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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오오오오대체 메에에에갈이 뭐길래!
차별과 부정의, ‘우리’의 정치적 책임에 대하여
※ 필자 김홍미리 님은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입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2016년 7월은 가히 2015년 6월에 일어난 메르스 갤러리 ‘미러링 난장’의 확장판이라 할만하다. 작년 여름 디시인사이드 운영진과 유저들이 메르스갤러리를 접수한 메갈리아의 딸들과 어떻게 마주해야할지 몰라 우왕좌왕 했던 것처럼, 올여름 한국 사회는 정계와 재계(?)를 넘나들면서 ‘메갈리안’ 처리 문제를 두고 우왕좌왕한다.
도오오오오오대체 메에에에에갈이 뭐길래, 그깟 티셔츠 한 장 사 입었다고 일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며, 이것이 부당한 노동권 침해라고 시의적절하게 논평을 낸 정의당 문화예술위원회가 때아닌 ‘남혐 옹호’ 논란에 휩싸여야하는 데다가, 마인드C를 비롯한 여혐 웹툰을 규제해달라는 요청에는 반응하지 않던 웹툰 시장이 딸랑 ‘왕자는 필요 없다’(GIRLS Do Not Need A Prince) 티셔츠 한 장의 열기로 ‘혐오표현 규제/메갈 옹호 작가 규제(YES CUT)’를 외치기 시작했느냔 말이다.
▶ 여성혐오 페이지는 삭제하지 않으면서 국내외 페미니즘 이슈를 소개하는 메갈리아 페이지를 연속 삭제한 페이스북 코리아에 소송을 제기한 <메갈리아4>에서 소송기금 마련을 위해 제작한 티셔츠.
당신이 수신 거부한 ‘메갈리아의 문제제기’
이런 뒤죽박죽의 모습은 지난 10여 년간 김치‘녀’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동안엔 꿈쩍 않던 이들의 심기가 한음절 차이나는 김치‘남’이라는 단어 하나에 건드려지던, 지난 여름 디씨 유저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김치남’ 등장에 어리둥절하고, ‘한남충’ 호명에 분노하고, ‘실잦’ 출연에 정신줄 놓았던 이들이 그러했듯이, 분노의 감정에 눈멀어 ‘더 이상 차별적 젠더 구조에 눈감지 말자’는 메시지를 수신하지 못한다.
게다가 지금의 수신 거부는 1년 전의 수신 거부보다 더 문제적이다. 1년 전에는 메갈리안이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해나갈지 알 수 없었고,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면 메갈리안의 앞날에 대해 우려할 수도 있었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메갈리안이 이룬 변화의 기록들이 남아있다. 지난 1년간 메갈리안들은 ‘여자일베’라는 무수한 억지와 매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성차별 사회에 문제를 제기해왔다.
화장실 몰카 근절 캠페인을 시작했고, 남성들이 자신의 권리라고 말했던 강간 모의 사이트 ‘소라넷’ 폐쇄 청원을 시작했다. 1999년 이후 17년간 무탈하게 운영되어온 ‘소라넷’은 메갈리안을 비롯해 저항하는 여성들 덕분에 폐쇄됐다. 이런 일들은 여성단체들이 시도하지 못했던 일들이다. ‘모두의 마블’ 게임의 성차별적 비서 캐릭터에 문제 제기해 캐릭터도 바꿔냈다. 메갈리안의 문제 제기 이전에는 ‘문제’인줄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게임회사 사장님은 성차별 캐릭터를 발 빠르게 수정했다.(변경 전 효주 캐릭터는 [사이즈: 38-24-37], 원빈 캐릭터는 [성격: 차분하고 냉정함]이라고 설명되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사이, 최초 만들어졌던 메갈리아 사이트는 이미 사라졌고 ‘레디앙’과 ‘워마드’, ‘메르스갤러리 저장소3’와 ‘메갈리아4’ 등 페이스북 페이지로 분화됐다. 다양한 페이지들이 생겨났고 다양한 이슈들이 페이지를 채운다. ‘아저씨가 만난 페미니즘’ 페이지는 생애 과정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여/성 폭력 생존기가 업데이트 되고 있다.