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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자 신상공개 고지서를 받을 때
<초딩아들, 영어보다 성교육> 반갑지 않은 편지
‘아들 키우는 엄마’가 쓰는 초등학생 성교육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필자 김서화 씨는 초딩아들의 정신세계와 생태를 관찰, 탐구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가해자는 그 날의 일을 ‘복기’하고 있을까
우편함에 각종 고지서와 편지가 가득이었다. 그 중 반갑지 않은 편지가 끼어있다.
겉봉투부터 달갑지 않은 편지. 이 편지를 몇 년 전 처음 받았을 때는 ‘대체 여성가족부에서 올 편지가 뭐지?’ 의아했을 뿐이다. 봉투를 바로 열면 되돌릴 수 없는 더럽고 착잡한 공기를 집안 가득 내 손으로 불러들여야만 한다. 그걸 첫 경험에서 깨달았던지라 여성가족부 발신으로 된 편지는 즉시 뜯지를 못한다. 그렇다고 바로 버리지도 못한다. 바보 같은 미련으로 그저 이리저리 뒹굴거리게 둔다. 저걸 버려야지 마음속으로만 생각하다, 그래도 애들 키우는데 한번 보기는 해둬야 할 것 같고, 아니다 그게 더 속 쓰리다 되뇐다. 종국에는 쓰레기봉투에 빈틈을 채우기 위해 집안의 남은 쓰레기를 그러모을 때가 되어서야 뒹굴던 편지를 슬쩍 열어 확인하고 쓰레기봉투의 마지막을 채운다. 그날의 편지도 밀봉된 채 테이블 위를 나뒹굴게 두었다.
며칠 뒤, 바둑에 심취한 아들이 유투브로 이세돌과 박정환의 대국을 보고 있었다. 이미 경기는 끝나고 복기를 시작하려는 찰나였다. 나는 바둑을 잘 둘 줄은 모르지만, 바둑에서 ‘복기’라는 행위가 가장 흥미롭다. 바둑을 두는 동안은 적어도 자신에게 집중해야 하지만, 복기의 순간은 홀로가 아니라 늘 둘 이상이다.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을 되돌아본다. 실수를 후회하기 위해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듣고, 더 좋은 경우의 수를 보기 위해 다시 한 번 깨지기를 자청해서 하는 일. 좋은 복기 습관은 훌륭한 기사를 만들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바둑 전체를 업그레이드 시킬 수도 있다. 그래서 복기는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다. 자기성찰적 삶의 태도이면서 타인을 진중하게 마주하는 습관과도 같다.
문득, 나는 편지를 봐야겠다 싶었고 퍼뜩 의자에서 일어나 찾았다. 이번에는 그 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나는 생뚱맞게도 그 면상을 향해 ‘당신, 그날의 일을 제대로 복기하고 있습니까?’하고 묻고 있었다.
만약 그 사람이 그날을 제대로 복기하고 있지 않다면 어떡하지? 왜 생판 모르는 나는 그저 아이들을 키우고, 가까이 거주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문서를 통해 그와 만나야 하지? 아이들을 대피시키라는 지침인가? 실제 안내문에 ‘아동과 청소년을 키우고 있는 가정에서는 이를 참조하여 보호하라’고 친절히도 적혀있다. 아니면 마을 사람들과 합심하여 그 사람을 내쫓기라도 하라는 조언인가?
▶ 여성가족부 제작 <성범죄자 신상공개 홍보영상> 중에서 캡쳐
신상정보공개서를 공개된 곳에 게시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파트만 해도 누가 붙이는지 이 편지가 올 때마다 엘리베이터 앞 안내판에 붙여 주민들에게 알린다. 자신의 신상이 이렇게 주변에 다 알려진다는 압박이 성범죄 가해자가 더 잘 복기하고 올바르게 복기하도록 유도할까? 설마.
오히려 이 편지는 그들이 복기할 기회를 빼앗는 것은 아닐까? 정말이지 이 신상공개서는 그들의 인생을 탈취라도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가해자의 인생을 탈취한다고 피해자의 삶이 회복될까? 그 누구의 삶도 다른 사람의 삶으로 대신할 수 없지 않은가. 피해자의 회복은 피해자에게 집중할 때 가능한 일이다. 가해자에게는 적합한 형벌을 주는 것으로 그가 자신의 과오를 제대로 반성하고, 그 행위를 반복하지 않도록 집중하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성범죄자에 대해 어떤 누적된 분노나 울분을 실어, 처벌하기를 원한다.
