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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의 ‘작가’되기
A Crack_틈, 박김형준 개인전을 보고
사진작가 박김형준이 누구인지 모를 수 있다. 사진이라니, 사진은 일상에 넘치지만 작가의 사진이라면 또 어떻게 봐야하나 난처할 수 있다. 박김형준 사진작가에 대해, 그리고 그가 누비고 찍는 사진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글을 읽고 혹시 수긍이 된다면 박김형준이라는 작가 이름은 잊더라도 그처럼 살아가는 작가들에 대해, 혹은 그가 사진으로 남긴 대상들에 대해, 아니면 더 편안히 그가 보여준 실낱같은 이미지 몇 점을 기억한다면 좋겠다.
강남의 타워팰리스와 포이동 재건마을
서울 강남구에는 타워팰리스가 있다. 아마 요 몇 년간 타워팰리스보다 더 높고, 더 좋은 주상복합 부의 상징물들이 들어서고 사람이 살고 있을 것이다. 어쨌든 타워팰리스는 천궁처럼 서울에, 그중에서도 강남에 솟아, 높이 오르고 싶은 이들에게는 상징적 지표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나 서울 강남구에는 타워팰리스만 있는 게 아니다.
▶ 화마 혹은 포이동 266번지 도록 중, 타워팰리스와 포이동 재건마을이 함께 담긴 사진 ⓒ 박김형준
타워팰리스를 언급하고 나서 포이동 얘기를 꺼낸다는 것이 상투적인 것 같아 부끄럽기만 한데, 나와는 달리 박김형준 작가는 관망할 겨를 없이 그 현장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그 무엇과도 비교 않고 살아가고 싶고, 또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비교 없이 살아가야할 삶이 각자에게 주어져있다. 그 삶을 포이동 주민들도 갖고 있다.
포이동에는 ‘포이동 재건마을’이 있다. 포이동 266번지에서 개포4동 1266번지로 변경되어 등재된 강남구 판자촌이다. 박김형준 작가는 삶의 권리를 갖는 포이동 주민들과 함께, 그렇다, 그는 ‘함께’하였다, 그 함께함의 한 방식으로 사진을 찍었다. <화마_포이동 재건마을 이야기>(2014), <포이동 266번지>(2009)는 그의 개인전 목록에서 두 줄을 차지한다.
두 전시 사이에는 5년여의 시간 터울이 있다.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살면서 첫째, 둘째아이가 태어나는 시간 터울이라기보다, 한 사람이 나고 자라며 겪는 어떤 순간들의 기점으로 비유할만 하다. 박김형준 작가는 2006년부터 포이동을 찾아 주민의 삶과 포이동 재건마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주민들의 행동을 담았다.
포이동 재건마을을 찍으려 했을 때 포토샵으로 부러 지워내지 않는다면 어떤 방식으로도 피하기 어려울 타워팰리스가 카메라 프레임에 걸리기 일쑤일 것이다. 박김형준 작가의 사진집에는 바로 그 대비가 자아내는 스펙타클이나 박탈감과 같은, 날것처럼 보이는 자극은 되도록 덜어내었다.
10년 가까운 시간에 두 번의 전시를 통해 담아낸 사진 모음에는 어떤 방식으로도 기록으로 남겨야할 역사의 조각이 있고, 생존에 걸어온 주름이 있고, 절망도 웃음도 있다. 그의 사진은 상대적 평가나 상대적 감정을 다룬다기보다 바로 지금, 여기이며, 여기에 있는 자로서의 절대 상황과 판단이 담겨있는 듯하다.
주민들의 역사가 담긴 포이동 마을공동체
전 포이동 재건마을 주거복구공대위 상황실장 신희철 씨는 “포이동 재건마을, 마을 공동체는 계속된다”라는 글에서 이렇게 마을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 화마 포이동 266번지 도록 중 화재 사진. ⓒ 박김형준
<군부정권은 지난 1979년, 넝마주의 등을 계도한다며 자활근로대를 결성, 곳곳에 집단 수용했다. 폐지 등을 수집하고 살아가는 데에 엄격히 수입을 제한하면서 이도저도 못하게 군대식으로 통제했다. 그러다 강제 집단수용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자 전국 곳곳의 자활근로대를 분산, 1981년 들어 45명을 당시 하천부지(포이동 200-1번지)이던 현 재건마을에 떨구고 살게 했다. 민주화가 이뤄지던 1988년대까지 수시로 통제를 당하며 허허벌판에서 어렵게 살아야 했다.
