면서 그 장소와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라던가 건축 및 조경 양식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의 귀를 사로잡은 내용은 ‘여성들의 호수’(Ladies’ pond)에 관한 이야기였다.
W77th 스트리트에 위치하고 있는 ‘여성들의 호수’는 사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그 자리에는 그냥 길이 있고 잔디밭과 나무들이 있을 뿐이다. 잠시 센트럴파크의 역사를 짤막하게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센트럴파크는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 등의 도시 환경을 부러워하던, 맨해튼에 거주하고 있던 상인들과 부유층들이 ‘우리도 끝내주게 멋있는 공원이 있어야겠어!’ 라고 주장하면서 추진된 공간이다. 1857년 공개적으로 공원 조경 디자인 콘텐스트를 열어 선정된 디자인으로 만들어졌는데,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이 조화를 잘 이루도록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외부에서 가지고 온 무언가 혹은 만들어진 무언가도 그냥 공원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여성들의 호수’는 메인 호수 근처에 있는 작은 호수였다. 이 호수의 용도는, 재미있다고 해야 할지 그리 놀랍지는 않다고 해야 할지 좀 헷갈리는데, 여성들만 스케이팅을 할 수 있는 장소였다고 한다. 즉 ‘여성들이 남성들의 불필요한 신체 접촉 없이 자유롭게 아이스 스케이팅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맨해튼은 겨울이 되면 꽤나 차가운 칼바람이 불고 눈도 자주 오는 탓에 호수에 얼음이 얼어서 시민들이 아이스 스케이팅을 즐겨했었는데, 호수에서 남녀가 같이 스케이트를 타면서 몇몇 사건 사고가 발생했다고 한다. 스케이팅을 하면서 남자들이 여자들을 쫓는다거나, 성추행을 하는 등 1929년 한 해에만 ‘괴롭힘’으로 경찰에 신고된 건수가 250건이 넘었다고 하니….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존재들이 있다는 건 착잡하다. 그런 일들이 있었다고 해도, 여성만의 호수가 만들어진 점은 조금 흥미롭게 느껴지긴 한다. 누가, 어떤 주장을 펴며 그런 공간을 만들자고 했던 것일까 궁금했는데 안타깝게도 그 부분에 대한 정보는 아직 찾지 못했다.
여성들만의 호수…라고 하니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 시대 퀴어 여성들의 모임이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장면이 떠오른다. 드레스를 입고 스케이트를 타는 여성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손이 스치게 되고, ‘괜찮으신가요?’ 물으며 서로를 배려하는 여자들의 그런 스위트함이 드러나는 그런 장소이지 않았을까?
▶여성들의 파빌리온 ⓒ센트럴파크 홈페이지 centralparknyc.org
안타깝게도 호수는, 가뭄과 그로 인한 늪지화, 모기로 인한 질병 발생 등의 문제로(그리고 이용자 감소도 있었던 것 같다) 없애기로 결정되었고,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여성들의 호수 근처에는 ‘여성들의 파빌리온’(Ladies Pavillion)이라는 곳이 있다. 아름다운 건축물인 탓에 지금은 결혼식 장소로 유명하다. 하지만 여성들의 호수가 있었던 시절에는 여성들이 스케이팅을 준비하기도 하고, 쉬기도 하는 공간이었다고 한다.
센트럴파크에 이처럼 여성들만을 위한 공간이 있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한편으로 여성들은 언제 어디서든 여성들만의 자유로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또 한편으로는 뿌듯한 생각도 들었다.
“센트럴파크의 구원자” 엘리자베스
앞에서 소개했듯이 센트럴파크는 디자인 공모를 통해 디자인이 결정되었다. 공모에서 우승한 사람은 남성 두 명이었다. 그래서 센트럴파크를 이야기하면 항상 그 두 남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다면 여성이 관련된 부분은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름다운 공원에, 과연 여성의 참여가 없었을까? 무언가 있었을 거야! 라는 생각에 좀 조사를 해봤더니, 역시 있었다!! 엘리자베스 바로우 로저스(Elizabeth Barlow Rogers).
1970년대 뉴욕시가 은행 파산 등의 이유로 어려운 상황일 때, 센트럴파크는 지금의 모습과는 다른 어둡고 흉흉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공원을 제대로 돌보는 이들이 없었던 탓에 공원 내 건축물들은 낙서로 뒤덮였고, 곳곳이 낡고 훼손되었다. 호수에는 맥주 캔이 둥둥 떠다졌고, 잔디밭에는 잔디 대신 흙먼지가 수북이 쌓이는 등 점점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때에 엘리자베스 바로우 로저스가 나섰다. 센트럴파크 디자이너 중 한명인 페드릭 로 옴스테드에 대해 연구하고 있던 도시공원 전문가인 그녀는, 자원봉사자들로 이루어진 공원청소단체를 만들고 공원을 복구하기 위한 모금 마련에도 나서기 시작했다. 1979년 뉴욕 시장은 엘리자베스를 공원 관리자로 임명했다. 그녀는 내가 참여했던 투어 프로그램을 관장하는 곳이자, 공원을 관리하는 단체인 ‘센트럴파크 보호협회’를 창립하고 리더가 되었다.
▶ 낙옆이 가득한 가을의 센트럴파크. 파란 하늘과 청량한 물, 싱그러운 잔디밭이 너무나도 잘 조화를 이룬다. ⓒ주연
엘리자베스는 공원의 토질 상태, 나무들의 현황, 주변 교통상황 등을 파악하는 데만 3년을 쏟아 부었다고 한다. 그리고 ‘15년 복구 계획’을 수립하고 차근차근 진행했다. 그 결과 1980년대 후반이 되었을 때 센트럴파크는 주민들과 외부인들이 즐겨 찾고, 보트 하우스에서 저녁을 먹고, 자연의 로맨스를 담는 영화도 찍을 수 있는 그런 곳으로 변모해 있었다.
어느 기사에서는 그녀를 “센트럴파크의 구원자”(Savior)라고 표현했는데, 정말 그렇게 표현해도 부족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엘리자베스가 창립한 ‘센트럴파크 보호협회’는 연간 6천5백만 달러(약 760억 원)에 이르는 공원관리 비용 중 75%를 제공하는데, 전부 시민들과 단체들에서 기부한 돈이라는 거다. 그런 체계를 만든 사람이니, 지금의 센트럴파크가 있는 것이 그녀 덕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공원을 돌아다니다 보면 여기저기서 공원을 열심히 수리하고, 청소하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조금만 자세히 바라보면 알아볼 수 있는 ‘센트럴파크 보호협회’라는 글자가 적힌 옷 혹은 모자를 입고 쓰고 있다는 것! 뉴요커들에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 중 하나를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지만, 거기에다 그 공원을 내가 관리하고 만들고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도 있다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센트럴파크에는, 역사의 기록에선 종종 빼먹어버리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있고 여성들의 노력과 능력으로 만들어진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센트럴파크에 가게 된다면 우아하게, 어떤 이들이 “된장녀”라며 그렇게나 치를 떠는 스타벅스 커피를 한 손에 들고 ‘여성들의 파빌리온’에 앉아, 그 옛날 ‘여성들의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여성들을 생각해보며 상상을 나래를 펼치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 센트럴파크 공식 투어: 공식 홈페이지에서 신청할 수 있다. centralparknyc.org/tours 다양한 투어가 제공되기 때문에 스케줄에 맞게 고를 수 있다. 사전에 신청해야 하고, 자원봉사로 이루어지는 투어 특성상 ‘진짜 뉴요커’들이 영어로 안내한다는 점을 참고하시라. (주연)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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