이렇게 덕지덕지 지방질이 붙은 형벌은 쉽게 낙인의 효과를 가질 것이다. 가해자는 그 낙인으로 인해 자신의 남은 생이 망가졌다고 여기며, 그 억울함으로 자신의 과오를 오히려 치장하게 되기 쉽다. 낙인은 제대로 된 복기를 방해한다. 뿐만 아니라 낙인은 원인과 결과를 흐트려 놓는다. 그는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화풀이를 할 수 있으며, 잘못된 수는 자신이 아니라 피해자가 놓은 돌에 있다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종국에 가해자보다 더 낙인 찍히는 건 피해자가 되곤 된다.
신상공개서, 이걸 어쩌라는 거야!
엄마들은 신상공개서가 오면 며칠 내내 맘이 뒤숭숭하다. 놀이터의 화제는 자연스레 이 문제로 옮아간다. 그 집도 왔지? 이걸 어쩌라는 거야. 받으면 기분만 나쁘고, 애들한테 얼굴 기억해서 피해 다니라고 할 수도 없고 막막하기만 하다면서 결론 없는 고민만 길어진다. 어떤 엄마는 결국 이게 부동산 값에만 영향주지 아무 유용함이 없다고 일갈하기도 했다. 이런, 한국인만이 가질 법한 직관이라니!
일명 학군 좋은, 부유한 곳에 사는 엄마들은 이 편지를 덜 받을까? 확인된 바는 없다. 대학가, 1인 가구 중심의 원룸과 대규모 고시원이 거의 대부분인 우리 동네 엄마들의 불안과 욕망이 반영되었을 수 있다. 물론 이들이 마음속에 그린 대조군은 4-5인 가족 이상이 살 만한 30평형대 이상의 대규모 브랜드아파트 단지, 유흥가 대신 학원이나 도서관이 즐비한 안정적 학군을 가진 곳이다.
이들의 직관이 오로지 불안과 욕망에만 근거하지는 않는다. 실제 내가 사는 동네에는 이 편지가 굉장히 자주 오는 편이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내판에 겨우내 붙어있는 신상공개서가 다섯 장이다. 모르긴 몰라도 신상공개서를 꽤 많이 받는 지역임에는 확실할 것이다.
하지만 쉽게 부유한 동네 사람들이 성범죄를 덜 저지른다는 말로 착각하면 안 된다. 1인 가구가 아닌 가족 있는 사람이 성범죄를 덜 저지른다는 말로 치환해도 안 된다. 친족 간 성범죄는 유독 신고율이 낮다. 신고가 되지 않는데 무슨 형벌을 받을 것이며 신상공개까지 가겠나. 또한 누군가 성범죄로 처벌 받으면 그는 대부분 원가족 구성원에서 나와 홀로 기거하는 방식을 찾을 가능성도 높다. 즉, 1인 가구 위주의 부동산 형태와 가격대를 형성하는 우리 동네의 경우 그런 이들이 주거를 선택하기 좋을 뿐이다.
더군다나 돈이 많고 좋은 직장을 가졌다면, 성범죄로 신고 되어도 좋은(?) 변호사를 구해 형량을 줄이거나 심지어 무죄 판결을 받을 수도 있다. 온라인에서 성범죄와 관련한 자료를 찾다보면 형량을 적게 받게 해줄 자신이 있다는 변호사들의 광고를 많이 보게 된다. 무엇보다 이런 모든 가설들도 필요 없이 내가 사는 곳은 한국 최고, 과장 좀 더 보태서 세계 최고 인구밀집 지역이다. 사람이 너무 많이 살아서 신상공개서가 더 자주 오는지도 모른다.
신상공개서를 받으면 당장 그 지역에서 성범죄가 많을 것이라고 오해한다. 이는 명백히 오류다. 신상공개서는 범죄자의 ‘현 거주지’ 기준, 읍 면 동 수준에서 동일 거주하는 아동, 청소년을 보호하고 있는 양육자에게만 온다. 실제 범죄 발생 지역과 어긋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자신의 집에서 범행하지 않은 이상. 내가 신상 정보를 받은 성범죄자들은 내 주변에 살지만 그들의 가해 장소는 늘 타 지역이었다.
더구나 아동 보호에 참조하라는 신상공개서인데, 막상 내가 받은 신상공개서의 가해자 모두가 아동성범죄자도 아니다. 처음과 달리 관련법의 개정으로 19세 이상 성인을 대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경우도 공개되기 때문이다. 작년에 받은 공개서 중 18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경우도 1건 기억나지만, 대개는 20-30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명은 50대를 대상으로 했던 게 기억난다. 신상공개서를 받고 수다를 떨던 아줌마의 말을 엿듣던 젊은 여성이 소스라치게 놀라 조심스레 내용을 묻던 날이 기억난다. 요점은 신상공개를 통해 보호하려는 대상과 배제된 대상은 누구이며, 그것은 과연 어떤 효과를 가지는가이다.
