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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스스로를 무엇으로 부르느냐는 우리 마음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 이름 때문에 우리는 어떤 감정을 경험하고, 그 이름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우리를 무엇으로 개념화하고 설명하느냐는 곧 우리 자신이 되고, 그래서 이름 붙이기란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규정합니다. 그 이름이 나와 전혀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내 이름이 되는 순간 나는 그것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용산구청 측에서 거리 광고판에 게시해놓은 경고문구 ©사진 촬영: 박김수진

개개인이 마주하는 세계 또한 곧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입니다. 우리의 경험을 어떻게 개념화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경험을 달리 합니다. 세상은 우리가 세상을 개념화한 방식으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감정경험이 그렇습니다.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감각을 어떻게 개념화하고 설명하는지가 곧 우리가 경험하는 감정이 됩니다. 아슬아슬한 다리 위에서 만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사랑을 느낄 확률이 더 높다는 말은 많이 들어보셨지요. 무서운 다리 위에서 느껴지는 생생한 떨림을 우리가 상대에 대한 ‘사랑’이라고 인식할 때 이런 일이 생깁니다. 무서운 감정도 사랑하는 감정도 모두 떨림을 수반하는데, 그 떨림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곧 사랑인 것이지요.
 
자신이 ‘쓰레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순간
 
자기는 ‘쓰레기’라서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쓰레기가 삶을 살아서는 뭐하냐는 깊은 우울에 빠져있었고, 우울하다 보니 아무런 의욕이 없어서 사실 잠만 자는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쓰레기가 뭐냐고 저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잠만 자고, 밥만 먹고, 텔레비전만 보고. 이 나이 먹도록 직장도 없이 돈 한푼 못 벌어오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다시 물었습니다. “쓰레기가 뭐지요?”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말했습니다. “다 써서 아니면 쓸모 없어서, 더러워져서 버리는 물건.”
 
“누구누구씨, 쓰레기 맞아요?”하는 물음에 그는 “아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쓰레기와 그는 사실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했습니다. 자신도 자기가 쓰레기는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자신을 쓰레기라고 생각할 때면 얼만큼 우울해지는지를. 또 덧붙였습니다. 자기가 쓰레기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고, 사실은 아버지가 자기를 쓰레기라고 그랬다고요.
 
물론 그는 직장을 구하지 못해서 집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쓰레기는 아니었지요. ‘쓰레기’로 불리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쓸모 없고 무가치한 무엇으로 전락했던 그는 우울마저 생기면서 더욱 더 무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쓰레기’와 자기를 분리시키고 나면서 자신의 우울을 좀더 잘 조절할 수 있는 위치에 설 수 있게 되었지요.
 
폭력을 즐긴다? 반복되는 피해를 설명하는 방식들

 
어릴 때부터 반복적으로 성폭력을 경험한 사람 중에 유사한 폭력을 반복하여 겪게 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스스로가 폭력의 반복을 설명하기 위해서 “내가 뭔가를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나에게 계속 생긴다” 혹은 “나는 그럴만한 사람이니까 이런 일을 겪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더 큰 심리적 고통을 떠안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에게 ‘그렇고 그런 여자’, ‘그런 여자니 그런 일이 생기지’하고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폭력의 반복을 설명하기 위해서 ‘반복강박’이라는 개념이 있기도 했는데, 어떤 학자들은 이 개념을 피해자 본인이 강박적으로 어떤 충격을 추구하고 ‘즐긴다’는 식으로 잘못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은 반복된 피해에 놓인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습니다.
 
이제 피해의 반복은 피해의 후유증 개념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여자의 속성이 그런 일을 자꾸 일으킨다’는 설명에 비하여, 피해의 반복을 피해의 후유증으로 개념화하는 설명방식은 고통의 실마리를 해결하는데 더 근접해 보입니다. 이로써 불안 후유증이 위험을 인식하는 능력을 낮춰버려서 그런 경우가 생긴다는, 보다 타당한 설명이 생겼습니다.
 
이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피해의 악순환 이면에 ‘나는 무가치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날 그렇게 대해도 어쩔 수 없다’는 손상감이 자리한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스스로가 실은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이고 스스로를 보호하는 일이 얼마나 정당한가를 확인해 가는 실질적인 치유과정이 가능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경험을 우리가 어떻게 설명하고 이름 붙이느냐에 따라서 삶은 크게 바뀝니다. 어떤 이름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가 하면, 어떤 이름은 삶을 크게 제한해 버립니다. 그의 삶이 ‘쓰레기’라고 규정되어 버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달리 살 수 있는 길을 더 빨리 찾았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한동안 그가 실제로 잠만 자고 직장에 다니지 못한 실제 이유를 (쓰레기라서가 아닌) 더 빨리 찾아내어 변화시킬 수 있었을 수도 있지요.
 
불법집회, 테러, 인권, 연민…개념 날치기 횡행
 
이러한 심리적 작동과 유사한 사회적 작동을 ‘은유’나 ‘프레이밍’으로 설명해주는 철학자와 언어학자들의 이론이 있지요. 사람들은 ‘은유’라는 방법을 통해서 어떤 경험을 이해할 수 있지만, 동시에 은유 개념은 무언가를 은폐할 수 있고, 대안적인 이해를 제한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심리학적 작동을 염두에 둔다면, 더 나아가 이러한 사회적 작동이 인간 개개인의 심리 혹은 감정적 수준이라는 더 깊숙한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부조리에 항의하는 발언이 ‘불법집회’나 ‘테러리스트’로 개념화된 상황에서 부조리를 뜯어 고치는데 쓰여야 할 귀한 노력이 ‘불법이 아니다’라는 것을 밝히는데 소모되어야 하는 오늘날, 더 자주 생각나는 논의인 것 같습니다. 반면에 대통령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연민을 지닌 지도자의 개념화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 이면에 부실한 복지정책이 은폐되는 점이 문제입니다.
 
조선일보에 살인범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실렸을 때에도 한방 얻어맞은 것처럼 아찔함이 들더군요.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신문에서 ‘인권’이 어떻게 규정되어 버렸는지 지켜봐야만 했습니다. 이제 무수한 사람들에게 각인된 ‘인권’ 개념을 바로잡는데 또 많은 힘이 소모되어야 하는 것인가요. ‘인권’이란 정치적 이해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일개 언론에서 무엇이라고 결론 내릴 것이 아니건만, 인권이란 권력자가 누군가에게 하사할 수 있는 무엇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권이란 되찾아놓기 위해 부딪치고 싸워가야 하는 무엇이지, 절대적인 누군가가 결정짓고 빼앗을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상대가 살인범이라 사회적 합의를 얻기 쉬운 틈을 타 인권의 개념을 날치기한 셈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불법집회 참가자’들에게 인권이 무엇이 되는지를 예의 주시해야 할지 모릅니다.
 
한 사람의 심리 내에서 키워야 하는 것은 곧 ‘관찰하는 자기’입니다. ‘쓰레기’라고 칭하는 자기를 발견하고 이로부터 거리를 둘 줄 아는 또 다른 자기가 곧 ‘관찰하는 자기’이지요. 이 관찰하는 자기는 언젠가 또 스스로를 ‘쓰레기’라고 부르려 할 때 “쓰레기로 부르려 하니까 또 우울해지려고 하네. 너는 쓰레기가 아니야” 하고 귀띔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사회의 ‘관찰하는 자기’가 힘이 더 나기를 기대해봅니다.
일다▣ 최현정의 마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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