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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사회에서 길거리 성추행의 정치학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독일에서 심리치료하기⑪



※ 독일에 거주하는 20대 후반 여성 하리타님이 심리치료 과정을 거치며 탐색한 섹슈얼리티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자신의 상처를 짊어지고 국경을 넘어 문화적, 사회적, 제도적 차이 속에서 삶의 변화와 사회와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실천해가는 여정이 전개됩니다. –편집자 주

 

성추행을 당한다는 것은…

 

지난 칼럼에서 나는 개인의 트라우마를 ‘용서’라는 이름으로 섣불리 덮어버리기를 거부하면서, 그 트라우마를 만든 배경에 대한 ‘사회적 분노’를 토로했다. 나에게 폭력을 가한 사람뿐 아니라 무수한 가해자들을 발견하고, 그들의 폭력에 침묵하거나 은폐하거나 부추기는 사회에 분노하는 것이 용서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하다고 말이다.

 

특히,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폭력에 대해서는 사회적 분노가 지금보다 더 지속적으로, 더 거세게 일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중에서도 길거리 성추행-모든 여성들이 살면서 여러 번 겪는다고 일반화시켜도 무리가 없을 만큼 흔하며, 모든 문화권과 모든 시대에 존재해온 고질적인 폭력으로서의 성추행-에 대해 2016년 현재, 독일 남부 소도시에 거주하는 아시아계 젊은 외국인 여성으로서 얘기하고자 한다.

 

성추행을 당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심각한 성폭력 트라우마를 지닌 사람에게 발생하면 더욱 파괴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체험하고 있다. 거리를 걷고, 주말 저녁 술 한잔 하러가고, 모처럼 원피스를 입고 나들이를 하는 것처럼 매우 일상적인 차원에서 예고 없이 빈번히 성추행을 당하는 일은 “아 뭐야, 재수 없어”로 끝나지 않는다. 그때마다 그 ‘더 심각한’ 성폭력 트라우마가 연쇄적으로 상기되고 강화되고 확장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스쳐가는 눈빛이든, 잠깐의 손길이든, 툭 던진 한마디나 위협적인 몸짓이든 간에, 남성들에 의한 폭력은 한데 뒤엉켜 거대한 검은 형상으로 우뚝 서서 나의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쉽게 억누르기도 쫒아내기도 어려운 그 형상이 불러일으키는 남성에 대한 불안-공포-혐오는 한 패가 되어 내 생존본능에 새빨간 위험 신호를 보낸다.

 

독일 소도시에서 겪는 길거리 성추행


▶프랑스 남자 토마 마티외 그림책 <악어 프로젝트: 남자들만 모르는 성폭력과 새로운 페미니즘>(푸른지식, 2016) 중. 포식자 악어들의 껄떡대는 말들과 여성 성기를 움켜쥐는 길거리 성추행. 프랑스도 이 꼴인 모양이다.


“저는 23살 여자입니다. 저는 참 무섭습니다. 길을 걸을 때, 특히 밤이고, 골목길일 때, 남자가 걸어오면 무섭습니다. 혼자 자취를 하는데, 7층에 살지만 어떻게든 창문을 타고 넘어올까 무섭습니다. 화장실에 갈 때면 누가 옆 칸에서 몰래 찍고 있지 않을까 무서워 아래 위를 번갈아 쳐다봅니다. (…) 누군가는 저에게 ‘예민하다’고 말합니다. 네, 저는 예민한 여자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이렇게 경계하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언제 칼에 찔려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늘 안고 살아가는 평범한 23살 여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추모현장에 붙은 포스트잇에 적힌 내용의 일부다. 이 글귀를 번역해 독일여성 몇 명에게 들려줬다. 다들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한다. 강남역 살인 사건의 여파로 새삼스레 재조명되고 있는 길거리 성추행 문제는 뿌리 깊은 범지구적 사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 독일에서도 종종 길거리 성추행을 당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주로 서울의 만원 지하철이나 클럽, 노래방, 주점이 즐비한 번화가에서 남자들의 노골적 시선이나 고의적인 신체 접촉 같은 성추행을 겪었다. 지하철이 없고 인구 밀도가 적은 소도시인 이곳에서는 밤의 번화가 뿐 아니라 한적한 낮에도 성추행을 당한다. 수풀이 우거진 개천변, 지하도, 공원 같은 곳들에서.

