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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이 순간의 ‘나’에게 접속하라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독일에서 심리치료하기⑧



※ 독일에 거주하는 20대 후반 여성 하리타님이 심리치료 과정을 거치며 탐색한 섹슈얼리티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자신의 상처를 짊어지고 국경을 넘어 문화적, 사회적, 제도적 차이 속에서 삶의 변화와 사회와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실천해가는 여정이 전개됩니다. –편집자 주

 

“광채 없는 삶의 하루하루에 있어서는 시간이 우리를 떠메고 간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이 시간을 떠메고 가야할 때가 오게 마련이다.” -알베르 까뮈 <이방인>에서

 

자기연민과 분노에 사로잡힐 때


근 몇 주를 하루하루 싸우듯 보냈다. 만사 의욕 없이 무기력한 내 마음과 싸우고, 그래도 해내야 할 일들과 싸우고, 가까운 친구나 파트너의 사소한 말과 행동에 생채기 입어 싸우고, 더 심해진 비염과 월경전증후군과도 싸웠다.

 

어떤 낮들은 평범한 분주함으로 보냈다. 운 좋게 발견한 논문 덕분에 생각에 진전이 있었고, 새로 배운 독일어 단어들을 책상머리에 써 붙였다. 친구들을 만나 깔깔대기도 했고, 모처럼 떡국과 김밥도 해먹었다. 봄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거나 봄비에 젖은 꽃들을 한참 구경도 했다.


▶ 해리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디멘터’ 

출처: monstrumclassicum.files.wordpress.com

 

그러나 많은 밤들엔 디멘터(해리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괴생물체. 행복감과 영혼을 빨아먹는다)처럼 축축하고 오싹한 불행감이 스멀스멀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 예민해서 매사가 어려울까’, ‘나보다 더한 일을 겪고도 명랑하게 잘사는 사람도 많은데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언제까지나 이 고민과 이 기분에 시달리며 살겠지’, ‘그때 달리 대처했으면 난 달라졌을까? 아냐, 난 원래 이래’, ‘늘 열심히 살아왔는데 딱히 더 행복해진 것도 없네, 뭐 이래. 다 때려치우고 싶다…’ 쓸데없는 비관과 자기연민이라 해도 별 수 없다.

 

툭하면 화가 난다. 속상하고 서운한 일, 당황스럽고 수치스러운 일, 한심하고 답답한 일도 모두 분노로 수렴되는 듯 타고 남은 감정의 끝은 자꾸 분노다. 화가 치밀면 머리에 혈압이 오르는 느낌이 들며 두통이 생기고 코가 막힌다. 명치끝이 아리고 숨이 가빠지며 곁에 있는 무엇이든 집어던지고픈 충동이 든다. 자주 고함을 치고 싶다. 트라우마를 재처리하는 과정에서 자꾸 ‘피해자’로서의 기억과 감정을 되살려내서 그런지, 일상에서도 조금만 피해를 입는 것 같으면 과민반응하게 된다.

 

이렇게 폭주하는 분노는 때로 적절히 조절되지 못하고 터져 나온다. 친한 친구와 보드게임을 하다 패배에 연연하며 떼쓰듯 불쾌감을 드러내는가 하면, 아시아 여성을 만만히 보고 ‘니하오’를 연발하며 추근대는 흔한 ‘길거리 추행’ 상황에서 평소 무시로 일관하던 것과 달리 공격적으로 맞서기도 했다. 유색인종으로 여러 불편과 불이익을 감수하며 유학생활을 하는 나와는 다른 처지의 친구들에게 ‘너희처럼 혜택 받은 계층은 날 이해 못 한다’며 다분히 시비조로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나답지’ 않은 행동에 주변 사람들은 놀라고 나는 더욱 자괴감에 빠졌다.

