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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해독의 시간을 맞이하다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독일에서 심리치료하기⑫



※ 독일에 거주하는 20대 후반 여성 하리타님이 심리치료 과정을 거치며 탐색한 섹슈얼리티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자신의 상처를 짊어지고 국경을 넘어 문화적, 사회적, 제도적 차이 속에서 삶의 변화와 사회와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실천해가는 여정이 전개됩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심리치료 여정에 쉼표를 찍다

 

“…그러면 8월부터 11월까지 한 달에 한 번만 뵙는 거 맞죠? 내년 2월 즈음 논문 마무리되면 한국에 두어 달 다녀올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 다시 정기적으로 치료 시작했으면 해요.”

 

독일에서 심리치료실의 문을 두드린 지 만 일 년이 다 되어간다. 여성건강센터에서 상담을 받고 치료사를 찾는 과정부터 구체적인 치료법을 동원해 정기적인 치료 일정을 소화하기까지 여러 고비를 넘어왔다. 독일의 달력 상, 연간 두 번의 긴 휴가철을 제외하고는 매주 부지런히 다녔다. 이제 좀 쉬어간다.

 

안 그래도 지치던 차, 하반기에 많은 집중력과 에너지가 필요한 논문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이를 심리치료와 병행하다간 둘 다 제대로 못 할 것 같아서 결단을 내렸다. EMDR요법을 통한 트라우마 치료가 일단락되었으니, 바로 다른 치료로 넘어가기보다는 휴지기를 가지면서 장기적, 점진적 효과를 기다려 보고 싶기도 했다. 내년 중순에 치료를 재개하면 심리치료사와의 개별면담 외에도 성의학센터에 협진을 요청하는 등 보다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방향에서 접근할 것 같다.

 

‘나’를 더 이해하기 위한 힘든 여정

 

한껏 심란하고 헛헛한 마음으로 치료실을 나오는데 바깥 날씨는 참 화창하거나, 거리를 걸으며 마주치는 행인들이 얼굴이 그늘없이 밝게 빛날 때 나는 참 쓸쓸해졌다. 나 빼고는 세상이 다 행복한 것 같아 누구에게인지도 모르게 야속하기도 했다. 내 사정을 일일이 하소연 하는 일도 극히 피곤하게 느껴져 전화번호부를 한번 쓱 훑곤 말았다. 대신 길모퉁이 장난감가게를 찾아 정신없는 선반들 사이를 헤매고, 돈 관념이 허술해진 틈을 타 회전초밥집을 들락거리며 맛의 위안을 찾았다. 바쁜 기차역 대합실 구석에 앉아 일부러 기차를 놓쳐가며 한참 투명인간이 되기도 했다.

 

▶ 매주 치료가 끝난 뒤 들르곤 하는 동네 장난감 가게. 귀엽고 아기자기한, 그러나 그닥 쓸모는 없는 시덥지않은 물건들로 가득 찬 이 공간은 내게 생의 무거움을 잠시 잊게 했다.  ⓒ출처: bluespot.de

 

그럴 때 질문들이 나를 기어올랐다.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이렇게 힘들게 심리치료를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마음을 다잡으려 자꾸 되새겼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것은 아니라고. 나는 지금도 씩씩하게 살아남은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어떤 트라우마나 아픔에서도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는 없을거라고도 중얼거렸다. 다만 덧난 상처나 오랜 흉터를 인정하고 더는 무리하게 살지 않기 위해서라고. 또 내가 누군지를 나 스스로가 더 잘 이해하는 것이 치료의 궁극적인 목적이고 과정이라고 나는 믿었다. 그러면서 나의 진짜 두려움과 욕망이 뭔지 보아 버리고 싶기도 했다. 그래야 지금껏 억압되어 온 ‘내가 진짜로 되고 싶은 것’과 ‘하고 싶은 것’을 마침내 또렷하게 알게될 것 같았다.

 

지금까지 심리치료에서, 역설적으로 나는 트라우마를 너무나 또렷하게 다시 ‘겪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충격으로 얼어붙지도, 침묵하지도 않았다. 충분히 화를 내고 실망하고 슬퍼하고 좌절하고 혼란스러워했다.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서 옳고 그름이 뚜렷이 보였고 이를 표현할 언어도 갖고 있었다. 타인의 기분이나 욕구를 충족해야한다는 압박감에 맞서 스스로를 먼저 대변했다. 다시 겪은 트라우마는 나를 또 힘들게 했으나, 예전같은 위력은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 이는 더 이상 트라우마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한국 심리치료의 현주소는?