 

남자들은 아래위로 훑는 시선과 함께 휘파람을 불고, 어김없이 경박한 어투로 “니하오!”를 외치며 들이댄다. 혼자보다는 여럿이 몰려다니는 남자들의 소행이 많다. 내가 조금 움츠러드는 기색을 보이거나 못 들은 척하고 지나가려 하면 더 기가 살아서 목소리를 높인다. 한참 쫒아오며 툭툭 건드리는 놈들도 있다.

 

인상을 쓰며 째려보거나 몇 마디 맞대응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면 잠깐 주춤하는 듯하다가도 이내 내가 멀어져 갈 때까지 더 길길이 날뛴다. 분하고 억울하게도, 길건 짧건 치마를 두른 날, 잘 보이는 액세서리를 한 날은 더하다. 나는 화장을 안 하고 향수도 안 뿌리지만, 그 둘이 보태지면 더 많은 성추행을 당하리라 짐작된다.

 

작년에 대학원 공부를 함께하는 케냐 출신의 흑인친구는 대중교통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짧은 밤길에 어떤 남성에게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고 쓰러졌다. (천만다행으로 치명적인 부상은 입지 않아서 신체적 외상은 곧 회복되었다.) 흑인 혐오인지 여성 혐오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확인할 길 없는 범죄였다. 독일여성들의 반응처럼, 한국의 독자들도 이와 같은 얘기가 새롭지는 않을 것이다. 독일의 도시-더구나 대도시도 아닌 곳의 치안은 다른 유럽 도시(파리, 런던, 로마, 바르셀로나 등)보다 한결 나은 편이라는 데도, 내가 사는 현실이 이렇다.

 

젠더, 인종, 문화와 교차하는 편견들

 

당하는 여성으로서, 나에게는 ‘자연스러운’ 편견이 하나 생겼다. 늦은 밤 혼자 귀가할 때, 축구경기를 보며 흥분하는 남자들이 모여 있는 술집에서, 남성관객이 많은 공연장에서, 나는 내 시야에 들어오는 남성들을 잠재적 가해자로 보고 경계하게 된다. 또 특정한 외모나 행동에 대해서 마치 조건반사처럼 불안감과 공포심, 나아가 혐오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른바 ‘마초남’ 코드. 과장된 문신이나 피어싱, 밀리터리 패션, 술에 취해 풀린 얼굴과 비틀대며 활보하는 몸짓, 거리에서 성기를 내놓고 소변보기, 무리지어 다니는 10대 후반 청소년들(이곳 십대들은 교복을 입지 않고 술담배를 공공연히 많이 하고 발육이 빨라서, 보기에 성인남자와 엇비슷하다)이 여기 해당된다. 이들을 목격하거나, 지나치거나, 대면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불쾌-불안-초조 같은 감정 상태는 그 순간이 지나가도 오래 지속되곤 한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마초남’ 편견은 으레 통용되어 온 것이라 사회적으로 크게 논란의 대상은 아니다. 문제는 인종과 출신 문화권을 기준으로 한 편견이다. 잠재적 피해자로서 나는 다음 문장에 어느 정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북아프리카/ 아랍/ 무슬림계 남성들은 빈번한 성추행 가해자다.’

 

내 경험만 놓고 보더라도, 가해남성들이 백인 유럽인인 경우는 아직 없었다. 대다수가 북아프리카/ 아랍/ 무슬림 이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이와 유사한 ‘직접 경험’ 사례는 외국인들 사이에서 회자되기도 하고 온라인 상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여러 시간과 공간에서 수집된 부정적인 사례들은 하나의 편견이 되어 축적되고 공유되고 강화된다.

 

▶ 재독한인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 중 일부. ‘아랍인’들로부터 절도와 추행을 당한 글쓴이는 편견을 의식하면서도 분노와 혐오를 드러냈다. 댓글은 아시아 여성으로서의 입장을 독일여성과 구분해서 말하고 있다. ⓒ출처: 베를린 리포트

 

비슷한 편견은 독일 미디어와 여론에도 자주 보인다. ‘북아프리카/ 아랍/ 무슬림 배경의 이주민 남성들은 젠더평등 의식이 현저히 떨어지며, 이들 때문에 독일 내 여성폭력이 증가하고 있다’는 정치적 프레임이다. 주로 우파 성향, 민족주의 성향의 미디어를 통해 최근 몇 년 동안 꾸준히 유포되어 왔다. 이러한 여론은 반(反)이주민, 반(反)외국인, 반(反)난민 정서와 결합되어 편견을 공고하게 만드는 장치가 되어왔다.