 

홀대했던 감정과 기억들이 지하에서 나오다

 

EMDR(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으로 트라우마 기억을 재처리했던 첫 시간, 치료사는 가방을 챙기는 내게 몇 가지 주의를 줬다. 좋지 않은 기분이 지속될 수 있고, 돌발적인 충동이나 악몽에 시달리거나 몸이 아플 수도 있다고. 응급상황이 생기면 바로 연락을 달라고.

 

그렇다. 나는 내 마음 속에 묻혔던 가장 불행한 기억들을 구태여 끄집어 올려 언어화하고 있고, 구체적 이미지로 여러 번 상상해내는 작업을 반복하는 중이다. 사람이 잘 망각하고 어떤 경험은 제대로 처리할 틈도 없이 묻히는 건, 그 나름대로 마음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마음이 영영 고장 나지 않도록 무리한 작업은 수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 타고난 방식을 거스르며 ‘치료’를 한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 참 아슬아슬 위험한 거다.

 

▶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 피트 닥터, 2015)에 나오는 캐릭터 ‘슬픔’


내 마음은 일생의 대부분 시간 동안 내가 외부세계(대한민국, 서울, 산업화된 21세기 사회,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 등)에서 낙오되지 않고 살아가도록, 즉 생산성이나 효율성이나 성과 같은 것들을 많이 낼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작동해왔다. 늘 부지런히 자기계발하고,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사람이 되려면 내 마음은 거기에 동기부여가 되는 감정과 기억들을 우대해 원료로 삼고, 그에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은 빨리 밑바닥으로 가라앉혀 버려야 했을 것이다.

 

작년 개봉한 픽사와 디즈니사의 합작 애니메이션 <인 사이드 아웃>이 통찰하듯이 슬픔, 좌절, 우울 같은 감정과 이를 불러오는 경험들은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회복과 통찰을 가능케 하는 원료인데…. 너무나 자주 홀대받았다. (독특한 발상으로 사람 마음의 작용과 발달을 다룬 이 작품에서 ‘슬픔’ 캐릭터는 주인공 소녀의 머릿속에서 슬픔과 관련된 감정을 관장하는데, 목소리나 외모, 분위기가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늘 쳐져있고 우울하며 매사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쉽게 상처받고 굼뜨다. 우리 사회가 슬픔과 같은 감정들을 골칫덩어리에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해온 건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

 

심리치료는 이들이 마침내 마음 한가운데 무대로 뛰어들어 ‘격쟁’(擊錚, 조선시대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임금이 행차하는 길가나 궁궐 안으로 들어가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하소연하던 제도)하도록 지하실 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악몽 속에 자주 등장하는 내 첫 반려견 N

 

의식 수준으로 올라오지 못한 잔재들은 꿈을 주도한다. 원래도 나는 아침까지 기억하는 꿈을 참 많이 꾸는 편인데, 요즘 잦아진 악몽에선 몇 해 전 강아지 때 데려와 기른 나의 첫 반려견 N이 단골로 등장한다. 여러 가지 변주가 있지만 대체로 N은 꿈에서 곤란한 지경에 처해있다.

 

한번은 N이 철조망이 둘러진 무시무시한 개 훈련소 같은 곳에 갇혀서 멍이 들고 피 흘리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N을 구하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한 채 잠에서 깨려던 차. 이것이 꿈임을 자각한 나의 의식이 뛰어들어 꿈의 플롯을 바꾸어버렸고, 나는 가까스로 N을 구해 품에 안고 울다가 깨었다. 꿈은 실재보다도 더 뚜렷한 감정의 결과 폭을 동반해, 힘에 부친 나는 가슴이 너무 아파 낑낑대다 퍼뜩 눈을 떴다.