자활근로대 외에도 1989년 봄에 동사무소 신축 부지 원주민 14가구, 여름에 상이용사 16가구, 1998년에는 양재천 공영주차장 부지 36가구를 강남구청이 강제 이주시켰다. 그러면서 “여기 주민들을 모두 인정해주겠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주민들은 집과 마을을 쪼개고 또 쪼개서 살아야 했다. 관에 의해 계획된 강제이주 마을인 것이다. 그러나 관은 주민들을 결국 이용만 했다. 1988년에 포이동 266번지로 구역을 정리하면서 주민들을 등재해야 했지만 유령마을로 취급해버렸다. 주민들에게 ‘불법점유자’라며 토지변상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2003년에는 학교부지로 변경, 내쫓으려 했다.
주민들은 더 어려운 집을 챙기면서 공동체를 일구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 개발 계획으로 철거될 상황이 되자 관에게 철저히 농락당했음을 깨달았다. 포이동 266번지사수대책위를 결성, 서울시청과 강남구청 등에 항의하였고 이를 통해 학교 개발 계획을 철회시켰다. 마을회관과 공부방도 마련했다. 결국 거주지인 포이동 재건마을에 구청과 동사무소가 등재하지 않던 주민등록을 등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련이 다가왔다. 2011년 6월, 화재로 마을 절반 이상이 소실된 것이다. 그러나 포이동주거복구대책위가 범시미사회종교단체로 구성, 시민 모금 등으로 소실된 집들을 복구할 수 있었다. 강남구청은 ‘불법 건축물’이라며 새벽을 틈타 철거용역 깡패들을 투입, 철거하기도 했지만, 주민들과 시민들은 또 다시 복구해냈다.> -신희철, “포이동 재건마을, 마을 공동체는 계속된다” 중에서, 박김형준 개인전 <화마>(火魔) 도록에서 발췌
우리 삶의 상징들에 대하여
이 글의 독자들은 혹시 ‘두리반’의 이름을 기억할까. 홍대 전철역에서 동교동 삼거리 방향으로 걷다보면 자리했던 칼국수보쌈전문점 이름이 두리반이다. 칼국수도 보쌈도 맛있을뿐더러 성공한 철거민 투쟁으로도 유명하다.
▶ 두리반 도록 중, 두리반 농성장 사진 ⓒ 박김형준
박김형준 작가는 <두리반 발칙한 농성장 531일간의 기록>을 담아냈다. 그가 처음 이곳을 찾은 이유는 인권잡지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의 표지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두리반의 주인 안종녀 선생님과 그의 남편 유채림 소설가의 사진을 찍기 위해 이곳에 왔다. 유채림 소설가는 ‘그날 박김형준은 엄청나게 힘이 셌다’고 술회한다. 농성장 옥상으로 올라가서 포즈를 취하고 농성사태를 알려야 하는 ‘비루한 피사체’가 되어야만 했던 부부의 입장에서 카메라를 든 사진작가는 힘이 센 존재일 수밖에.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박김형준 작가는 그날 이후 힘을 빼고 두리반을 찾았다. 유채림 소설가는 바로 그 513일에 대하여 ‘다큐멘터리 사진은 피사체와 거리를 두면 안 된다. 거리가 없어질 때 다큐멘터리 사진다워진다. 두리반을 찍는 동안 그는 분노 안으로 들어와서 사진을 찍었다. 그는 슬픔 안으로 들어와서 사진을 찍었다. 그는 터질 듯한 웃음 안으로 들어와서 사진을 찍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유채림, “깊고 깊은 동굴에서 그를 만났다” 중에서, 박김형준 개인전 <두리반 발칙한 농성장 531일간의 기록> 도록에서 발췌)
다큐멘터리 사진에 대해 평하는 것보다도 유채림 소설가의 ‘다큐멘터리 사진다움’에 대한 일갈만큼 잘 벼려진 표현이 어디 있을까.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우리 삶의 어느 틈에 뚜벅뚜벅 걸어 들어와 ‘곁에 있어도 없는 것처럼’(유채림)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들에 대한 감응에서 비롯한다.