(8월 1일 현재, 운이좋아서살아남았다#72가 올라왔다.) ‘강남역10번 출구’ 페이지는 여성혐오 근절 거리행진을 기획하기도 한다. 트위터에서는 소라넷 폐지에 기뻐할 틈도 없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리벤지포르노’ 사이트를 근절하기 위해 일군의 무리들이 움직이고 있다. 메갈리아의 탄생 이후 2016년 페미니즘에 눈뜬 이들은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에서 성차별 사회를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이런 다채로운 활동에는 주목하지 않는 사람들은 ‘메갈리아’를 생명력을 상실한 무생물(無生物)로 묘사한 후 혐오조장 집단으로 색을 입히는데 주력한다. 그러나 정작 메갈리안이라 지목받는 이들에게는 그런 평가와 진단만큼 의미 없는 것도 없다. 메갈은 페미니즘이 아니라는 말들 속에서, 심지어 ‘메갈리아를 페미니즘이라 말하는 건 페미니즘에 대한 모독’(임성환 한국웹툰산업협회 이사장의 페이스북 타임라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페미니스트들이 답할 수 있는 건 헛헛한 웃음뿐이다.
그건 그냥 ‘또 시작’인 거다. 김태훈이 IS보다 “현재의”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문제(2015)라고 했듯이, 김규항이 계급 문제에 무관심한 주류 페미니즘을 “몹시 마땅치 않아” 했듯이(2002), 함께 연대해서 페미니즘을 두텁게 만들기보다 자신의 ‘안전한 위치’를 확인받는 것이 더 급한 분들이 여느 때처럼 ‘또’ 나타났을 뿐이다. 이들에게 ‘요즘’ 페미니즘은 기필코 ‘글러먹었어’야 한다. 치졸하지만 이것이 자신의 지위를 가책 없이 즐길 수 있는 쉬운 방법이어서 그렇다.
“나는 성차별에 반대하지만 요즘 페미니즘엔 동의가 안 돼.” 이 말은 얼마나 우/아/한/가. 저항에 동참하지 않으면서도 성차별에는 반대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식의 ‘무늬만 저항’이 하는 일은 이 체제를 견고하게 다지는 일뿐이다.
여성들의 거센 저항이 가져온 새로운 국면
‘메갈리아’가 사상의 검증대가 되어가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어쩌다 (일베가 아니라!) 페미니즘이 또(!) 혐오의 온상지로 지목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쩌면 이렇게 ‘사유의 관행’은 반복적으로 체제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움직이는지에 대해 숙고하게 되고, 또(!) 그 이유를 탐색하게 된다. 사람들은 왜 ‘악의 없이’, 심지어 ‘정의의 이름으로’, 실체 없는 ‘메갈리아’를 붙들고 늘어지면서까지, 여성혐오 문화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거센 저항을 없애려는 것일까. 이를 묻다 보니, 결국 이들의 ‘무책임’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의 책임감은 사회에 만연한 부정의에 대해 개인이 가져야할 ‘정치적 책임감’(아이리스 영, 2013)이다. 영은 어떠한 부정의에 대해 개인이 법적 책임을 질수는 없지만, 개개인은 자신의 삶 속에서 부정의를 생산하는 다양한 과정에 참여하고 있고, 때문에 우리는 부정의를 치유할 책임이 있다고 진단한다. 이 분석에는 책임에 관한 ‘사회적 연결모델’이 제시된다. 즉 우리의 책임은 ‘어떠한 이익을 추구하고 어떤 기획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상호의존적인 협력과 경쟁체제 안에 타인과 함께 속하게 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우리는 그 속에서 서로에게 정의를 기대하거나 요구할 수 있고, 이 구조에 함께 살고 있는 한 부정의에 대한 책임을 공유한다. 이렇게 볼 때 구조적 부정의로서의 성차별은 함께 살고 있는 ‘우리’가 책임져야할 공동의 과제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문화, 덕분에 끊이지 않는 강간, 여성의 몸을 도구화하고 그로 인해 여성을 인격체로 대하는 법을 상실해버린 문제는 더 이상 ‘여성문제’가 아닌 거다.
