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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내면아이’와 만나다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독일에서 심리치료하기⑥



※ 독일에 거주하는 20대 후반 여성 하리타님이 심리치료 과정을 거치며 탐색한 섹슈얼리티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자신의 상처를 짊어지고 국경을 넘어 문화적, 사회적, 제도적 차이 속에서 삶의 변화와 사회와의 새로운 관계 맺기를 실천해가는 여정이 전개됩니다. –편집자 주

 

첫 번째 기억: 사탕 주며 손짓하던 경비아저씨

 

일곱 살의 나는 가족들과 아파트 1층에서 살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려면 매번 1층 입구 옆 경비실을 지나야 했다. 경비아저씨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가 지나갈 때마다 자주 손짓해 불렀다. 웃는 낯의 어른을 거절하긴 어려웠다. 그는 사탕이 든 손을 내밀어 유혹하기도 했다. 지나친 관심과 더없이 친절한 가면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어린 아이를 헷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스무 번 중 한 번이었을까, 하루는 마지못해 부름에 응했다. 내가 가까이 가자 그는 나를 자기 다리 사이로 바짝 끌어당겨 안고는 귀엽다며 어르고 달랬다. 그리고 다음 순간, 손을 나의 성기부위로 가져가 은근히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이도 불쾌한 감정을 느낄 줄 안다. 나는 무언가 이상하고 불편한 느낌만은 감지했다. 손아귀를 뿌리치고 도망쳤다. 내가 저 어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건 아닐까. 버릇없이 군 건 아닐까. 사탕까지 줬는데. 걱정을 했다.

 

그 날 이후에도 그는 끈질기게 나를 불렀다. 하루에도 몇 번씩 매일 그 앞을 지나야 했다. 유치원 갈 때도, 슈퍼 갈 때도, 놀이터 갈 때도. 나는 경비실 반대편 벽에 붙어 살금살금 뛰듯이 종종거렸다. 아저씨가 눈치 못 채도록.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면 돌아보지 않고 달음질쳤다. 심장이 쿵쾅대고 질식할 듯 두려움과 조바심에 시달렸다. 아마도 엄마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나의 언어에서 심각한 징후를 읽어내지 못했다.

 

몇 달이 흐르고, 어느 날 가족들이 함께하는 저녁기도 시간이 끝나고 엄마 아빠가 한 가지 소식을 전했다. 그 경비아저씨가 우리 옆옆 집 문을 열고 들어가 혼자 있던 딸을 성폭행했다고. 화가 난 그 집 아빠가 깡패처럼 주먹을 휘둘러 경비를 때려눕히고 경찰이 왔다고. 그 딸은 열세 살 언니로, 나와 가끔 어울렸다. 나는 그제서야 확신을 얻었다. 아, 그 아저씨는 역시 나쁜 사람이었어.

 

흥분해 떨리는 목소리로 엄마 아빠에게 외치듯 털어놨다. “그 사람이 나한테도 그랬어!” “뭐? 뭘 어떻게 했는데.” “날 만졌어. 자꾸 오라고 부르고.” “그 정도는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얼마나 다행이니. 그 언니 봐라. 그러니까 앞으로 조심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실망스럽고 화가 났다. 나를 믿어주지 않는구나. 나는 힘들었는데. 그 경비의 모습은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어두운 경비실 의자에 앉아 손짓하던 그 아저씨의 능글맞은 억지 미소와 왼쪽 입가에서 빛나던 금이빨이 떠오른다.

 

- 트라우마의 강도(1~10): 7

- 최악의 장면: 가해자의 얼굴 

- 부정적 자기 이미지: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고 도망쳐 다니기만 한 것

- 지금도 나를 괴롭히는 것: 부모님이 당시 나의 충격과 공포를 인정해주지도, 위로해주지도 않은 것

- 긍정적 재해석: 가해자의 상습적인 폭력 시도를 피했고, 일관성 있는 방법으로 나 스스로를 지켰다.

 

두 번째 기억: 오빠는 날 인형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 프린세스 메이커 : 일본의 게임회사 가이낙스가 1993년에 발매한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


열한 살의 나는 명절에 가족들과 외삼촌 집에 갔다. 자주 만나지 않아 관계가 소원했던 외가 식구들과 가까워지기에 하루는 너무 짧았다. 그 날은 컴퓨터를 잘하는 고등학생 사촌오빠가 <프린세스 메이커2>라는 게임을 보여줬다. 도스 시절이던 그 때, 총천연색의 화면과 나처럼 어린 소녀를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켜 공주로 만든다는 게임 내용은 참 매력적이었다. 게임을 더 하고 싶어서 나만 남아서 세 밤 더 자고 가기로 했다.