 

특히 2016년 새해 첫 날, 독일 퀼른 등에서 집단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고 용의자 상당수가 해당 지역의 이주민이나 난민 신청자들로 밝혀졌을 때는 한동안 모든 매체가 이 정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강간(rape)과 난민(refugee)의 합성어인 ‘Rapefugee’가 회자되기까지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한 민족을 말살하는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 정책을 온 나라가 협력해 추진한 역사를 가진 독일의 풍토에서, 독일 국민들은 인종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 혐오 비슷한 얘기만 나와도 집단 알러지를 일으킨다. 독일의 학교에서는 역사 시간에 ‘죄의식을 가르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따라서 개개인은 인종이나 민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상당히 조심스럽다. 체면 때문에, 혹은 인종차별주의자 소리를 들을까 두려워서, 사람들은 자신의 부정적 견해를 감추는 경우가 많다. 특정 인종이나 문화권에 대한 독일인들의 편견은 실은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그 규모와 깊이가 더 클 것이다.

 

누가 피해자가 되고, 누가 가해자가 되는가

 

여기서 나는 먼저, 편견은 사실 가해자 쪽에도 작용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바로 아시아 여성에 대한 편견이다. 나는 이것 때문에 우리는 더 자주 성추행의 표적이 된다고 의심하고 있다. ‘검은 눈, 검은 머리, 작은 체구’의 아시아 여성에 대한 흔한 편견은 “아시아 여성=치마와 화장 등 꾸밈새가 화려함=수줍음 많고 수동적임”으로 요약할 수 있다.

 

아시아 여성들은 (잠재적) 가해자들에게는 더 만만한 공격 대상이다. 어차피 이 여자들은 찍소리 못하고 당해줄 거란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언어가 서툴고 현지 법규에 어두워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법적으로 대응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같은 외국인이어도 피부색과 생김새가 비슷한 서양 여성들에 비해 한눈에 골라낼 수 있다. 아쉽지만 아시아 여성들이 서양 여성들에 비해 대체로 체구가 작고 의사 표현이 덜 활발하다는 경향성은 ‘나약한 이미지’로 연결된다. 편견은, 여러 방향에서 교차되고 있다.

 

▶ 길거리 성추행을 비판하는 포스터들. 내 옷차림은 초대장이 아니다, 성추행은 칭찬이 아니다 등. 아시아 여성의 얼굴 밑에 “나는 당신의 게이샤, 중국인형, 아시안 페티쉬가 아니다”라고 적힌 게 눈에 띈다. ⓒ출처: mic.com

 

내가 앞서 나의 편견이 자연스럽게 생겼다고 말한 것은, 편견은 나쁜 것이니 마땅히 없어야 한다고 간단히 얘기하는 많은 ‘지성인’들을 겨냥한 것이다. 편견은 사회적으로 해악을 끼친다. 현실을 보는 시선이 고정되어 버린다는 점에서, 편견은 제약이고 오류이다. 다수가 편견을 가질 때, 편견어린 현실 인식이 실제 현실에 자기예언과도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하지만 길거리 성추행의 맥락에서 물어 보자. 여성의, 남성에 대한 편견은 애초에 왜 생기나?

 

나, 피해여성은 직접 겪은 경험을 우선적인 데이터로 삼아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의 이미지를 만든다. 다음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이때 가해자들 간의 공통점이 판단 기준이 된다. 눈에 보이는 기준만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편견이라고 쉽게 정의한다면, 이 ‘편견 생산 기제’는 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사람의 인지활동에서 빈번하게 쓰는 기능이 사물이나 개념을 공통점, 차이점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잠재적 피해여성은 자신의 공통점 분류 능력을 활용해, 감각기관으로 들어온 수많은 정보들을 효과적으로 걸러냄으로써 ‘누가 잠재적 가해자’인지 나름의 판단을 내리고 이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나는 ‘편견에 치우친 사람’이라는 비난에서(이 비난은 내 내면에서도 자주 들려온다)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 세상에는 수도 없이 많은 편견이 있고, 편견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들이 여러 형태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이 길거리 성폭력 사안에 있어서만큼은, 자기방어에 많은 에너지를 써야만 하는 위험 때문에 나오는 생존 본능으로 먼저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진 사고’ 어쩌고 하는 비난부터 할 게 아니라.

 

유럽인 백인친구들과 논쟁하다

 

요즘 가까운 친구들과 있을 때, 길거리 성추행을 둘러싸고 내가 가진 ‘편견’의 문제를 자주 대화 소재로 끄집어낸다. 계속 고민하는 지점이기도 하고, 비(非)아시아, 비(非)여성들의 관점이 궁금해서다.