 

그때 내 잠꼬대를 듣고 있던 파트너가 나를 안아주면서 “N은 괜찮아. 잘 지내고 있어. 아픈 건 N이 아니라 너잖아”라고 말해줬다. 나라고? 잠결에 그 말을 들은 나는 다음 순간 아이처럼 징징대며 웅얼거렸다고 한다. “그때 학교 애들은 진짜 나한테 못되게 했어. 내가 아무 짓도 안했는데 따돌렸어. 진짜로 때린 것보다 더 나쁘게 했어”, “엄마는 못들은 척 했어.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데…”

 

왜 자꾸 N이 나타날까. 꿈에서 N이 아프고 괴롭고 위험에 처해있다는 게 나의 마음상태를 보여주는 걸까? 그렇다면 그건 아마도 내게는 N이 스스로를 동일시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N은 내가 스스로를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고 조건 없이, 의심 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쏟아 부었던 자식 같기도 하고 애인 같기도 한 존재다. 아직 어리고 말 못하는 개에 불과한 N에게 나는 가장 많은 비밀을 털어놓았고 가장 많은 눈물을 보였으며 그렇게 끈끈한 애착을 두었다. 이제 N은 꿈속에서 내가 되어 나 대신 아파준다.

 

트라우마 기억을 통제하는 이미지 트레이닝

 

마냥 이렇게 지낼 순 없다. 대책이 없는 건 아니다. 치료사는 힘든 세션을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할 때마다 기억을 다시 안전한 곳에 닫아둘 수 있도록 돕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소개했다. 이때 특정 중심 테마와 구체적인 상황 속에 스스로를 두게 된다.

 

▶ 무지개 빛깔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를 상상해보라.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지? 시중에서 구할 수도 있다! ⓒ출처: amazon.de


비디오 테잎: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나를 상상한다. TV에서는 내 트라우마 기억들이 재생되고 있다. 화면의 영상이 점차 흑백으로 바뀌고 서서히 페이드아웃 된다. 비디오 테잎을 꺼내서 잠금장치가 있는 벽장에 가지런히 꽂아둔다. TV앞을 떠난다.

 

무지개 샤워: 따뜻한 물이 가득 쏟아져 내리는 샤워기 밑에 서 있다. 물은 아름다운 무지개 빛깔이다. 이 물과 함께 트라우마 기억들도 씻겨 내려간다. 샤워가 끝나면 나는 산뜻하고 보송보송한 기분이 된다.

 

금고: 나만이 아는 은밀하고 아늑한 방에 금고가 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기억들을 머릿속에서 잠시 꺼내 그 금고 속에 넣고 자물쇠를 잘 채운다. 나는 금고 속에 있는 것들이 안전할 거라는 확신이 있다. 방을 떠난다.

 

구름: 하늘에 떠 있는 뭉게구름을 불러온다. 구름 속에 내 기억들을 꽁꽁 숨겨두고 다시 하늘로 날려 보낸다. 이제 구름은 아주 멀리 있어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위 예시들에서 테마는 서로 다르지만 테마 안에서 떠올리는 이미지들의 공통점이 있는데, 실체가 없이 추상적인 ‘기억’을 사물화한다는 점이다. 트라우마 기억이 구체적으로 물화되면 그것들을 가두고, 날리거나 흘려보내는 상상을 통해 일시적으로 자유로워짐으로써 기억을 통제한다고 느낄 수 있다. 통제권이 중요한 이유는,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선택권이 없고 ‘나쁜 기억이 나를 언제 어디서 얼마큼 괴롭힐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좌절감과 불안, 무기력감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이미지가 더 연상하기 쉽고 친숙한지는 개인마다 다른데, TV를 거의 보지 않는 나에게는 비디오 테잎 테마가 잘 와닿지 않아 무지개 샤워로 연습했다.

 

또 작고 까만 벌레가 등장하는 테마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내가 상상하는 벌레들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석탄 나르는 벌레들과 유사하다. 내가 부탁하면 수십 마리의 까만 벌레들이 나의 나쁜 기억들을 작은 몸에 이고 지고 내 몸에서 스르르 빠져 나간다. 나는 이 귀여운 벌레들이 엉금엉금 바닥을 기어 우리 집 화장실 구석에 있는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다. 이 착한 벌레들은 내 편이어서, 내 기억을 잘 보관하고 있다가 내가 부를 때 다시 찾아와준다.

