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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언어로 소통하는 세상이 올 때까지
<초딩아들, 영어보다 성교육> 연재를 마치며 

 

 

‘아들 키우는 엄마’가 쓰는 초등학생 성교육 이야기 연재를 마칩니다. 초딩아들의 정신세계와 생태를 탐구하는 페미니스트, 필자 김서화씨와 이 칼럼을 사랑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일다] www.ildaro.com

 

마지막입니다.
오늘은 말을 높입니다. 나름 친근함의 표현이랍니다.
별로 한 것도 없이 마지막이 왔습니다. 아직도 성교육과 관련한 많은 소재와 주제들이 남았지만 일단락의 시간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이와의 일례를 기반으로 했던 칼럼인지라 늘 아이의 생활에 집중합니다. 아이가 초등1학년 때부터 성적 주제들에 대해 의식적으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학생이라 해도 한없이 아기 같더니 어느덧 4학년이 되어 버렸습니다. 밖에서 한바탕 뛰어 놀고 땀에 푹 쩔어 들어오면 ‘아우, 냄새~’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수준이 되었지요.

 

칼럼은 아이가 2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시작했어요. 초등학생들은 정말이지 하루에도 두 번, 세 번 성장하고 변하는 것 같습니다. 녀석의 속도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더라고요. 저는 열흘에 한번 정도 손톱을 깎아도 되던데, 사나흘 만에 손톱이 길게 자란 녀석을 보면서 성장 속도에 화들짝 놀라고는 합니다. 그래서 저는 늘 조급했던 것 같아요.

 

아이가 먼저 대화의 꺼리를 제공하기 전에는 지나치게 의도적으로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말아야지 다짐했었지만, 칼럼을 쓰다 보니 늘 촉각을 세운 것이 티가 났겠지요. 며칠 전 아들에게 엄마 글 써야 한다고 하니 아들이 “뭐, 이야깃거리 필요해?”하더군요. 아이의 말을 듣고 칼럼을 마쳐야 할 때가 왔구나, 결심했습니다. 이 녀석이 그저 대화가 아니라 엄마가 글 소재가 필요하군, 이라고 여기고 있으니까요. 다행히 저도 재미 붙였는지 갑작스레 이면지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하하하. 네, 우리의 대화가 유한하여 칼럼을 마감합니다. 축적한 것을 다 썼네요.

 

약간은 웃자고 하는 말이고요, 정말이지 최근의 대화들은 더욱 더 예민해지고 있습니다.

 

‘엄마 나 혹시 야동 보여줄 수 있어?’

 

지난 달 아들이 제 책장을 쓱 훑어 보다 가장 흥미로워 보인다며 은하선 작가의 <이기적 섹스>(동녘, 2015)를 집어 들더군요. 표지가 참 좋아 보인다며, 그런데 제목이 너무 이기적이라네요. ‘섹스를 이기적으로 하면 안 되는데?’ 하더군요. 내용을 알면 진짜 잘 지은 제목이라고, 제가 부연 설명했지요. ‘여성들의 섹스 이야기거든. 남자들은 죄다 이기적인 섹스를 하면서 여자들의 섹스에는 다른 기준들이 적용되지.’ 했지요. ‘뭔 말?’ 하며 읽어보겠다는 포즈로 책을 넘기더니 이내 빽빽한 글자를 보고 ‘아, 길다.’ 하면서 중학교 때 읽겠다는 군요. 네가 중학생이 되면 추천해주고 싶은 책 엄청 많다. 근데 지금도 책을 안 읽는데 그때는 읽을 런지.

 

사진집을 찾아봐야 할까요? 벌써부터 전략을 짭니다. 언젠가는 ‘엄마 나 혹시 야동 보여줄 수 있어?’ 라고 묻기까지 해서 아들은 저에게 멘붕을 선사했지요. “엄마가 섹스 얘기 다 한다고 야동까지 보여줄 것 같으냐? 이게 뭐 ‘게임 한판 시켜줘’랑 같은 줄 알아?”라고 꿀밤을 먹였어요.

 

확실한 것은 이제 슬슬 구체적인 ‘섹스’ 이야기들이 궁금해지는 시기에 진입했다는 겁니다. 저로서는 확실히 어려워졌어요. 대대적으로 공개하기도 난감해졌죠. 그럼에도 그 순간도 저는 ‘애들에게는 영상물로 접근하는 게 좋나?’ 하는 생각을 했고, 괜찮은 젠더 관점의 유튜브 영상을 뒤져보는 중입니다.

 

남녀 신체 하나 나오지 않아 아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겠지만, 성폭력의 의미를 확실히 해주기로는 한동안 SNS에서 회자되던 “성관계에서 동의의 의미–차(tea)로 이해하기”라는 영상이 좋았습니다. 야동이야 내가 보여줄 일은 없고, 그렇다고 안 보지는 않겠죠. 하지만 그 전에 이 영상만큼은 꼭 여러 번 보여줄 거예요. 이런 인식이 자리 잡기 전에 야동에 빠져선 안 돼! 적어도 이건 확실한 기준이죠. 그러고 보니 오늘 보여줘야겠네요.