 

(프린세스 메이커는 일본 게임회사 가이낙스가 1993년에 발매한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일명 ‘미소녀 게임’의 초기 히트작이다. 마왕을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 남성 용사가 여자아이를 입양해 키워 독립시킨다는 것이 기본 설정이다. 특정 명령어를 통해 알몸 설정을 할 수 있게 하고, ‘매춘부’나 ‘아버지와의 결혼’과 같은 결말을 포함시키는 등 포르노를 방불케 하는 장면이 많았지만, 큰 제재 없이 아동과 청소년 사이에서도 인기를 얻었다. 심리치료사는 이 게임을 어린 나에게 보여준 것만으로도 성적 학대에 해당한다고 언급했다.)

 

외숙모는 아이들을 싫어하고 평상시 말투도 늘 꾸짖는 것 같은 쌀쌀한 사람이었고, 대학생인 사촌언니나 직장에 나가는 외삼촌과는 잘 마주치지 않았다. 거실에 있는 컴퓨터 앞에서 사촌오빠와 둘이 종일 그 게임을 했던 것 같다. 둘째 날 오후였을까, 오빠는 옆에 앉으려는 나를 자꾸 억지로 자기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 두 손을 내 사타구니 앞뒤로 깍지 끼더니 내 성기를 은근히 압박했다. 안는 자세를 바로잡는 체하며 엉덩이를 주무르기도 했다. 시선은 아무렇지 않게 컴퓨터 화면에 고정하고 무심하게 대화를 이어나가면서 상황은 반복되었다.

 

불쾌하고 불편한 기분. 정말 난처했다. 어른들도 계시고, 엄마 아빠랑 외숙모 외삼촌은 친하지도 않은데, 이 집에서 이틀 더 지내야 하는데, 그 동안 오빠가 내게 잘해준 게 고마운데…. 어떻게 내 마음을 조용히 표현할 수 있을까, 오빠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말할 수 있을까, 하루 종일 골똘히 생각했다. 다음날 저녁이 되어 오빠와 둘만 방에 있을 때, 나는 어렵게 연습하고 또 연습한 말을 꺼냈다. 별일 아닌 척 새침하게 “오빠는 나를 인형으로 생각하는 거 같애”라고.

 

“뭐? 그게 뭔 말이야?” “아니… 그러니까 오빠가…” 나는 준비한 한 문장이면 오빠가 알아들을 줄 알았는데, 팽팽한 침묵만 이어지고 더 설명한 말을 찾지 못했다. 오빠의 표정은 험악하게 굳어지더니 곧 자기 방으로 사라져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곤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나타나 책 한권을 내 앞에 던지며 “내가 그렇게 잘해줬는데 넌 이런 식이냐. 너 진짜 실망이다. 마지막으로 주는 거니까 이거나 갖고, 내일 잘 가라”고 말했다.

 

나는 다음날까지 마음을 졸이며 집에 갈 시간만 손꼽았다. 사촌오빠는 끝까지 눈을 맞추지 않은 채 냉랭했다. 외삼촌 식구에게는 물론, 집에 가서도 이 일에 대해 한 마디 못 했다. 이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외가 식구와의 모임을 계속 피했다. 열다섯 살 때, 그리고 스무 살 때, 딱 두 번 가족모임에서 그 사촌오빠와 마주쳤다. 나는 최대한 거리를 두며 피해 다녔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스물 세 살의 어느 날, 성폭력을 주제로 엄마와 대화하다 문득 이 일을 처음 털어놨다. 엄마는 잠시 황망해하다가 곧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다야? 그 정도는 별 거 아니야. 엄마도 어릴 때 남자들 많은 집에 살면서 그런 일 한 번 없었을 줄 아니. 그냥 넘어가. 잊어버려.” 나는 엄마의 태도에 충격을 받고는 이내 반발심이 들어 항변했다. “엄마, 엄마가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걔를 탓해야 되는 거 아냐?” “아니, 너는 왜 나한테 짜증을 내니? 날더러 어쩌라고.” 엄마는 자리를 떴다. 십수 년 간 억눌러온 서운함과 분노, 서러움에 북받쳐 눈물을 흘렸다. 나는 엄마가 나를 안아주고 함께 울어주길 바랐다. 그걸 여태 말 안하고 혼자 앓았냐고 나무라주길 바랐다. 그냥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 트라우마의 강도: 8