두리반 주인장 내외가 피사체라는 한정을 벗고 오롯한 자리와 행동을 가져가는 동안 박김형준 작가도 어떤 ‘한정’ 혹은 어떤 ‘당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는 두리반을 만난 것에 대해 이렇게 남겼다. ‘두리반은 나에게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해야 할지 알려준 곳이다. 그동안 내가 해왔던 작업들이 맞는 건지 나는 앞으로 어떤 작업을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을 시기, 그때 나는 두리반을 만났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난 담고 싶어졌다. 카메라로, 내 눈으로, 내 마음으로.’
‘곁에 있어도 없는 것처럼’
▶ A crack 전시작 중 #561 ⓒ 박김형준
이번 겨울 박김형준 작가가 연 개인전 <A Crack_틈>은 작가를 빼담은, 혹은 작가가 빼담은 그 무엇들이 드러나 있다. 그는 세 차례에 걸쳐 있는 듯, 없는 듯한 것들에 대해 성실히 찍고 부지런히 개인전을 개최했다. 첫번째 전시는 <A Wall>(2012), 두 번째 전시는 <투영_A Window of A Bus>(2015), 세 번째 전시가 <A Crack_틈>이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스마트폰으로 작업한 ‘일상 시리즈’로 곱다고 할만한, 혹은 누군가에게는 보잘 것 없다고 할만한 풀이 찍혀 있다. 그는 ‘불가능할 것 같은, 틈 속에서 작은 생명이 솟아난다’라는 모토로, 틈 속에서 살고 있는 작은 생명을 담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전시를 열기 전에 작가를 만나서 그간 찍은 사진을 추려내는 과정을 잠시 지켜보았는데, 무려 600장에 육박하는 사진 뭉치를 들고 있었다. 2015년 12월에 찍은 사진, #561이 전시작에서는 가장 근간에 찍은 사진으로 서리 내린 풀의 모습이 담겨 있다.
스마트폰이라는 기기는 기기 이상으로 우리 손에서 쉽게 떠나지 않는 그 무엇이 되었으니, 아마 누군가의 스마트폰 사진첩에는 꽃이나 풀 사진 한두 장쯤은 있을지 모르겠다. 때문에 박김형준 작가의 사진들도 익숙한 대상으로 넘길지 모른다. 여기서 하나만 짚고 싶다. 이 풀을 찍을 때마다 그는 바닥에 드러누워야 했다는 것을. 고단한 몸과 자세가 남긴 기록이 값지다면 값진 것인데, 그건 바로 눈높이 때문이다. 내려찍는 것, 올려찍는 것 모두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세, 달리 말하면 ‘바라보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스마트폰으로 손쉽게 얻는, 혹은 세상에서 간편히 주워드는 이쁜 이미지가 아니라 생명의 건강함을 그 존재 본연의 크기와 자태에 거리두지 않고 스스로도 그 존재와 가까워지려는 엎드림이 이 600장에 가까운 기록을 남긴 것이다. 스마트폰과 카메라 각각의 용도에 대해 물었을 때, 작가는 스마트폰으로 찍는 이유를 기동성 때문이라고 늘 그 활달한 태도로 대답했다.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는 그 경쾌함과 그가 ‘함께’하는 존재들의 마냥 가볍지 않음 사이의 균형감이 느껴진다.
작가들은 전시장으로 들어올 때 많이들 ‘작가’이고 싶어 한다. 박김형준 작가가 취하는 ‘작가’되기의 방식은 이렇다. 최선의 엄선만을 불특정 관객에게 한시적인 전시 기간을 통해 선보이는 것을 보통 전시라 부를 법한데, 그는 바로 이 전시라는 한시성의 윤곽과 경계를 뭉그러트린다. 그는 달력 형태의 도록을 발간한다. 덮어버리면 책장에 꽂힐 무거운 도록이 아닌, 책상 위에, 장식장 위에 툭 놓고 앞뒤로 넘겨보며 친근하게 사진을 접할 수 있는 이런 선택이 그답다.
전시장에는 최종 선택에서 선택되지는 않은, 인화한 사진들이 놓여 있는데 찾아오는 이들에게 원하는 사진이 있으면 얼마든지 가져가게 했다. 단, 또 다른 이들을 위해서 뭉텅이로 가져가는 게 아니라 원하는 사진‘만’ 가져가라는 메모가 남겨있었다. 그가 취하는 이 ‘작가’되기의 방식은 그의 작품과 활동을 돌이켜보니 전시장에서만 유별난 것은 아닌 듯하다. ▣ 김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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