 

한번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금발 백인여성인 M에게 내 고민을 얘기했다. 나도 너처럼 인종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에 반대하지만, 내가 당한 성추행 가해자들의 정체성 때문에 그런 정치적 신념에 균열이 와서 괴롭다고 말했다. 그러자 M은 평소 내게 보이는 공감적 태도 없이 다소 건조하게 답했다. 자신이라면 그때 가해자들이 이곳에서 이주민, 소수자로서 겪는 아픔과 어려움을 생각해볼 것 같다고.

 

의외의 답에 나는 아연실색했다. 그리고 이내 발끈했다. 그들에게 성추행을 당한 적이 없는 당당한 체격을 가진 금발의 백인 유럽여성인 너는 그런 ‘고귀한’ 포용적 태도를 취할 수 있겠지만, 일상적으로 그런 일을 겪고 사는 나는 바로 네가 연민하는 그 ‘소수자’들이 자기 발아래 두는 먹잇감인 셈이라고.

 

M은 내가 그녀의 아킬레스건인 ‘백인 유럽인 특혜’를 입에 올리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렇지만 내 말에 기분이 상한 티가 역력했다. 우리의 대화는 그 자리에서는 어떻게든 무마가 되었지만 나는 곱씹어볼수록 친구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어 나중에 문자까지 보냈다. “네 말대로 그들이 나와는 다른 측면에서 더 어려운 처지일 수 있다는 점은 잘 알겠어. 그런데 자기 처지가 어렵다고 남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어? 폭력은 그 자체로서 그냥 나쁜 거야. 그런 식으로 남성의 폭력을 더 용인해선 안 돼.” 친구도 낙담한 내 심정을 마침내 공감했는지 며칠 뒤 전화를 걸어왔다. 한참 길게 통화하고 나서야 마음이 풀렸다.

 

매주 나가는 페미니즘 모임에서 만난 H는 스웨덴 출신의 백인여성이다. 내 고민을 듣고서 그녀는 자기가 겪은 혼란스러운 경험을 들려줬다. H는 최근 시리아 난민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남성을 대낮에 길에서 마주쳐 한참을 대화한 적이 있다고 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 남자가 ‘독일에 망명 와서 제일 어려운 점은 친구가 없다는 것’이라며 외로움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알다시피 나도 남잔데 여자가 필요하다’, ‘당신같이 참 아름답고 마음씨도 고운 여자가 좋다’며 눈을 빛내더라는 것이다.

 

그녀는 기분이 확 상해서 자리를 뜨면서도 혼란스러웠단다. 저 사람의 상식 선에서는 이게 성추행이 아니고, 자기네 문화권 여성들에게는 하지 않는 예외적인 존중의 태도로 진심어린 칭찬을 한 것뿐이 아니었는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를 마냥 관용해야 하는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자국에서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을 환영하고 복지국가 시민으로서 윤리의식을 갖춘 그녀도 성폭력에 있어서는 약자인 여성이며, 스웨덴이나 독일보다 성평등 지수가 훨씬 뒤떨어진 곳에서 고군분투하는 여성들에게 공감하는 페미니스트이기도 했던 것이다.

 

백인남성들의 생각을 듣다

 

한편, 아버지는 안정적인 직장에서 평생 돈을 벌었고 어머니는 육아와 살림, 돈벌이를 병행하는 ‘전통적’ 가정에서 자란 백인남성 N은 대학 때 페미니스트 여성들과 어울렸고, 큰 차별 없이 자란 여동생과 여자친구를 통해 ‘여성’을 간접 경험할 기회가 많았던 사람이다. 그러나 N은 주변에 성추행 피해 사례가 별로 없었다며, 내 이야기에 크게 공감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N은 오히려 잠재적 성폭력 가해자로 낙인찍힌 북아프리카/ 아랍/ 무슬림 남성 그룹의 심리에 관심을 가지고 자기만의 해석을 내놓았다.

 

간단히 말해 독일 사회에서 널려있는 성(sex)과 관련한 문화적 코드들이 그들에게는 지나치게 직설적이고 개방적이라서, 잘못된 신호(wrong signal)를 주는 것 같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정류장마다 대문짝만하게 붙어있는 콘돔 공익 광고에도, 학생들이 보는 캠퍼스 잡지에도, 섹스에 대한 묘사나 담론이 별 여과 없이 전면에 등장한다.