- 최악의 장면: 내 말을 듣고 화를 내며 나가버린 사촌오빠의 모습

- 부정적 자기 이미지: 어른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고 혼자 감당한 것

- 지금도 나를 괴롭히는 것: 아무 죄책감도 없이 살고 있는 그 사촌오빠를 만나서 사과를 받고 거리낌 없이 마주하고 싶다는 욕구

- 긍정적 재해석: 더 치명적인 성폭력을 막아냈다는 것. 스스로 해결책을 생각해내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

 

나의 트라우마 지형도를 그리다

 

EMDR(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에서 나쁜 기억은 ‘트라우마 지형도’에 집약된다. 나는 먼저 치료사에게 내 일생에서 가장 중대했다고 생각되는 트라우마 기억을 떠올려 이야기로 풀어냈다. 그 이야기는 당시 상황과 나의 상태, 주변 사람들의 대응을 복원하게 되고 치료사는 여기서 현재 느끼는 트라우마의 강도와 양상, 또 그 기억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부정적 장면을 묻고 차트에 기록했다. 이어 나에게 그 기억 속에 ‘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는 무엇인지 서술하게 했고, 그 다음에는 보다 긍정적으로 재평가해보도록 이끌었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총 네 개의 트라우마 기억을 재처리 작업(안구운동) 대상으로 골랐다.


▶ 트라우마 지형도.  A. Hofmann (2004)의 EMDR가이드에서 변형한 그래프.     ⓒ 하리타

 

두 가지는 위에 서술한 성폭력 트라우마이고, 나머지 둘은 초등학교 때와 고등학교 때 학교 친구들로부터 몇 차례 따돌림을 당한 기억이다. 사춘기 학생들은 보통 또래집단에 크게 의지하며, 집단의 정체성 뒤에 숨어 개인을 따돌리곤 한다. 내 경험으로는 남학생들의 따돌림이 집단 구타와 같이 눈에 띄는 물리적 폭력으로 많이 나타난다면 여학생들의 따돌림은 언어적, 심리적 형태로 더 은밀하고 교묘한 경우가 많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기 초 결성된 ‘비밀일기’ 모임에서 어느 날 여섯 명의 멤버 중 한 명을 빼야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이유는 당시에도 별 납득이 가지 않는 조악한 것이었는데, 비밀투표로 이름을 써서 많이 나온 사람을 퇴출하기로 했다. 나는 이미 그 대상이 나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멤버 몇 명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갑자기 냉랭해졌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이 이미 다 의논한 뒤에 비밀투표를 내세워 눈속임하려는 걸 알았지만, 내가 자청해 나가겠다고 하는 것은 억울했던 모양이다. 결국 거의 모든 투표용지에 내 이름이 적혀 나왔고, 나는 끝까지 평정을 가장하고 결과를 받아들인다고 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야 겨우 펑펑 눈물을 쏟았다. 집 앞에서는 눈물 닦고 들어갔다. 어울릴 친구가 하루아침에 없어지고, 그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갈가리 찢어지는 듯 분노와 슬픔에 지옥 같은 나날이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하루도 결석하지 않고 꾸역꾸역 학교에 갔고, 성적이 좋고 수업 시간도 적극적인 모범생으로 지냈다. 그것만이 가해자들 앞에서 초라하지 않은, ‘지지 않는’ 방법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채 마음에 멍이 오래 들어 있었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당시 불던 PC통신 열풍으로, 나는 첫 이메일 계정을 만들어 좋아하던 남학생에게 메일도 보내고, 애니메이션 사진을 수백 장 모으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내 계정의 모든 데이터는 지워져 있고, 비밀번호는 그 남학생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조롱의 의미였다. 나를 관찰하면 쉽게 알 수 있는 비밀번호여서 학급 아이들의 소행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또 한 번은 누군가 학급 홈페이지 익명게시판에 내 이름으로 글을 써 놓아서, 그걸 읽은 급우 대부분이 나를 오해해 학급 전체에서 험담과 소외에 시달리기도 했다. 글 내용은 ‘나는 잘났고 너희들은 모두 형편없다’는 요지의 거만한 독백 같은 거였다. 본인이 실명을 밝히고 그런 글을 쓸 리가 없으니 허술한 모함이었지만, 순진한 열세 살 아이들에겐 잘 먹혔다.

