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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저씨’와 ‘열정페이’의 사회에 건넨 힐링 판타지
영화 <인턴> 읽기 
 

 
※ 기사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실 분들은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70대 남성 인턴 벤, 30대 여성 CEO 줄스

 

70대 남성 인턴이 30대 여성 CEO와 함께 일하게 된다. 언제나 그렇듯, 현실에서는 쉽사리 발생하지 않을 것만 같은 만남이 영화에서는 가능해진다.

 

영화 <인턴>(낸시 마이어스 연출, 2015)의 주인공 벤 휘태커(로버트 드 니로)는 아내와 사별하고 수십 년간 일했던 직장에서 은퇴한 뒤 일상의 무료함을 느낀다. 그러던 중 한 온라인 쇼핑몰 회사의 시니어 인턴 공고를 발견하고 지원한다. 벤은 5분 단위로 미팅을 잡으며 상품의 포장 방법까지 직접 관여하는 깐깐한 CEO 줄스 오스틴(앤 해서웨이)의 인턴으로 배정받게 된다.

 

워커홀릭 기질이 다분한 줄스는 창업 1년 반 만에 작은 회사를 직원 220명의 규모로 성장시킨 유능한 CEO다. 줄스의 회사가 성공가도를 달리자 남편 매트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게 된다. 줄스는 혼자 동화책을 펼쳐 든 딸의 침대에서 먼저 잠이 들어버리고, 침대 맡에서도 노트북을 놓지 못하고 일을 한다. 그가 가정 울타리에서 겪는 소소한 문제들은 워킹맘이 겪는 어려움을 보여준다.

 

줄스는 시니어 인턴이 기업의 사회공헌 의무를 의식한 의례적인 제도라고 생각하며 초반에는 벤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몇 가지 계기를 통해 줄스는 벤에게 마음을 열고 두 사람은 점점 가까워진다.

 

힐링 마스터, ‘진짜 어른’에 대한 판타지

 

회사의 직원들은 항상 상황에 적절한 말과 행동을 하고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벤에게 호감을 느낀다. 벤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직접 다가가지 못하고 문자 이모티콘으로 사과하며, 아직 기상 시간도 책임지지 못하는 회사의 ‘소년’들에게 필요한 조언을 적재적소에 건넨다. 회사 안의 인간관계가 매끄럽게 흘러갈 수 있도록 윤활유를 붓는 역할도 그의 몫이다. 하지만 벤은 조언을 건넬 뿐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거나 고집하지 않는다. 그렇게 벤은 모두가 원하는, 모두를 위한 회사의 ‘힐링 마스터’로 자리를 잡아 간다.

 

▲  낸시 마이어스 연출. 로버트 드 니로, 앤 해서웨이 주연 영화 <인턴>(2015) 중에서  
 

벤이라는 캐릭터는 아직 ‘남자’가 덜 된 소년들의, ‘진짜 어른’의 위로를 바라는 청춘들의 판타지가 반영된 결과물이다. 항상 말끔한 수트 맵시를 자랑하고 여자가 울 때 건네기 위해 손수건을 챙겨 다니는 ‘젠틀맨’에 대한 환상이기도 하다. 또한 자상하고 현명하지만 조언과 맨스플레인(Mansplain,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을 결합한 단어, 남자가 여자에게 가르치려드는 것을 의미한다) 사이의 경계선을 귀신같이 감각하는 어른 남자에 대한 꿈이기도 하다.

 

그런데 영화 안에서, 벤이 어떤 경험을 통해 그런 인물이 될 수 있었는지 단서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벤의 과거 직장이나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한 언급으로 그칠 뿐이다. 물론 영화가 인물의 역사적 맥락을 제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벤이라는 캐릭터의 현재 모습을 가능하게 만든 맥락으로 ‘삶의 시간’과 ‘경험’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 축약된 정보가 빈자리처럼 느껴진다.