 

‘아휴, 이거 진짜 트라우마 될 것 같아.’ 이런 표현이 관용구처럼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적어도 트라우마라는 용어는 이제 생활 속에 들어온 것 같다. 그렇다면 심리치료는 어떨까? 신문이나 방송에서 이 단어를 접하는 경우는 성폭력 사건이나 각종 재난, 대형 사고의 피해자와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심리치료’를 키워드로 인터넷 서핑을 해보면 사람들의 인식이나 관심 주제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각종 커뮤니티, 지식검색, 블로그와 카페에 올라온 정보나 대화를 보면 우선 우울 증세를 호소하며 글들이 많이 눈에 띈다. ‘우울증 공화국’인 한국 상황에 걸맞는다. 또 심리치료를 받고 싶다고 문의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질문이 있다. 1)어디를 찾아가야 할지 2)보험처리 여부 및 진료기록이 남는지 3)비용이 얼마나 비싼지 이다. 구체적인 심리치료 방법이나 심리상담과의 차별점, 효과나 장단점에 대한 논의는 드물다. 심리치료라는 개념 자체는 퍼졌지만 제도적 여건이 어떤지는 아직 ‘누구나 아는 상식’이 되지 않았고, 실제 경험도 제한적이라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 비싼 심리치료 비용에 대한 고민이 드러나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댓글들. ⓒ출처: 82cook.com


한국에서는 현재 정신건강의학과, 보건소 정신보건센터, 사설 연구소 및 센터, 이렇게 크게 세 종류의 기관에서 심리치료를 받을 수 있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전문의 자격증이 있는 의사가 치료를 담당한다. 필요한 경우 의학검사나 약물투여가 동반될 수 있고 보험처리를 받으면 비용이 4~5배까지 저렴해진다고 한다. 보건소도 유사하다. 하지만 보험처리를 받으면 진료기록이 남고, 비밀보장 원칙에도 불구하고 드러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운전면허, 소송 연루, 정부기관 취업 등) 또 자살 가능성을 이유로 들어 정신의학과 진료 기록이 있는 사람의 가입을 거부하는 보험사도 아직 존재한다.

 

이 제도적 허점 때문에, 사설 기관으로 발길을 돌리거나 비보험 청구를 요청해 돈을 더 내고 치료받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보험처리를 하면서도 진료 기록은 비밀에 부칠 수 있는 제도 개편와 엄밀한 행정처리, 사회적 분위기가 어서 가능해져야 할텐데 아쉽다.

 

사설 연구소나 센터에는 심리학을 전공하고 관련 자격증을 소지한 치료사가 있다. 우리나라는 의학과 심리학을 경계로 의료보험 보장 여부가 결정되는 반면, 독일의 경우 심리학 경로를 거쳐 개인 치료실을 운영하는 치료사들도 의료보험사에 진료비를 (전액) 청구한다는 점에서 더 포괄적이다. 나의 심리치료사도 대학에서 심리학 디플롬(Diplom, 석사 학위에 준함)을 받고 치료사 수련 과정을 거쳤다. 국내 사설 연구소나 센터의 경우 치료요법에 있어서 선택의 폭이 넓고 병원과 마찬가지로 전문 인력이 있지만, 치료비 수납시 보험처리가 전혀 안 된다는 단점이 크다.

 

한국에선 돈 때문에 엄두도 못 내는 심리치료

 

심리치료 비용은 사실 제각각이다. (정신의학과의 경우 보험 적용되기 이전 기준으로) 가장 기본적인 면담이 1회당 8~10만원, 최면치료나 정신분석 등 특수한 요법을 사용하면 10~15만원. 심리 검사비는 별도로 또 나간다. 커플상담은 두 배로 비싸진다. 대중적으로 유명하거나 권위 있는 치료사들은 5~10배 더 청구한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들리기도 한다.

 

사실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정말 부담스러울 만한 비용이다. 당장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심리적 문제가 있거나, 치료가 너무 절실해서 다른 지출은 모두 확 줄일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짧아도 몇 달이 걸리는데 매주 그만한 비용을 지출하기란 정말 어렵다.