 

담임교사에게 가서 어렵게 통 설명을 하고는 학급에 대신 해명해 주길 부탁했다. 내 딴에는 절박한 심정에 교사의 권위에 호소한 거였고, 선생님이라면 나를 모함하고 괴롭힌 학생에 대해 처벌이든 교화든 응당 마땅한 조치를 취해주려니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노골적으로 짜증스럽고 귀찮다는 기색을 보이며 종례 시간에 건성으로 한마디 했다. “야, 그거 OOO이 한 거 아니래. 누군지 굳이 캐내진 않겠는데 앞으로 그런 짓 하지 마.” 그 태도는 정말 충격적이었다. 아, 이 사람은 학생에게 정말 무관심하구나.

 

고민 끝에 엄마에게 편지를 써놓고 학교에 갔다. “엄마, 나 애들이 따돌려서 너무 힘들어. 그런데 괜찮을 테니까 너무 걱정 마.” 그날 밤에 등 돌리고 자는 척하면서 엄마와 언니의 얘기를 엿들었다. 둘 다 내 말을 못 믿겠다는 눈치였다. “부반장인데다가 상도 많이 타오는 자신감 있는 애가 무슨 따돌림을 심하게 당하겠어. 평소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데 별 거 아니겠지.” 나는 엄마가 내게 말 걸어 주기를, 아니 따뜻한 몇 마디 담은 답장이라도 해주기를 며칠 간 기다렸지만 식탁에 간식 거리가 많아졌다는 것 빼고는 별 반응 없이 지나갔다. 또 철저히 혼자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도 같이 어울리던 여학생 집단에서 어느 날부턴가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따돌림이 시작되었다. 나는 집단을 나와서 어렵게 다른 친구들을 사귀며 그 시간을 견뎠다. 따돌림의 이유도 끝내 알지 못했다. 내 존재와 행동이 소위 ‘재수 없게 튀는 아이’로 보였던 건가, 짐작할 뿐이다. 지금도 약간의 후유증이 남아있다. 사람들이 여럿 모인 집단에서는 생활하기가 불편하다는 것. 자꾸 사람들 눈치를 보게 되고, 아주 사소한 것에도 소외감을 느끼거나 반대로 상황을 주도하지 못하면 불안해지는 과잉반응을 보이게 된다.

 

치료사와 이 트라우마 기억 네 가지를 종합적으로 조망하면서 연관성을 파악해보니 1)신뢰 관계에 있었던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거나 학대를 당했고 2)도움을 청한 보호자, 조력자에게도 필요한 지원(상황의 물리적 해결 뿐 아니라 이해와 공감, 위로 등 심리적 차원)을 받지 못하는 이중의 충격과 상처를 받았다는 점이 두드러졌다. 트라우마 상황에 홀로 놓였던 나는 이후에도 홀로 남겨져 있었고, 몇 번의 구조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아예 시도하지 않게 되었다. 중대한 트라우마들은 모두 적절한 회복 매커니즘을 거치지 못한 채 내면에 묻혔다.

 

씩씩한 척, 그러나 겁먹고 외로운 ‘내면아이’

 

트라우마 기억들을 불러내고 나서 부활절 휴가를 다녀오느라 심리 치료를 3주 걸렀다. 여행지의 새로운 풍경과 경험 속에서도 틈틈이 심리치료에서 불러들인 트라우마 기억과 어지러운 단상들이 찾아왔다. 그 부유하는 조각들을 붙잡느라 수첩과 펜을 항상 휴대했다. 나는 대체 어떤 아이였길래 이런 일들을 은밀히 혼자만 감당하게 됐을까. 왜 나는 가장 아팠던 순간들에 나를 돌봐주어야 했던 보호자들, 가족과 교사에게 위로와 공감, 격려와 지지를 받지 못했을까. 도무지 납득이 안 되었다. 막연한 외로움과 우울감이 모처럼의 여행길에서까지 나를 끈덕지게 따라다녔다.

