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경험으로 말하다

배려가 있다면 달라질 수 있는 명절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09. 1. 23. 16:19

장애여성으로서 내가 느끼는 명절이란

몇 년 전부터 큰집 역할을 하고 있는 우리 집은 명절이 다가올수록 긴장이 감도는 분위기다. 거의 모든 준비를 떠맡고 있는 어머니는 벌써부터 흔히 말하는 ‘명절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며칠 전부터 친척들에게 보낼 선물을 챙기고, 음식을 챙기고, 전화를 돌리고, 그러다가 친척들의 근황 이야기를 나누면서 평소엔 좀 거리감을 두고 있던 친척들마저 화제에 오른다. 누가 결혼할거라느니, 애인을 데려온다느니, 공부를 잘하느니 못하느니…. 나로서는 부모님들 간의 묘한 경쟁심까지 엿볼 수 있는 이 시기를 무사히 넘겨야겠다는 생각을 할 따름이다.

우리 집은 나라는 존재가 있어 좀더 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씁쓸하지만 아직도 나이 드신 어른들은 나, 즉 장애여성을 집안의 골치덩이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어른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억울한 마음이 드는 때가 종종 있다. 특히 집안일의 경우가 그런 것 같다.

난 장애가 있긴 하지만 웬만한 일은 할 수 있다. 명절 전날 숙모님들이 오시기전까지 엄마를 도와 음식을 준비하고 청소를 한다. 하지만 친척분들이 와서 “네가 뭘 한다고 그러니? 걸리적거리지 말고 네 할일 해”하고 말할 때, 나의 존재가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아무리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도, 성인이 되었어도, 대학을 다녀도, 직장을 가져도, 친척모임에 가면 여전히 안 좋은 눈빛을 보내는 분들이 많다.

가만 보면 내 또래 다른 남자들은 술을 마시거나, 어른들의 이야기에 끼어 의견을 내는 것도 허용된다. 여자들은 결혼한 사람은 한 사람대로, 안 한 사람은 안 한 사람대로 모여 저마다의 관심사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 동생과 달리 나는 마음 편히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다.

게다가 우리 집에선 아직도 여자가 제사에 참여하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나이 차이가 많은 남동생이 나나 다른 여자형제들보다 어른 대접을 받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처럼 여러 가지 이유로, 몇 년 전 큰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난 정말 특별한 날이 아니면 친척집에 가지 않게 됐다.

사실, 친척모임에 꼭 가야 하는 특별한 경우에도 나는 친척들의 곱지 않은 시선 속에서 이방인이 되는 느낌을 받곤 했다. 친척의 결혼식에는 사진을 찍지 말라는 암묵적인 강요가 있었다. 한두 번 부모님 대신 축의금을 전하러 어쩔 수 없이 모임에 갔을 때도 ‘어떻게 혼자 왔냐?’는 말을 계속 듣게 됐다.

내가 느낀 이러한 시선의 무거움을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늘 열심히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나이지만, 그런 말을 대할 때면 울컥 넘어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마 나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어릴 때 큰집에 가면 사촌형제들은 몸을 움직이는 놀이를 잘하지 못하는 나를 떼놓고 놀았다. 어린아이들은 나를 놀리기도 했다. 숙모님들은 ‘결혼이나 하겠냐’, ‘집안일이라도 할 수 있어야 사람구실 할 텐데’ 식의 말을 대놓고 해서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은 기억도 있다. 그래서 부모님은 나를 친척모임에 굳이 데리고 가지 않게 됐고, 나 역시 핑계를 만들어 될 수 있으면 가지 않으려 했다.

명절을 불편하지 않게 만드는 방법

몇 년 전부터는 ‘낯선 친척’들과 ‘시집’이라는 말을 피해 명절이나 친척모임 시기에 맞춰 여행을 떠나거나, 몇몇 친구들과 약속을 잡는다. 그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명절이 달갑지 않은 사람은 나만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장애를 지닌 친구들은 나와 마찬가지 이유로, 비장애인 친구들은 결혼 압력이나,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명절을 반갑게 맞이할 수 없다.

명절에 혼자 지내는 장애여성들은 의외로 많다. 거리가 멀고 가기 불편해서 귀향 길에 오르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사람들의 동정 어린 시선을 받느니 차라리 혼자 지내겠다는 경우도 있다. 결혼한 장애여성들도 시골집 마루나 주방시설이 너무 불편해서 시댁으로 가는 길을 망설이는 경우도 보았다. ‘일을 하면 내 몸이 너무 힘들고, 몸을 핑계로 일을 하지 않으면 편치 않은 눈길을 받아야 된다’고 걱정하는 것이다.

우리뿐 아니라 비장애여성 친구들도 명절은 결혼독촉에 시달리는 시기라서 불편하다.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부모님을 설득했다고 하더라도, 친척들 성화는 못 말린다는 것이다. 친척들 간의 묘한 비교와 저울질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친구들도 있다. 누구는 연봉이 얼마고, 누구는 집을 사고, 누구는 자동차를 바꿔왔더라. 누구는 해외 어디에 나갔더라 등의 자랑과 비교가 뒤섞인 분위기는 명절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다.

그러고 보면 이혼을 한 여성이나 그 자녀들의 경우에 명절의 만남은 반갑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이혼률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친척들 모임에서 이혼한 여성과 한부모 가족을 수용하지 않는 분위기는 강한 것 같다. 그래서 명절 때 혼자 보내는 비혼 여성들이 많은가 보다.

요즘 들어 명절문화를 바꾸자는 말이 많이 나오고 있다. 가사노동을 남녀가 나누어 하고, 차례를 간소하게 지내는 등 각자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들도 보인다. 하지만 좀더 즐거운 명절을 보내려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부분들에서 더욱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명절 자체가 나쁜 것은 물론 아니다. 바쁘게 살면서 평소 얼굴도 못 보는 친척들이 한두 번 모이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누구는 스트레스를 받고, 누구는 소외감을 느낀다는 것을 모임의 구성원들이 한번쯤 생각하고 배려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처럼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또는 남들과 조금 다른 삶을 선택하여 살고 있다는 이유로, 매년 명절에 한숨을 짓거나 분노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말이다.
 일다▣ 이희연

 [저널리즘의 새지평 일다 www.ildaro.com]  일다의 다른 기사들을 보고싶다면?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