그것이 ‘여성문제’가 된 건, 다른 문제에 비해 덜 심각해서가 아니었다. 다른 문제에 비해 더 심각하지만 누구도 그 문제가 심각하다고 감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여성문제’였고, 구별짓기된 언어 표현 그대로 ‘내 문제’가 아니라 ‘너희 문제’였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는 범죄였다. 가해자들은 스스로를 가해자이기보다 ‘보호자’로 지목하곤 했다. ‘딸 같아서 그랬다’는 박희태나, ‘여자들은 몸을 함부로 굴리지 않았으면 한다’던 유영철이나, 흔히 보는 가정폭력 가해자들의 언어엔 ‘내가 바로 보호자’라는 컨셉이 포함되어 있다. 여/성문제의 책임은 여성에게 주어지고, 남성은 보호자라는 이름 속에 폭력의 죄와 책임이 감춰지기 쉬웠다.
생각해보면 지금껏 여/성폭력과 관련해서 우리가 내뱉을 수 있는 말들은 고작해야 ‘그 여자 참 안됐다’라는 감상이나, 옷차림에 대한 충고, 혹은 일찍 다녀야겠다는 다짐 같은 것들이었다. 여/성폭력에 ‘내’가 연루되는 방법은 ‘보호자’와 ‘보호받는 사람’ 외에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 구도에서 보호자의 위치에 있는 이들은 ‘충고’를 했다. 보호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조심’을 했다.
문제는 국면이 달라지면서 일어났다. 그동안 꽤 안정적으로 유지되어오던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구도는 잠재적 피해자들의 적극적 거부로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잠재적 피해를 의심받으며 ‘조심해’라는 소리를 귀에 인이 박히게 듣고 살아온 여성들은 ‘더 이상 보호는 필요 없다’고 선언했다. 이런 선언은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이번엔 그 목소리가 너무나 우렁차서 사회도 더 이상은 못들은 척 할 수 없게 됐다.
보호자-피보호자의 구도가 흔들리면서 ‘보호자’라는 이름으로 폭력과 무관한 위치를 보장받던 이들이 설 자리를 잃었다. ‘보호자’ 말고 다른 포지션을 찾아야 하는데, 여/성폭력과 자신의 관계를 호명할 마땅할 이름이 없는 거다. 잠재적 피해자로 살아본 적은 없고, ‘보호자’일 수도 없다면, ‘그렇다면 나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볼 때, 강남역 10번 출구를 중심으로 거세게 일어난 저항의 국면에서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이 수면위로 등장한 건 우연이 아니다. 누군가는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지 말라며 화를 냈고, 누군가는 잠재적 가해자가 맞다며 성찰했으며, 여성학자 정희진은 ‘사회 구조적 모순에 잠재적 가해자란 없다’고 응답했다. 인종차별 문제를 두고 ‘잠재적 가해자 -백인’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구조의 모순은 개개인의 인성에 기댄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성차별을 ‘구조’의 문제로 인식하기란 여전히 어려워서 ‘잠재적 가해자’와 같이 문제를 ‘개별화’시키는 언어들이 꾸준히 등장하는 중이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보호자’가 사라진 자리에 그들 스스로 적합한 이름을 찾아가는 일련의 과정은 기록할만한 역사적 사건이라 할만하다. 피해자에게만 질문해 온 질문의 방향이 난생 처음 ‘(자칭) 보호자’들에게로 향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저항을 통해 일어난 것들이다. 더 이상 잠재적 피해자로 살지 않겠다는 외침이 없었다면 ‘잠재적 피해자가 아닌 이들’은 보호자의 지위를 상실하지 않았을 테고, 자신의 위치를 물을 기회도 없었을 거다. 그들은 이제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됐고(‘지금 내가 (보호자가 아니라) 설마 가해자라는 거야?’) 그 질문에 답해볼 수 있는 기회도 생겼다.