 

2주 반의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비가 투둑투둑 떨어지는 독일의 회색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던 어느 순간, 한 아이가 홀로 걸어 나오는 장면을 봤다. 그건 마음속에 맺힌 상이였다. 아이는 웃지도 울지도 않는 담담한 무표정이다. 체구가 작고 가녀리지만 야무지게 똑바로 걷는다.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 어디에 갈 것인지 아는 것 같다. 아이다운 천진함 대신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과 바짝 긴장한 어깨가 눈에 띈다. 아이는 혼자다. 표가 나지는 않지만 외롭기도 하고 겁도 날 것이다. 나는 알 수 있다. 저건 내 ‘내면아이’(Inner child, 가족치료사 존 브래드 쇼가 발전시킨 개념. 상처받은 내면아이는 치유를 갈망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자 그 사람을 각종 중독과 같은 자기 파괴적인 선택으로 이끈다고 본다)이기 때문이다.


▶ 독일 신문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터(Frankfurt Allgemeine Zeitung)에 소개된 터키 여성인권활동가 세브넴 코스쿰(Sebnem Coskum)의 작품. 수중 촬영한 이 사진시리즈는 성폭력 피해여성이 처한 상황을 섬뜩하게 표현한다.

 

마침내 내면아이를 만났으니 이제 말해주어야 한다. ‘참 힘들었겠구나. 네가 가장 무섭고 난처하고 불쾌했을 때 아무도 너를 구해주지 않아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니. 가장 억울하고 쓸쓸했을 때 아무도 너를 위로해주지 않아서 얼마나 슬펐니. 너는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했지. 웃을 겨를도 없었겠다. 너는 네가 스스로 돌보고 지켜야 하니까. 누구도 마음 놓고 믿지 못했지. 사람들이 네 믿음을 자꾸 배반했으니까. 그래 나도 알아.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 달라질 거야. 내 말을 믿어줄 수 있겠어?’

 

연애와 섹스에서의 자기방어

 

누구에게나 트라우마가 있다. 트라우마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저마다 생존 전략이 있다. 트라우마들을 통해 내 내면의 아이는 ‘이 세상엔 너 혼자’라는 교훈을 깨쳤다. 누구의 도움도 바라지 말고 스스로를 돌보며 힘든 일을 해결하고 나쁜 일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책임도 오롯이 자신에게 있다고 배웠다. 섣불리 누군가에게 의지해선 안 된다. 나만 더 상처받게 된다.

 

그 동안의 여러 연애들을 돌아봤다. 삽입섹스를 잘 안했을 뿐 아무 문제없는 사랑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실은 내 쪽에서 상대방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애착관계’를 잘 만들지 못했던 것 같다. 단적인 예로 상대방과 갑작스레 이별을 결심하고 행동에 옮기고는 별 타격 없이 일상을 이어가곤 했다. 매번 그랬다. 한없이 몸과 마음을 부대끼며 자아의 일부를 교환하는 연애 관계가 깨졌을 때는 나무뿌리 뽑힌 듯 휘청거리고 흔들리는 게 맞는데, 나는 왜 이럴까 의아해하곤 했다. 실은 늘 나와 상대방 사이에 최후의 방어벽을 두고 있었고, 신뢰는 언제라도 배반될 수 있다는 경험에 기대어, 연애를 아무리 행복해도 어느 날 사라질 수 있는 ‘임시거처’로 취급한 것 같다. 나는 언제고 홀로 사는 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풀지 않는 배낭을 연애의 집 문 가에 기대놓았던 것이다.

 

연인들은 섹스를 통해 사랑을 확인하고 키우기도 한다. 사랑을 할 때 우리의 몸과 마음은 긴밀하게 상호작용한다. 상대방에 대한 애틋한 감정은 성욕과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으면서 우리로 하여금 온 몸 감각을 곤두세운 섹스를 통해 지극한 쾌락과 애착 상태를 만들도록 이끈다.

 

그 중에서도 성기는 감각적으로 가장 민감하다. 성기에서 전달되는 감각은 뇌하수체라는 별도의 기관이 전담할 정도다. 또, 성기는 일상적 접촉에서 제외되어 있다. 낯선 사람과 늘 악수를 나누는 손이나, 미용사에게 내맡기는 머리카락, 가방을 짊어지는 등과 어깨에 비해 성기는 속옷으로 가려져 있으면서 오롯이 성적 자극을 받게 되어 있다. 성기는 기억력도 뛰어나다. 누가 언제 어떻게 만졌는지, 무엇이 닿았는지 성기를 통한 느낌은 마음 깊숙이 각인된다. 그래서 성폭력은 다른 폭력보다 더욱 치명적이다.