‘인물’보다는 옳지 못한 ‘행위’의 반면교사로
신상공개서 속 인물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보면 별의별 생각이 꼬리를 문다. 이 편지의 효과가 있다면 이런 데 있다. 정말이지 생각이 끊이지 않게 한다는 것. 그런데도 결론은 늘 하나밖에 나지 않는다. 이 신상공개서가 도무지 의미가 없다는 것. 그런데 이걸 받는 양육자 입장에서는 뭐라도 안하면 안 될 것처럼 압박을 받는다.
주변인에게 집에 신상공개서가 자주 온다고 말하면 다들 하나같이 이사 갈 생각 없냐고 묻는다. 신상공개서가 워낙 자주 오는 우리 동네 같은 경우, 엄마들은 그때 유독 이사할 꿈을 꾼다. 서울에서 아이 둘 키우면서, 내 맘에 드는 곳에 거주할 자유가 몇 명에게나 있나. 그러니 꿈만 꾼다. 이사하라는 말은 엄마들에게 전혀 다른 경고로 전환되어 가 닿는 것이다.
혹시라도 이사 못가서 우리 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지? 그냥 살기로 결정한 나 때문이면 어쩌지? 그러면 아이에게 미안함을 어쩌지? 엄마들이 갑자기 머리를 세차게 흔든다. 말 안 해도 보이는 그 생각. 이런 생각까지 미치면 아무래도 딸 가진 엄마들의 마음은 더 무거워진다. 아빠보다 엄마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도 매한가지다. 그러니 의미 없던 신상공개서는 어처구니없게도 정확하게 젠더화된 의미 효과를 낸다. 엄마라는 여성양육자에게, 그리고 딸들에게.
문득 오래 전 일이 떠올랐다. 언젠가 주말에 우리 집에 온 친정엄마가 당시 왔던 신상공개서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인물 좋고 사람좋게 생긴 놈도 이런 짓을 하네, 세상에나." 내가 생각해도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 좋았던 놈이 하나 있었다. 피식 웃고 있을 때 친정엄마는 말을 이었다. 아들을 향해서 "아무리 사람 좋아보여도 모르는 거야. 여하간 패가망신하는 건 순식간이니까, 행동 잘해 우리 손주는. 여자고 남자고 밤을 조심해야 하는 거야." 아들은 외할머니가 뭔 이상한 소리를 하나 갸우뚱하고 만화책에 집중했다. 밤을 조심하라는 말은 우리 엄마의 어처구니없는 평생 지론이다. 밤이 대체 뭔 죄라고, 나와 남동생이 엄마에게 받은 성교육이라는 게 그런 식이었다.
그때를 다시 떠올려보니 엄마의 조언이 그리 나쁘지 않다. 그렇다, 친정엄마는 이 편지의 활용도를 완전히 역전시켰다. 아이들에게 이 악마를 기억해라, 도망가라, 피하라고 말하지 않고, 이것 봐라 너 이러면 이렇게 인생 종치는거니 스스로 행동을 경계하라고 말이다. 여전히 왜 밤 탓만 하는지와 외모에 대한 편견은 버리더라도 말이다.
아들에게 이 ‘사람’을 지칭하기보다 그가 저지른 옳지 못한 ‘행위’에 방점을 찍어준다면 이 골치 아픈 쪽지의 최소한의 활용도는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서너 줄의 알아먹기도 어렵고 재미없는 법적 용어들 속을 휘젓고 돌아다닌다. 다행히도 우리에겐 구글과 초록창이 있으니 쉽게 이놈이 뭔 짓을 했는지 추측가능하다. 이렇게 직접적인 예시도 없다. “이 사람은 이런이런 행동을 해서 누군가를 괴롭게 했고 그에 대한 벌을 받았어. 이런이런 행동은 어찌어찌해서 옳지 못한 일이야.”
여전히 신상공개서는 의미 없는 편지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신상정보 공개제도의 변화를 요하지만, 이미 시시때때로 당도하는 몹쓸 놈의 편지. 만약 정말 뭐라도 해야지 안 그러면 껄끄러워 죽겠네 싶을 경우, 이렇게 사용하는 식으로 방향을 잡아야겠다. 우리가 시선을 머물게 할 곳은 그 놈의 증명사진이 아니라 그놈이 한 행위를 명시한 곳이어야 한다. 잘못 두었다고 바둑판 전체를 뒤엎을 게 아니라면, 여하간 지금부터라도 최선의 수를 찾아가야하니까.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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