 

영화는 벤의 감정 변화를 묘사하는 데에도 힘을 쏟지 않는다. 영화 초반에 벤이 은퇴 후 허전함을 이겨내기 위해 인턴에 지원한다는 동기를 드러낸 이후, 인턴을 하는 과정에서의 벤의 고민이나 깨달음은 영화 안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후반부 쯤 CEO 후보를 만나러 샌프란시스코에 간 줄스와 벤이 호텔 침대에 나란히 앉아 티비를 보는 장면에서 벤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물을 흘린다. 이 장면이 뜬금없이 느껴지는 것은, 러닝타임 대부분에서 영화가 벤을 상황의 주체라기보다 타인들의 상황이나 감정에 반응하는 객체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묘사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성캐릭터들

 

반면 <인턴> 속 여성캐릭터들은 전형적인 여성 묘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좋은 학교 경영학과를 나왔지만 사소한 일만 하고 있다고 울어버리는 베키는 ‘여성은 감정적’이라는 편견과 맞닿아 있다. 딸 페이지를 유치원에 데려다주면서 만난 전업주부 엄마들은 줄스의 성공을 시기하며, 간식을 만들 시간이 없을 테니 사오기라도 하라고 빈정댄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케케묵은 이야기의 답습처럼 보인다. 그런가하면 벤 대신 줄스의 출근길을 맡은 할머니 인턴은 운전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전화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줄스의 엄마는 딸의 성공을 지지하기는커녕 무관심하고 싸늘하다.

 

▲  낸시 마이어스 연출, 로버트 드 니로, 앤 해서웨이 주연 영화 <인턴>(2015) 중에서 
 

여성캐릭터들이 가진 내면의 고민이나 관계 내의 어려움이 부각되면 어김없이 벤이 등장한다. 비서 베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줄스에게 베키의 이야기를 슬쩍 건넨다거나, 줄스를 시기하는 전업주부 엄마들에게 ‘같은 여성이 크게 성공하는 모습을 보니 자랑스럽지 않느냐’고 일침을 놓는다. 심지어 줄스가 엄마에게 잘못 보낸 이메일을 수습하기 위해 가택 침입까지 불사하는 벤은 무적의 해결사 같다. 영화는 여성 내면의 힘이나 관계의 가능성이 문제를 해결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인턴>은 줄스를 유능한 여성 CEO로 그려내고 있지만, 줄스가 영화 안에서 맞닥뜨리는 가장 큰 사건은 직원의 횡령이나 회사의 부도가 아닌, 남편의 외도다. 남편이 바람을 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줄스는 ‘잘나가는 부인 때문에 자신감을 잃어서 바람을 피는 남편’이라는 시나리오에 사로잡혀 자기분열을 겪는다. 남편은 누구든 만날 수 있지만 자신은 까다로우니 다음 남자를 못 찾을 것이며, 미래에 딸까지 결혼해 떠나면 자신은 죽어서 혼자 묻히고 말거라는 줄스의 과장된 불안을 해결하는 것은 역시 벤이다.

 

줄스는 남편의 외도를 계기로 그간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외부 CEO 영입을 긍정적으로 고려하게 된다. 남편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가정을 돌보아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자신이 일군 회사를 외부 사람의 손에 맡길 수 없다는 신념이 약해진 줄스는 외부 CEO 영입을 결정한다. 하지만 결국 그 결정을 번복하고 자신이 회사 운영을 맡기로 하는데, 줄스의 재결정에 확신을 주는 것은 또, 벤이다.

 

영화는 일과 가정이라는 이분법 구조를 설정하고 여성이 가정이 아닌 일을 선택한 것이 ‘옳은’ 결정이며, 성평등한 성취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하지만 남편의 외도라는, 사적 영역의 다소 진부한 사건을 여성 CEO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겪을 수 있는 고뇌의 절정으로 다루는 <인턴>의 플롯은 고전적인 성역할 묘사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낸시 마이어스 연출, 로버트 드 니로, 앤 해서웨이 주연 영화 <인턴>(2015) 중에서 
 

한국의 관객들을 설레게 하는 것

 

<인턴>은 지난 9월 개봉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10월 23일 영진위 통합전산망 기준 일일 박스오피스 4위, 누적관객 4만8천명을 기록하며 조용한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낸시 마이어스 감독은 인스타그램을 통해 미국을 제외하고 압도적인 흥행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한국의 관객들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한국의 관객들이 유독 <인턴>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젠틀맨’ 대신 ‘개저씨’에 대한 높은 경험치와, ‘인턴’의 낭만 대신 ‘열정페이’의 리얼리티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는 한국의 관객들에게 벤과 <인턴>은 <해리포터>만큼이나 설레는 판타지가 아닐까.  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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