 

스무 살 때 경제적으로 독립한 이후로 한 번도 주머니 사정이 넉넉해본 적 없는 나로서도 한국에서는 심리치료에 관심은 있었지만 실제로 해 볼 엄두를 못 냈었다. 주변에는 비용이 부담스러워 치료 경과와 상관없이 중단해버린 지인들이 있었다. 경제력이 부족한 20대 초중반에 심리치료에 대한 편견까지 더해져, 부모님께도 못 털어놓고 다른 명목으로 용돈을 받아 충당하거나 아르바이트를 뛰어 푼푼이 번 돈을 ‘통 크게’ 쓰는 것도 봤다.

 

결국 한국에서는 현재 ‘사회적 편견’이나 ‘환자 비밀보장’ 문제보다도 ‘비용’이 가장 큰 장벽인 것 같다. 비싼 비용이 심리치료에 대한 접근권을 제한하는 크나큰 장벽이 된 까닭을 따지다보면, 정신건강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합의의 차원으로 되돌아간다. 이를 제도와 정책에 반영하는 정부와 국가기관의 상상력, 집행의 효율성, 예산 편성의 우선 순위 등에 대해 논하게 된다.

 

▶ 독일은 심리치료가 보편화되어 있어 관련된 만화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심리치료에 대한 풍자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일상적인 소재다. ⓒ출처: <PSOaktuell> psoaktuell.com


그렇다면 독일은 어떻게 해서 지금처럼 포괄적인 심리치료 지원제도를 갖게 됐을까? 독일에서는 공보험이나 사보험에 가입되어 있으면 심리치료 비용 전액을 보장받는다. 우선 비용적인 부담이 없으니 아주 심각한 문제가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쉽게 선택한다. 보편화돼있다보니 심리치료 받는다는 것이 사회생활에서 전혀 흉이 안 된다. 특정 심리적 장애나 질병 뿐 아니라 가까운 사람의 죽음, 이혼, 이직, 비만, 사고후유증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정기적으로 심리치료사를 만나는 경우도 많다.

 

독일 사회가 정신건강과 관련해 우리보다 더 나은 시스템을 갖추게 된 데는 사연이 있을 것이다. 여러 통설 중에 한 가지는 독일인들도 사실 우울한 민족이라는 점에 주목한다.(우울감 말고도 심리치료 대상이 되는 문제는 많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이를 예로 드는 것이다.) 근대에 두 차례나 큰 전쟁을 겪었고, 혹독한 산업화와 파시즘의 광풍으로 인해 통제와 규제가 촘촘한 ‘개인에게는 억압적인’ 사회구조가 오늘날까지 잔재한다. 또, 감정표현과 유희에 능하지 못하며 TV 프로그램도 재미없기로 악명 높다. 이렇게 웃을 일이 많지 않은 독일인들은 대다수의 지역에서 흔한 우중충하고 을씨년스러운 날씨도 견디고 살아야 한다.

 

우울한 사람들은 협조적인 시민이 될 수도, 성실한 노동자가 될 수도, 행복한 부모가 될 수도 없다는 것에 일찌감치 공감대가 형성된 것일까. 수십 년 간 개편을 거쳐 온 의료보험 시스템에 심리치료가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우려되는 심리치료의 상업화

 

환자도 의료 서비스를 받는 ‘고객님’이 되는 시대, 심리치료도 예외가 아니다. 심리치료에 대한 인지도와 호감도가 올라갈수록 이 분야의 상업화가 심각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높은 ‘가격’으로 인한 ‘소비자’들의 거부감을 사설 심리상담, 치료 연구소나 센터들이 모를 리 없다. 이에 따라 기관들 간에 인지도나 가격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몇몇 알려진 기관들은 서로의 이름을 거론하며 가격비교를 해 자기네가 더 저렴하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홍보하기도 한다. 심리치료에 대해 문의하는 글에 열심히 답해주며 OO센터를 추천하는 간접적인 전략도 흔히 보인다.

 

▶ 이동통신사 멤버십 제휴 할인까지 내세우며 마케팅하는 모 심리상담센터. 이 광고를 보면서 눈살이 찌뿌려지는건 나뿐일까.


치료라는 이름이 붙었으면 어쨌든 (준)의료행위로서의 윤리적 기준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상품을 파는 것과 다름없이 취급하기도 한다. 사정이 어려우면 할인해준다는 귀띔부터 ‘네티즌 추천 NO1’, ‘명품 상담’, ‘대한민국 최고’, ‘전국에서 입소문을 타고 찾아오시는’ 같은 표현들은 오히려 신뢰도를 확 떨어뜨린다.