 

성적 학대와 그에 얽힌 심리적 트라우마에 시달려온 내 몸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방어태세를 갖추고 살아온 것 같다. 몸이 요새라면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방어 대상은 뭘까. 내겐 망설임 없이 질이다. ‘안으로 들어온다’는 표현의 의미를 돌출 성기를 지닌 남성은 크게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질 안으로 무언가가 삽입될 때 그 감각은 다른 접촉에 비해 훨씬 압도적이다. 질 안의 피부가 입 속의 피부처럼 점막으로 둘러싸여 부드럽고 수많은 감각세포가 밀집해 있기 때문이다.

 

또, 전체 몸의 표면적에서 질 피부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을 지라도, 이는 들어가도록 만들어져 있는 사람 신체의 모든 입구(입, 귀, 코, 질, 항문) 중에서는 가장 크다. 이곳을 통해 내가 아닌 무언가를 안으로 들인다는 건, 경계심이 없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물리쳐야할 침입이 된다. 때때로 나는 누군가를 내 안으로 데려오려 했다. 그러나 상처를 위로받지 못한 내 내면아이는, 해소되지 못한 트라우마의 기억들은, 성인이 된 내가 ‘스스로 내린 결정과 욕구’를 바탕으로 나를 온전히 열어보이려 할 때도 번번이 가로막았다.

 

‘내면아이’의 처절한 선택, 이제 해방되고 싶다

 

▶내면아이(Inner child) 치료 전문가 존 브래드 쇼의 책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학지사, 2004)


그 내면아이가 자기 슬픔과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부작용이 심한 줄 알면서도 독한 약을 삼키듯 처절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지난 수년 간 성폭력 피해여성들과 나를 동일시했다. 그러면 그들이 받는 관심과 지지가 내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을까? 피해자들과 함께 울어주고, 치를 떨며 욕하고 글 쓰고 거리로 나가며 마음껏 분노해주는 사람들의 인정과 공감이 나에게 위로가 되었을까. 내가 제때 받지 못한 것들. 성폭력을 묘사하는 글과 사진, 영상을 접하면 나도 모르게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게 됐다. 한 번 보면 잊으려 할수록 또렷해졌고 그 감각이 생생하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내가 동일시하기로 한 대상을 더 잘 알고 더 충실히 느끼려는 것이었을까.

 

과거와 달리 이제 우리 시대에는 성폭력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미디어에서 성폭력이라는 소재의 사용과 묘사가 늘어날수록, 신문과 뉴스에서 더욱 열심히 떠들어대는 동안, 아동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늘고 처벌 법안이 하나 둘 생겨나는 동안, 나는 점점 더 예민해졌다. 내 분노와 고통은 이 사회에서 점점 더 정당성을 인정받았고, 내가 분노해야 할 대상은 지속적으로 갱신되고 확장되었다. 그렇게 분노에 들이는 마음의 에너지가 내 몸에도 점차 분노를 채우며 ‘몸’이라는 요새를 더 강하게 방어하고 있다는 걸 나는 미처 몰랐다. ‘분노의 독’으로 물든 내 몸.

 

이 몸을 해방시키려면 마음이 먼저 ‘사회적으로 만연한 성폭력’과 내 침실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쾌락의 행위’를 구별해야 한다. 파트너와 사랑을 나눌 때 나는 몸과 마음으로 완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 모든 폭력의 잔혹함, 불평등, 고통과 파괴와는 별개로 나는 지금 안전지대에 있다고. 여기에 방어해야 할 대상이나 경계해야 할 위험 같은 건 없다고. 분노가 아니라 사랑의 에너지를 충전할 때라고. 내 몸은 사랑하는 상대와의 접촉과 소통을 원하고 있고, 그래서 나로 통하는 가장 은밀한 입구를 열어 깊숙하고 따뜻하게 서로를 느끼고 싶다고.

 

마침내 찾아온 통찰의 순간들. 그 동안의 번민이 헛되지 않았다. 반갑다. 그리고 나는 참 아프다. 뜨거운 눈물이 강처럼 길게 흐른다. ▣ 하리타/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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