 

[영상] 성관계에서 ‘동의’의 의미–차(tea)로 이해하기 ©2015 Emmeline May and Blue Seat Studios:

https://youtube.com/watch?v=CcQ0olAUrzo

 

‘대화체’ 성교육의 예제가 많아져야 한다

 

제가 아들의 성교육을 ‘대화’로서 시도하고, 이를 그대로 공유하고자 했던 것은 의도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성교육은 정보나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소통의 기술로서 언어를 습득하는 것과 같아야 하니까요. 제목도 “영어보다 성교육”이라고 했잖아요.

 

우리의 대화가 누군가에게 예제가 되었으면 싶었지요. 내용이 훌륭해서라기보다 말 그대로 ‘대화체’라는 차원에서요. 제가 성교육 책들을 읽을 때 가장 어려웠던 부분이었거든요. 맞아, 이런 내용 알려야 해. 근데 그래서? 이걸 애한테 어떻게 말하지? 이런 고민이요. 여전히 어렵습니다. 아이들은 제각기 다르고, 대화의 소재도 넘쳐나니까요. 그러니 어디에서건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험들을 서로 공유하면 좋겠다는 게 저의 바람입니다. 성교육 공부를 하고, 아이들과 대화하고, 그 의견을 경청하고, 모든 우여곡절을 여러 사람과 다시 논의하는 일이요. 예제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참고할 것이 많아지고 성교육이 좀 더 쉬워지겠죠.

 

제목은 영어 조기교육에 대한 열풍을 한번 비튼 것이기도 합니다. 다만 화성에서 온 사람, 목성에서 온 사람, 남녀가 각기 다른 말을 하니 상대의 언어를 배우자라는 주장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다른 언어체계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해 한쪽은 언어가 있지만 다른 한쪽은 언어가 없지요. 어느 한 언어만이 지배적인 상황, 그게 정확히 젠더 문제이고요. 그러니 상대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앞뒤 말이 맞지 않습니다. 아들인 경우, 너는 지금 너에게 엄청 유리한 언어 환경 속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하지요.

 

성(性)이 언어적이라는 말은 성문화, 성인식의 습득 과정이 언어 습득 과정과 유사하다는 말입니다. 조기 영어교육하시는 분들의 주장이 일상생활을 영어로 가득 채우라, 영어에 흠뻑 빠져야 한다, 스며들어야 한다, 언어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라, 반복하라, 다양한 상황을 설정하라, 경험 속에서 배우라, 그래도 안 되면 일단 외우고 시작하라, 등등이지요. ‘외우라’는 최후 수단입니다. ‘10년 배워도 말 한마디 안 나오는 사람도 패턴 100개 외우면 미국 중학생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이죠.

 

저는 이를 성교육을 위한 조언들로 슬쩍 바꿔치기 했습니다. 모든 일상 생활을 젠더 문제로 보라, 깊게 빠져 고민하게 하라, 계속 질문하라, 상황을 설정하고 그 안에 빠트려라, 실제 경험 속에서 문제를 찾아라, 사람들의 다양한 조건과 문화를 이해시켜라, 반복하라, 외울 건 외워라. 이렇게 정리되더군요.

 

성에 관한 우리의 모국어는 보수적이고 차별적

 

영어교육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하면 ‘모국어처럼 배우라’는 것이겠죠. 맞아요. ‘성’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우리는 실제 모국어처럼 배워요. 우리가 가장 친근한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모국어를 배우듯이 성적 인식과 문화들을 배우고 있죠. 배운다기보다 그냥 젖어들게 되죠. 그런데 부모인 우리 세대, 우리 부모들의 세대, 그 부모들의 부모 세대의 성인식은… 말하지 않아도 아실 거예요. 그러니 우리의 성적 모국어는 무엇이겠어요.

 

제가 깨달은 것 중 가장 시급한 한 가지는 이거에요. 한국 사회의 성적 담론이 바뀌어야 한다는데 동의한다면 괴롭고 힘들지만 우리는 일단, 지금 우리의 모국어부터 버려야 해요. 근데 원래 모국어는 버릴 수 없어서 모국어죠. 그러니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결론이 납니다.

 

제가 배워온 성적 모국어는 지금 제 기준으로는 굉장히 보수적인 성담론이죠. 페미니즘을 접하고 나서야 새로운 언어를 얻은 기분이 듭니다. 그러다 엄마아빠가 페미니스트라면 그 아이의 모국어는 페미니즘일 거라는 생각을 한 거죠. 아이의 성교육을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내가 먼저 페미니즘 서적들을 탐독하고 일상에서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이죠.

 

아이를 키우기 전에 그저 나를 더 성찰하는 게 먼저더군요. 그러나 제 성찰 기다리려면 너무 늦어요. 그러니 이 칼럼은 저 스스로의 부족함을 탐구하는 에세이에 불과했을 거예요. 더군다나 결혼생활이라는 성별 분업적 제도 안에서 살고 있는 저로서는 이미 삶 자체가 남녀 성역할을 가르치고 있는 셈이죠. 그래서 저는 더욱 열심이었는지 몰라요.