 

안 그래도 심리적 어려움 때문에 사는 게 힘든 환자들에게는 심리치료에 대해 알아보는 과정에서 이미 피로가 극에 달할 것 같다. 게다가 고생해서 정보를 얻고, 결정을 내리고, 큰 비용까지 쓰며 찾아가기 때문에 ‘반드시 효과가 있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기대감이 자연스레 따라오게 된다. 치료에 결코 좋은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여러모로 볼 때, 제공기관에 상관없이 일정 기준을 충족한 심리치료 행위는 의료보험 적용대상이 되어야 할 것 같다.(환자 비밀보장도 물론 확실해야 한다.) 그래서 환자 부담 치료비를 대폭 줄이고 의료법에 따라 치료에 대한 광고 행위도 제한하면 좋겠다.

 

‘치유’는 총체적이고 다채로운 과정이다

 

나의 치료사 베아트리체는 언젠가 그랬다. 트라우마를 극복하는데 꼭 필요한 세 가지가 있는데, 그건 트라우마로부터 일정한 거리두기, 생활 속에서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되는 활동들을 하는 것 (뜨거운 목욕, 좋아하는 차 마시기, 요가 등 무엇이든), 그리고 좋은 관계들을 맺는 거라고. 나의 경우 남자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는 게 중요하다.

 

그녀는 이 말을 무심히 툭 던지듯 했지만 내게는 참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특히 심리치료의 한계를 암시한다는 점에서 그랬다. 위 세 가지 중에서 치료사가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첫 번째, 거리두기밖에 없지 않은가. 여기서 거리두기는 트라우마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언어와 사고를 통해 재경험하는 것이라고 해석된다.

 

그러고 보면 내가 경험한 심리치료는 서양 주류의학에 편입된, 본질적으로 차가운 행위였다. 엄격한 시간의 제약 속에서 이뤄졌고, 철저히 언어로만 교류했다. 내가 극도의 혼란이나 복받치는 감정으로 눈물을 흘릴 때에도 포옹도, 토닥임도, 함께 울어주는 반향 같은 것도 있을 수 없었다. 치료사도 편견이 많은 그냥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느껴져 라포(치료사와 환자, 혹은 내담자의 상호 신뢰관계) 형성도 쉽지 않았다. 손목을 긋거나 발작을 일으키지 않는 한,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나는 응급케이스가 아니었다.

 

트라우마 극복에 중요한 나머지 두 가지 요소는 결국 환자의 몫이다. 이는 치료의 영역을 한참 벗어나는 ‘치유’의 과제가 된다. 그리고 치유는 총체적 행위가 되어야하고, 될 수밖에 없다. 치유라는 단어가 너무 무겁거나 애매하면 자기탐구, 자기긍정, 자기연민 등 좀 더 구체적인 개념들을 불러와도 마찬가지다.

 

심리치료를 시도하는 용감한 사람이라면 일주일에 한번 50분의 시간만으로 삶이 달라질 것을 기대하기보다는 생활 전반에 걸쳐 예전과는 달라지고자 많은 것들을 새로 시도하고, 궁리하고, 꿈꾸고 그리고 해낼 수도 있다. 애써 덮은 상처를 긁어 부스럼 만들고, 매주 정해진 시간에 꼬박꼬박 사람을 만나고, 예측불허의 감정 상태에 대비하는 성가시고 까다로운 일. 즉 심리치료를 하면서도 삶의 여러 부문에서 능동적으로 스스로를 일깨우고, 곱씹고, 새로운 다짐과 실천들을 해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차곡차곡 글을 쓰고, 식물을 많이 기를 것이다. 멀리 이사를 가보거나, 지겨운 직장을 그만두는 이도 있을 것이다. 자꾸 상처만 주고받는 애인과 과감히 헤어지는 대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 세상을 다르게 보는 경험도 누군가는 할 것이다. 몰랐던 자기 자신의 어떤 부분에 전율하며 직업을 바꾸거나, 평생 반목하던 부모와 화해하는 일도 어떤 이에게는 일어날 것이다. 이러한 변화들은 심리치료 덕분만이 결코 아니다. 자신들의 뜨거운 의지와 뼈아픈 통찰로 긴 터널을 통과한 이들이 맞는 다채로운 치유의 순간들일 테다.