 

▶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걸작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등장하는 석탄 나르는 벌레들.  탐욕적인 인간들이 마법에 걸려 온천에서 착취당하는 벌레가 되었다는 설정이다.

 

이미지 트레이닝은 집중한 상태에서 제대로 시행하면 실제로 효과가 있다. 끓어올랐던 감정이 가라앉고 머릿속이 좀 정리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마음의 평화를 구하는 시도들

 

이밖에도 나는 심리치료를 시작할 즈음부터 다양한 테크닉을 꾸준히 시도하며 안정과 평화를 구하려고 노력중이다. 처음에는 하루하루 버티기 위한 몸부림이었는데, 벌써 여러 달을 해오면서 어떤 것들은 내 일상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절실히 깨달은 것은 그 동안 살면서 내가 스트레스를 그 때 그 때 해소하지 않고 쌓아두고 억누르는 게 습관이었다는 점이다. 앞서 얘기했듯 부정적인 감정이 찾아오면 그건 잠시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돌보며 쉬어가야 한다는 신호인데, 나는 그저 당장 닥친 일들을 해내기 바빠 모른척하기 일쑤였다. 기껏해야 잠을 좀 많이 자거나 군것질을 하는 정도였을까.

 

꼭 소개하고 싶은 나의 테크닉 중 첫 번째는 ‘지금 이 순간 느끼기’다. 어떤 생각과 감정에 격렬히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 몸은 외부 세계를 잘 인지하지 못한다. 날이 더운지 추운지, 눈앞에서 무엇이 움직이는지에 대해 무감하다. 그 때 의식적으로 오감에 주의를 집중해본다. 내가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즉시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며 무슨 냄새가 나는지 맡고, 미세한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본다. 바닥을 딛고 선 발에서 어떤 감각이 전해지는지, 손등을 스치는 공기는 어떤 느낌인지. 감은 눈꺼풀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어떤지. 내 몸 구석구석, 척추와 어깨, 엉덩이, 다리 등에 차례로 집중해본다.

 

그러면서 마음이 안정된다고 느껴지면 눈을 반짝 떠서 사방을 둘러보며 주변 사물에 하나하나 눈길을 둔다. 그러면 아, 나는 지금 이곳에 있구나.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이 순간을 살고 있구나 라는 일종의 경이감에 정신이 번쩍 든다. 특히 가까이 산이 마주보이는 한적한 우리 집에서 이 ‘1분 명상’을 할 때면 신선한 숲 공기가 느껴지고 새소리와 아득한 교회 종소리가 들려오면서 고요함과 생동감을 동시에 느낀다. 나에게 어떤 일이 있었든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존재하는 ‘나’라는 실체에 다시 접속하는 것이다.


▶ Beat Foellmi의 앨범 <Orthodox Approach> 자켓 사진.


또, 요즘 노랫말 없이 타악기를 주로 사용한 연주음악을 많이 듣는다. 몇 해 전 얼떨결에 얻은 Beat Föllmi의 <Orthodox Approach> 앨범을 수없이 반복해서 듣고, 스코틀랜드에서 직접 녹음해온 40여분짜리 싱잉볼(singing bowl, 명상할 때 쓰는 법구) 연주 파일을 자꾸 되감는다.

 

타악기 음악이 다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경험한 곡들은 대체로 몇 개의 리듬이 번갈아 끝없이 반복되는 단조로운 구성에서 다양한 악기와 타법을 통해 곡에 추상적인 인상을 더해 나가는 것 같다. 그 특유의 분위기가 내게는 명상적이라서, 음악이 나를 다른 차원으로 나를 데려가는 것만 같은 해방감을 준다. 또, 인류 최초의 음악이 타악기에서 시작되었다는 얘기가 있듯이 아무리 현대적인 메시지를 더해도 여전히 원시적이고 야성적인 분위기가 남아 있어 대자연을 만나는 듯 황홀하게 압도당한다.

