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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 가지를 치며 준비하는 봄

<여라의 와이너리 시즌2> 두 번의 새해



새해를 두 번 맞이하니 어, 어, 하며 지나온 한 달여 시간을 되돌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 같아서 새로운 기분이다. 그렇긴 한데, 매해 그렇듯 어제와 오늘, 오늘과 내일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아이고, 또 한 해 들어가는구나. 안다고 알어, 뭘 두 번씩 알려주냐고.

▶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국립공원 조슈아트리에서, 초야 (Cholla) 선인장   © 여라

 

주말에 이어진 긴 설 연휴 덕분에 한 번 정리 좀 해야지 마음 먹었더랬다. 목표를 대단히 크게 잡았던 것도 아니었다. 입지 않는 옷은 버리고, 읽지 않는 종이도 버리자, 였다. 결심은 단순한데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전혀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긴 연휴가 끝나버렸다.

 

계획이 구체적이지 않으면 늘 그런 식이다. 단순해도 모호하다. 마치 평생 ‘나는 늘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었어요’하는 식으로 우주비행사는 멋진 것 같으니깐 그냥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인지, 우주비행사가 되기 위해서 하는 것도 딱히 없으면서, 과연 진짜 원하기는 하는지 의심스러운 경우가 그렇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나는 꼭 정리를 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모호하다고 나쁜 것은 아니다. 세상살이에 똑 부러지는 것이 따지고 보면 얼마나 되나.

 

새 잎의 보호자, 오코티요 나무의 가시

 

몇 년 전 요맘때 조슈아트리(Joshua Tree, 미국 서부 국립공원)에 갔었다. 뾰족한 것들(선인장 가시)과 둥글둥글 포동포동한 것(바위), 몽실몽실 포슬포슬 부드러워 보이는데 사실은 가시투성이인 것(초야 선인장), 손에 손에 총채 들고 흔들어대는 것 같은 조슈아트리랑 다같이 있으니 신기했다. 게다가 황량하기 그지없는 비주얼에 우기 끝의 축축함이라니.

 

▶ 오코티요 (Ocotillo) 가지    © 여라


그런데 여기에서 똑 부러지는 계획을 보았다. 오코티요(Ocotillo) 가지에 무섭게 튀어나온 가시가 그런 놈이다. 오코티요는 덤불나무이지 다육식물인 선인장은 아니다. 그래서 몸에 물을 머금고 있는 게 아니라 겨울 비 오는 계절이 지나면서 사진처럼 자란다. 물을 머금고 툭 터진 가지가 무서운 가시에도 불구하고 색깔이 참 이쁘다고 여겼다.

 

보기보다 사실 더 아름다운 것은 가시의 역할이다. 자세히 보면 가시 있는 자리마다 잎을 틔운다. 새 잎이 세상에 나올 준비를 하는 때부터 자라나는 동안 가시는 보호자의 역할을 한다. 잎이 잘 자라나야 광합성을 하고 나무에 영양을 잘 공급할 수 있기 때문에 잎을 보호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잎이 쏟아져 나오면서 가지 끝에는 주홍빛 화려한 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한철 무성하다가 꽃이 지고 잎 꼭지가 다시 이렇게 가시로 남는다. 그리고 건기를 지내며 다음 잎이 나올 자리를 지켜주며 준비한단다. 참 갸륵하다. 가시의 날카로움과 가시의 길이는 새 순을 보호하고 나무의 생명을 지켜나가는 능력이다.

 

가지도 아닌 것이 줄기도 아닌 ‘덩굴손’의 역할

 

포도나무도 그런 똑 부러지게 하는 기특한 것이 있다. 가지도 아닌 것이 줄기도 아닌 것이 제일 먼저 손을 뻗어 잡히는 것을 돌돌 묶는다. 덩굴손은 줄기가 힘을 받고 계속 뻗어나갈 수 있게 하는 일등공신이다. 광합성을 하여 초록빛을 띠고 시간이 지나면 두꺼워지며 나뭇가지처럼 갈색이 되지만, 잎이 나는 것도 아니고 열매를 맺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한 가지 역할을 한다. 딱 한 놈만 팬다는 싸움꾼의 전략과 비슷하다: “무엇을 만나든 나는 무조건 돌돌 감는다.”

 

겨울은 가지치기를 하여 포도나무의 새해를 준비하는 때다. 비가 여러 날 온다고 하여 문득 마당에 있는 포도나무 생각이 났다. 날도 따뜻해서 맘잡고 나가 미뤄두었던 가지치기를 했다. 해본 적이 없어 책을 찾아보았다. 가지치기를 할 때 가지의 어느 부분을 치고, 무슨 모양으로 가꿀 때 장단점이 무엇이라는 내용을 참고했다. (비가 오기 전이 좋은지 그 뒤가 좋은지, 아니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지에 관한 내용이 궁금해서 뒤져봤으나 찾지 못했다.)

 

포도나무 가지치기를 하고 정리를 하다 보니, 작년 한 해 덩굴손이 여기저기 똘똘 감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작년 한 해 어찌나 자기역할을 잘 했던지, 뚝뚝 끊어서 내버리는 가지들보다 치우기가 쉽지 않았다. 어쨌든 설 연휴 지나며 옷과 종이는 정리하지 못한 채 그대로지만, 포도나무 가지는 깔끔하게 정리하여 봄을 준비했다. ▣ 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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