 

▶ 몸과 정신의 해방을 꿈꾸며 직접 그린 차트. 방에 붙여두고 매일 본다.  ⓒ 하리타

 

나의 치유는 몸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면 한다. 20대를 지나오며 나는 정신의 해방을 많이 이뤘다. 이뤘다고 말하니 너무 거창하지만 스스로에게 이쯤은 칭찬해주련다. 내가 나고 자란 사회에서 강요당한 억압과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고자, 내가 겪은 부당한 폭력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고 동의할 수 없는 것을 거부하고 다른 삶의 선택지를 갖기 위해 그 동안 페미니즘을 많이 읽고, 듣고, 말하고, 생각해왔다. 이를 통해 나는 분명 나의 상처를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신은 나날이 자유로워져도 내 몸은 여전히 감추고 움츠리고 망설이는데 익숙하다. 화를 품고 피로를 견딘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참 아팠다. 몸의 해독, 나아가 몸의 해방이 절실하다.

 

나의 몸 해방 프로젝트

 

이제 심리치료 편을 닫으며 ‘몸 해방 프로젝트’ 편에서 새롭게 이야기를 펼쳐보려 한다. 몸의 해독과 해방을 갈구하는 것이 나에게는 심리치료에서 확장된 총체적인 치유 여정이었고, 이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몸 해방 프로젝트는 몸의 독소를 빼내고 활기와 야성을 찾는데 도움이 되는 활동들이나 몸이 근질근질 거리도록 섹슈얼한 에너지를 충전시켜주는 테마들을 젊은 페미니스트들과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더 발전시키고, 소개하는 작업이다. 수년 간 산발적으로 해오던 것들도 있고, 최근에 들어 시작한 따끈따끈한 것도 있으며, 앞으로 제대로 해보고 싶은 것도 있다. 누드, 월경, 반소비와 자족, 자연과의 접촉, 스킨십, 운동, 섹스와 자위, 동성애와 양성애가 굵직한 주제들이다. 나는 공부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이론적, 관념적 논의가 아니라 생각과 행동이 만나 불꽃이 튀는 지점들을 파고들고 싶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어떻게 변하냐는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사람은 단번에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자주 경험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채식을 시작하고, 브라를 벗어던지고, 샴푸와 향수와 화장품을 죄다 없앴다. 또 어느 날 문득 일회용 생리대와 탐폰 사용을 완전히 끊게 되었다. 텃밭농사는 잡초 몇 포기 뽑는 것에서 시작되어 버렸다. 어느 여름 날 문득 알몸으로 일광욕을 했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공적으로 바이섹슈얼(양성애자)이라고 커밍아웃하게 되었다. 사소하게 반짝이는 영감에서 시작된 유쾌통쾌한 반란의 연속이었다. 난생처음 해본 이러한 일들은 모두 나를 뼛속까지 짜릿하게 깨웠고,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시작들은 실은, 놀랍게도 쉬웠다.

 

▶ 내가 상상하는 하리타,  초록의 이미지는 이것에 가깝다.  ⓒ출처: joanelliott.files.wordpress.com


지금 필명으로 쓰고 있는 ‘하리타’는 독일로 이주해오고 ‘첫 경험’이 유독 많던 그 무렵, 스스로에게 준 이름이다. 하리타는 인도에서 아직까지 이름에 많이 남아있는 고대 산스크리어로 ‘초록’이라는 뜻이다. 한자로 이름에 덧붙이는 호나 법명 혹은 영적 이름(Spiritual name)을 의도하고 찾아냈다. 물론 순례나 수행에 가서 스승님께 받아오면 좋겠지만, 꼭 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우선 ‘초록’은 자연의 색이자 가치로서, 나의 중요한 지향인 생태주의로 연결되어 마음에 들었다. 개인적 차원에서, 또 내가 속한 공동체와 사회, 세계라는 집단적 차원에서 녹색 전환이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기원과 다짐을 담는다고 해도 좋았다.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운 한국어 이름에 비해 ‘하리타’는 흔치 않으면서도 누구에게나 부르기 쉬워서 편리할 것도 같았다. 스스로에게 이름을 주었다는 것은, 적어도 나의 일부는 새 정체성으로 새로 태어나기를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이 ‘몸 해방 프로젝트’를 통해 궁극적으로 더 건강한 섹슈얼리티와 몸-마음의 연결성 회복을 추구한다. ‘온전히 자유롭고, 회복력 있고, 섹시하게’(To be fully free, resilient and sexy)라고 일종의 슬로건도 정했다. 나의 지극히 사적인 체험과 실천의 이야기로, 국경을 넘나드는 사회문화적 관찰-해석-만남이 뒤섞이는 해방의 춤판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 하리타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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