 

최근 다녀온 타악기 연주회에서는 현대음악가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 1936~)의 대표적인 미니멀리즘 곡 “Drumming” 무대가 펼쳐졌다. 한 시간여 동안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음들이 집요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을 느꼈고, 셋째 줄에 앉은 나는 그 모든 운동에너지와 음파에너지를 다 흡수하고 싶어 안달했다. 다섯 명의 목소리꾼들과 아홉 명의 연주자들이 검은 옷을 입고 침침한 조명 아래서 악기처럼 중립적으로 서서는, 절도 있게 악기들을 오가며 군무 추듯 채를 휘두르는 광경. 나는 그것을 나를 위한 주술로 받아들였다. 이 삶을 그렇게 끝까지 집요하게 살아내라는 기원을 담은 주술. 그야말로 ‘힐링’이었다.

 

천천히, 강력하게 나를 치유하는 ‘글쓰기’

 

즉각적인 효과가 큰 것은 아니지만 천천히, 그리고 강력하게 나의 회복을 돕는 것은 단연 글쓰기다. 나는 지금 이 글을 ‘붉은 방’에서 쓰고 있다. 옷장과 책상이 전부인 이 작은 방에는 동쪽으로 창이 나있는데, 어느 날 강한 볕을 가리려고 붉은 계열의 천을 드리우자 붉은 방이 되었고, 그게 이상하게도 내 마음에 딱 들었다.

 

나는 평소 심리치료와 섹슈얼리티 관련해 쓰고 싶은 것이 떠오르는 즉시 메모를 한다. 그 메모들을 구성하고 살을 붙여 매 회 원고를 완성하고 나면, 남은 쪽지들을 모아 벽난로에 태운다. 쪽지는 금세 활활 타고 없어지지만 나는 그 불길을 한참이나 바라본다. 내가 단어와 문장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과 달리 불은 형언할 수 없다. 그 빛깔도, 형태도, 소리와 온기도 마음에 들게 꼭 꼬집어 말할 수가 없이 참으로 강렬하고 끈질기다. 불처럼 산다는 건 어떤 걸까 생각해 본다.


▶ 벽난로 불에 타고 있는 쪽지들.   ⓒ 하리타

 

한편, 글 쓴다고 책상에 꼼짝 않고 몇 시간을 보내다 보면 점점 추워진다. 혈액순환이 좋지 않은지 손발이 먼저 얼어붙고는 다리도 저려온다. 그러면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반쯤 받아 거기 풍덩 빠진다. 목욕물에 소금을 좀 넣기도 하고, 한번 마시고 난 티백을 여러 개 담가 우려낸다. 촛불만 몇 개 켜고 어둑어둑한 물속에 들어가 있으면 이런 게 엄마 자궁의 느낌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묻고 있다.

 

심리치료만으로도 심난한 와중에 글까지 쓴다는 게 확실히 내게 버겁지만,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또 다른 치유 행위라고 나는 믿는다. 설사 아무도 읽지 않는 일기를 남긴다 해도 우리는 자신에 대해 씀으로써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괜찮다’고 다독이게 된다. 쓰여짐으로 해서 나의 이야기는 또다른 수많은 ‘나’의 이야기들과 엮여 보다 귀해진다.

 

요즘은 시간이 나를 떠메고 가는지 내가 시간을 떠메고 가는 건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오늘 이 하루도 곧 지나가리라는 것. 아침엔 어느 신문 인터뷰에 나온 혜국 스님이라는 분의 말씀을 적어 방문에 붙였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요, 내일은 돌아올 오늘입니다. 영원히 오늘이죠. 오늘 하루 잘살면 영원히 잘사는 겁니다.” 흔들림 없는 수행을 강조하는 불교에서 흔히 하는 말일지 모르지만 새삼 나를 깊숙이 건드린다. 그래, 오늘 하루를 잘 보내자. 그거면 충분하다. ▣ 하리타/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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