 

▶ 트램 정거장에 게시되어 있는 건강한 성생활을 권장하는 공익광고.  왼쪽은 “전 남친이 아직도 당신을 가렵게 하나요? 의사에게 가세요”라는 문구와 질가려움증을 겪는 여성 이미지. 오른쪽은 “위 혹은 아래. 콘돔을 사용하세요”라는 문구와, 오르고 내리는 엘리베이터 그림.  N은 이 광고가 너무 직접적이고 천박한 느낌이라 마음에 안든다고 했다. © 하리타

 

이슬람권에서는 섹스는 물론 성에 관한 전반이 아직도 철저한 금기인데, 이러한 문화권에서 살다가 온 남성들이 어느 날 갑자기 독일에 떨어져 주변을 둘러보면 무슨 생각을 하겠냐고 N은 반문했다. ‘아 섹스가 이렇게 가볍고 캐주얼한 거야? 그럼 여기선 맘껏 즐길 수 있겠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건 아닌지 궁금하다고 했다. N의 논리를 정리하자면, 다른 문화권에서 온 이주민 남성들이 행하는 성추행은 남성으로서 누리던 수많은 특권을 하루아침에 잃고 규범과 가치관에 혼란을 느끼는 와중에 나오는 이상행동이라는 것이다.

 

또 한 명의 백인남성 K는 순순히 인정했다. 자신은 덩치 큰 백인남자라서 내가 느끼는 감정을 모른다고 말이다. 그는 자신의 신체적 특징에서 오는 이점을 부정할 수 없고, 그 때문에 치안이 좋지 않은 중남미 지역을 여행할 때도 자신은 한 번도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고도 했다.

 

K역시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자국에 이주민이나 외국인, 난민이 많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 지지하는 입장이다. 그는 성범죄 문제를 핑계 삼아 외국인 혐오 정서를 표출하는 무리들이 역겹다고 했다. 이주민이 이렇게 많지 않을 때에도 백인 독일인 남성에 의한 여성폭력은 늘 있어왔고, 지금도 파스나흐트(Fastnacht, 기독교문화가 많이 남아있는 독일 남부의 카니발 축제)나 가을 옥토버페스트(맥주 축제) 때마다 꼭지가 돌도록 술을 마신 남자들이 추행, 강간, 폭행을 일삼는데, 하도 닳고 닳은 문제라 더 이상 신문에 나오지 않는 것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마치 이주민들이 새로운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외국인 혐오 세력들이 위선을 떨고 있다는 것이다.

 

K의 이야기는 시원한 지적이고, 나도 동의한다. 서구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남성들은 젠더 평등이 좀더 구현된 사회분위기의 압력과 강한 법적 구속에 길들여진 것뿐, 뒤틀린 욕망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걸 여기서도 여전히 성행하는 포르노와 성매매, 가정폭력 사건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외국인, 이주민만 탓하는 건 위선’이라는 양심선언이 현실에서 곪아가는 인종 갈등과 성폭력 피해를 해결해주진 못한다.

 

낡은 관념의 집을 허물기 위한 실천들

 

나는 길거리 성추행 문제에 있어서 이 인종적 편견을 그만두고 싶다. 아니, 그만둔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깊이 고찰하고 행동하고 싶다고 말하겠다. 성적으로 나를 학대하고 추행한 남성들에 대한 용서는 유보하겠다는 입장이 내 안에서 명확한데 반해, 아직 무엇도 저지르지 않은 잠재적 가해자로서의 남성들에 대한 편견은 껄끄럽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적대감과 경계심은 일상 생활에 결코 긍정적 요소가 아닐뿐더러, 무수한 잠재적 우호와 연대의 기회를 차단하기 때문이다. 또한 안 그래도 이 사회에 넘쳐나는 편견의 벽과 혐오의 물결에 내 몫까지 보태고 싶지 않다.