 

맘 같아서야 아들 성교육보다 가부장제의 어르신들인 친정아버지, 시아버지, 이 나라의 모든 어버이들을 교육하고 싶은 욕망이 더 크지요. 제가 읽는 책들을 그들에게 다 투하하고 싶을 정도로. 하하. “왜 내가 성찰합니까, 당신들이 하시오.” 하면서요. 그러려면 버텨내야할 짐이 너무 커서 도망 왔습니다. 원래 언어 습득은 어릴 때부터 하는 게 빨라요. 혀 굳기 전에. 그러니 윗세대 분들은 버리세요. 그저 모국어로 욕만 하시지 말라고 해야죠. (웃자고 하는 소리에요, 아시죠?)

 

저는 영어 조기교육 대신 페미니즘 언어를 가르치기로 한 셈이에요. 조금 다른 세상이 등장하는 것은 때론 따분하고 지루할 정도로 오래 걸리거나, 반대로 생각보다 쉽게 휘리릭 후딱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도하지 않으면 바뀌는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과 오늘 본 애니메이션 이야기부터 시작해 봐요.

 

안 그래도 지난 주 EBS <보니하니>에서 여자아이돌 그룹 AOA가 나와 초등학생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코너가 있었어요.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파요. 어떻게 하죠? 고민 해결해주세요.” 하더군요. 저는 “더 먹어” 라고 말했는데 화면 속 초등학생들은 모두 “지금 배가 얼마나 나왔는지 보면 안 먹고 싶어져요”, “다이어트를 더 열심히 해요.” 이런 답변들만 하더군요. 아들은 제가 틀린 답을 말한 것처럼 절 보며 키득키득 했어요. 눈을 부릅뜨며 “내가 맞거든!” 했죠. 그 아이돌 팔뚝이 초딩아들 팔뚝 굵기로밖에 안보였거든요.

 

성교육은 계속된다

 

초딩이랑 말하는 건 롤러코스터 타는 것보다 흥미진진하답니다. 에너지 소모가 크긴 하지만요. 어른인 내가 옳고,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 그것을 전수하겠다, 라는 입장으로는 시작하지 마세요. 다른 건 몰라도 성 문제에 있어서만큼 우리가 아이들보다 나을 게 없어요. 말씀드렸잖아요, 우리가 모국어로 배운 성담론에 대해서.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주제보다 아이와 대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지도 몰라요. 저도 모르게 행하고 있던 성적 규범과 행동들을 아이가 지적해주기도 했어요. 신기하게도 그럴 때 묘하게 해방감이 밀려왔습니다.

 

안 그래도 제 일로 바쁜 시기였는데 둘째가 아프기까지 했어요. 집은 넘치는 설거지 거리와 빨래로 혼돈이었죠. ‘저 많은 걸 어쩌면 좋냐. 설거지해야 하는데 너무 피곤하다.’ 이런 말들을 중얼거렸어요. 아들이 “하지 마!” 하더군요. “어떻게 안 해. 엄마 일인데”라는 말을 해버렸죠. 아들이 저의 습관적인 말에 정답을 제시해줬습니다. “아빠 시켜. 아빠 일이기도 해”, 저는 한마디 더 “아빠 오늘 너무 늦게 오는 날이야. 그전에 좀 치워야지”라고 했죠. 아들은 훌륭히도 “늦게 와도 그때 하면 돼지.” 해서 저는 늦게 오는 아빠에게 시켰습니다. 저도 아픈 애 보면서 제 일 하기도 벅찼거든요.

 

이 시기 아이들은 평등에 대해 얼마나 기계적인지, 평등해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현실을 기가 막히게 발견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제가 가르칠 건 아이의 그런 발견에 기대어 반걸음만 더 나가는 거죠. “그래, 아빠 시키자. 대신 옷가지들 좀 주워서 빨래통에 넣는 거랑, 물 컵 너무 없으니까 그것만 네가 씻어놔” 하는 거죠. 아들이 “엥? 내가?” 합니다. “그 정도는 할 줄 알잖아!” 하면 약간 뾰로통해져도 하긴 하죠.

 

집집마다 아들, 딸 키우느라 고군분투하시는 분들이 계실 거예요. 영어교육, 수학공부 이런 주제만 공유하지 말고, 성교육 어떻게 시키는지 정보와 경험들을 더 많이 공유해보길 바랍니다. 더 좋은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혼자만 삽질하면 외롭잖아요. 그리고 이를 위해 엄마아빠가 페미니즘 서적을 많이 읽고, 삶의 변화들을 모색했으면 싶어요. 아들이 집에서 뿐만 아니라 그 어느 곳에 가든지 페미니즘 언어로 소통하는 세상이라면 뭔가 더 아름다워 보이지 않을까요. 그러니 모두가 여기저기서, 서로서로 끊임없는 대화를.

 

오늘도 여전히 중언부언의 긴 글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읽어주신 분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마감하지만, 성교육은 계속된답니다. 페미니즘이라는 언어가 ‘모어’(母語)가 될 때까지.  ▣ 김서화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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