더디지만 이런 질문들 속에서 나는 이 체계에 어떻게 기여해왔는지 숙고할 수 있게 되고, 이제부터 이러한 부정의를 어떻게 책임질 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장이 열렸다.
▶ GIRLS Do Not Need A Prince 티셔츠. <메갈리아4>의 텀블벅 모금에서 1억3천만원 넘게 모금됐다.
코르셋을 벗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2016년 4월, 수천 명의 멕시코 시민들이 여성살해와 성폭력, 여성혐오 문화에 저항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들의 구호는 "우리는 계속 살아있고 싶다"였다. 이 시위에 참여한 한 활동가는 여성살해를 ‘느린 집단학살’(slow genocide)이라고 표현했다. 전지구적으로 일어나는 여성살해와 직면하고, 이제 보다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때가 되었다. ‘나는 안 때렸다, 나는 안 죽였다’는 말로 피해갈 일이 아니다. 이것은 구조의 문제여서 그렇다.
심각한 문제를 눈앞에 두고도 심각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일은 생각보다 자주, 타인의 경험에 대한 무감각의 연대 속에서 일어난다. 판단과 평가, 진단과 서열 매기기의 방식으로 타인을 만나는데 익숙한 이들에게는 더더욱 타인의 경험에 들어가 어떤 것을 ‘같이’ 느끼는 일이란 쉽지 않다. 더욱이 그 타인이 ‘김치년’이거나, 남성을 한남충이라 부르는 ‘메갈리안’이라면 더욱 그럴 필요가 없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내가? 왜? 굳이? 메갈을 공감? 돌았냥?”)
하지만 이런 메갈리아를 향한 반감의 정서로 몸을 휘감기보다, 그치지 않은 여/성폭력과 차별에 눈감았던 나의 방임이 가져온 결과가 무엇인지 살폈으면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이틀에 한명 꼴로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으로부터 여성이 살해되며, 흉악범죄 피해자의 84%가 여성이라는 것도 기억했으면 한다. 메갈은 작금의 이런 현실에 분노하는 이들의 묶음이다. 싸워야할 대상은 메갈이 아니라 이런 죽음을 가능하게 하는 한국의 성차별적 사회구조가 아닌가.
성에 따라 달라지는 삶의 무대와 그 무대를 지탱하는 나의 기여를 거둘 때가 왔다. 누군가의 삶은 나와 당신의 무관심으로 인해 사라지거나 힘들어졌을 수 있다. 여성혐오에 저항하는 페미니스트=메갈리안의 입을 틀어막는 지금의 행동이 누군가의 평화로운 삶을 위태롭게 할 수도 있다.
메갈리안은 남성을 혐오하는 집단이 아니다. 그들이 누구냐고 되묻는다면, ‘저항을 통해 곁에 있는 이들이 부정의에 대한 책임을 공유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가는 누구나’라고 답할 수 있겠다. 당신과 내가 그렇듯이, 메갈리안이 만나고 싶은 건 혐오로 가득 찬 이 세계가 아니다. 첨예한 혐오를 보내면서 맞이하게 될 ‘이 다음의 세계’다. 우리가 품고 있는 미래가 무엇인지 상상하고, 어떻게 하면 가까워지는 것인지 찾아가는 이들이 바로 메갈리안이고 ‘우리’다. 메갈리안은 불안하지만 묵묵히, 담담하고 당당하게 한걸음씩 움직이는 중이다. 2015년부터 급증하는 페미니즘 도서 판매량은 이러한 기대와 희망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로 읽힌다. 이제 적대를 풀고, 그 희망의 여정에 동참하면 된다.
그리고 저항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연결’이었으면 한다. 바꿔 말하면 ‘연결이 곧 승리’일 수도 있겠다.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함께면 저항이 가능하다는 경험, 저항해서 바꿔내는 기억. 점점 혐오와 직면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고, 코르셋을 벗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권력감지센서는 더 많아지고 있다. 지난 6월 6일 홍대 앞에서 열린 여성혐오 반대 시위의 주요 구호는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였다. 변화는 연결하고 연결되는 것을 통해서 일어날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말이다. ▣ 김홍미리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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