 

허나, 이것은 진정한 나의 욕망인가? 아니면 내 머릿속에 있는 쿨한 지성인, 간지 나는 좌파 이미지에 불과한가. 아니면 좀 배우고 깨쳤다고 똘레랑스(관용)의 시혜를 베풀어보겠다는 심보인가. 나는 아직 ‘덜 당해봐서’ 관용, 포용, 화합을 말할 수 있는가? 잘 모르겠다. 다만 궁극적으로 나는 경계를 넘나들며 젠더에 대한 낡은 관념의 집들을 허물고 새로 평평하고 열린 집을 짓는 ‘목수’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다.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을 궁리해본다. 무시와 회피 말고, 자책이나 자기검열 말고, 우리의 전략은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 대면해야 한다. 더 큰 공격을 당할 위험 부담이 따르고 심장 떨리는 공포에 에너지 소모가 크더라도, 자꾸 더 대면함으로써 가해남성들의 견고한 사고를 깨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대면해야 할까. 얼굴 붉히며 성난 언어로 꾸짖기, 과장된 몸짓으로 대꾸하기. 신고하겠다고 으름장 놓기? 내가 속한 페미니즘 모임에서는 비꼬기와 미러링(거울처럼 상대방의 언행을 똑같이 따라 해서 상대에게 역지사지해볼 기회를 주는 것), 그리고 가시 박힌 유머가 성추행 가해자들의 허를 찌르는 효과가 있었다는 얘기도 오갔다. 공격성이 덜하되 메시지는 더 분명하기 때문에 가해자들이 쪽팔려서 꼬리를 내리더라는 것이다.

 

50대인 나의 심리치료사 베아트리체는 시계를 거꾸로 돌린다. 알리스 슈바르처(Alice Schwarzer: 독일의 페미니즘 잡지 ‘엠마 Emma’의 창립자이자 발행인) 등의 페미니스트들이 1970년대 독일에서 여성들의 안전한 길거리 보행을 위해 운동하던(캐나다에서 시작된 슬럿워크 Slut Walk나 우리나라의 달빛시위와 비슷한 맥락) 시절을 잠시 소회했다. 그러더니 내게 “좋은 사람, 나쁜 사람” 프레임을 제안했다.

 

남자들을 볼 때 인종이나 출신 배경을 암시하는 생김새에 대한 관심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행위를 기준으로 한 ‘좋은 혹은 나쁜 남자’라는 범주만 두라는 것이다. 이는 한 개인이 속한 수많은 층위와 갈래의 다중 정체성들에 민감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자체 내장된 필터링 습관을 거부하는 것이므로 많은 노력이 요구될 것이다.

 

▶ 동네 축제에서 자신이 속한 나라의 전통춤을 선보이는 난민들. 음악이 시작되길 기다리며 검은 옷을 입고 일렬로 서 있다. 남녀노소 흥겹게 따라 추다가 마지막에 사람들이 둘러선 거대한 원이 만들어졌다.  ⓒ 하리타

 

나는 또 다른 실천으로써 북아프리카/ 아랍/ 무슬림 난민 남성들과 만날 수 있는 프로그램에 나가보았다. 내가 편견을 갖고 바라보던 난민 남성들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지속적인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과정이었다. 정부가 시간과 예산을 핑계로 대충 지어준 무미건조하고 삭막한 수용소보다는, 민간 차원에서 카페나 주민센터 공간에 다과와 보드게임을 준비해놓고 사람들을 초대하는 자리가 훨씬 편안하고 즐겁다.

 

축구 얘기는 백발백중 안전한 대화 소재인데 아쉽게도 내가 전혀 관심이 없다. 이들 중에는 종종 한국 드라마를 거론하는 한류 팬들도 있다. 독일어나 영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연신 스마트폰 번역 앱을 두드리기 바쁘고, 청하지도 않은 가족 사진을 보여주며 나의 시덥잖은 얘기에도 즐거워한다.

 

물론 몇 번 봤다고 사람 속내를 어찌 알까. 쿠키를 사이에 놓고 한가로운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는 내게는 한없이 부드러워도, 이들이 자기 부인을 어떻게 대할지, 길 가는 여자들의 훤히 내놓은 살결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내 마음이 한결 누그러지는 것을 느낀다. 오길 잘 했다.

 

다시 길거리 성추행 문제로 돌아와서, 우리는 안전하지 않은 사회 시스템을 폭로하며 거기에 균열을 내고, 끊임없이 다른 세상을 그려내는 작업을 계속해야할 것이다. 여성학은 길거리 성추행이 사소하고(trivialization) 평범한(normalization) 영역이라는 평가절하를 거부하며 더 크고 중요한 담론들을 계속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연구소나 시민단체들은 성추행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를 대상으로 예방과 대응, 회복과 교육 프로그램 등을 더 적극적으로 실행해나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친구끼리, 가족과 학교와 동네와 직장에서 여성들끼리 더 말해도 된다고, 다 말해버려도 된다고, 서로 격려하며 더욱 풍부한 증언과 주장들을 모아야 한다. ▣ 하리타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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