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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국수에 담긴 베트남의 ‘이야기’
<아맙이 만난 베트남 사회적기업> 베트콩 아지트 퍼빈
공정여행과 공정무역을 통해 한국과 베트남을 잇는 사회적 기업 ‘아맙’(A-MAP)이 베트남 곳곳에서 지역공동체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사회적 기업과 모임을 소개합니다. [일다]
▮ 퍼빈(Pho Binh)의 역사
호치민시에 있는 쌀국수집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퍼빈>은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콩(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아지트로 사용된 곳이다. 1968년 베트콩과 북베트남의 ‘구정대공세’를 위해 베트콩 지휘부가 작전회의를 하고 구찌땅굴, 하노이 등과 비밀 교신을 하던 게릴라 근거지였다.
베트남 전쟁(1960~1975)은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와 벌인 제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분단된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 과정에서 1960년 결성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북베트남의 지원 하에 남베트남 정부와 이들을 지원한 미국과 벌인 전쟁이다.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사이의 내전 양상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미-소 냉전 시대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대리전쟁 양상을 띠게 되었다. 전장도 인도차이나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여러 국가들이 개입한 가운데 한국군도 미군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인 32만여 명이 파병되었다.
구정대공세는 1968년 음력 1월 1일에 전개된 베트남 인민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대공세다. 베트콩은 남베트남의 주요 시설을 점령했지만,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반격으로 진압돼 대공세는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미국사회 내부를 비롯해 국제사회의 여론이 ‘반전’으로 기울었고, 결과적으로 통일된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을 수립하는 결정타가 된다.
바로 이 역사적인 구정대공세의 근거지였던 <퍼빈>은 1988년 베트남 문화부로부터 역사 유적지로 지정되었다. 현재 <퍼빈>은 쌀국수집과 함께 과거 이곳에서 활동했던 전사들의 사진과 자료, 유물 등을 전시하는 역사관도 운영하고 있다.
▲ 호치민시 3군 리찐탕 거리의 명물 <퍼빈> 식당 © 아맙
70년 베트남의 시간을 품은 쌀국수 명가, 퍼빈
호치민시를 대표할 만한 쌀국수집은 어디일까. 수소문 끝에 찾아간 <퍼빈> 식당은 시내 중심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리찐탕 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식당 입구 상단의 금색 별과 ‘베트남 문화부가 지정한 역사 유적지’라는 문구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서자 빛 바랜 벽에 허름한 식탁과 의자가 고즈넉이 놓여 있는 오래된 식당의 풍경이 나를 반겼다.
식탁에 앉아 소고기 쌀국수부터 주문했다. 맛은? 훌륭했다. 한국에서 맛볼 수 있는 쌀국수와는 차원이 달랐다. 담백하고 깨끗한 육수가 아주 우직한 맛을 내고 있었다. 집에서 만들어 먹는 것처럼 조미료 맛이 거의 나지 않는 정직한 맛의 국수였다.
쌀국수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역사관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베트남 전쟁 당시 <퍼빈>에서 활약했던 전사들의 사진과 그들의 젊은 영혼이 불꽃처럼 타올랐던 구정대공세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순간 뱃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내가 방금 먹은 것은 한 그릇의 쌀국수가 아닌, 치열하게 한 시대를 관통한 그들의 이야기였고, 그 소중한 역사를 지켜나가는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구수정(아맙 베트남 본부장. 이하 ‘수정’): 호치민시 쌀국수의 유래를 찾아보다 <퍼빈>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살아 있는 역사를 품고 있는 <퍼빈>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어 선생님을 찾아 뵙게 되었네요.
응우옌 낌 박(베트남전 당시 비밀특공대원. 이하 ‘박’): 연락을 받고 참 반가웠어요. 베트남, 미국, 유럽사람들의 인터뷰 요청은 많이 받아봤지만 한국사람은 처음이에요. <퍼빈>의 역사를 알기 위해 이렇게 직접 찾아 주니 제가 더 고맙지요.
▲ 베트남전 당시 통일 베트남을 건설하기 위해 비밀특공대원으로 활약한 응우옌 낌 박. © 아맙
수정: <퍼빈>의 창립자 고(故) 응오 또아이 선생의 사위라고 들었습니다. 또아이 선생께서는 언제부터 사이공에서 쌀국수 장사를 하셨나요?
박: 장인어른은 북부 타이빈 성 출신입니다. 장모님은 쌀국수 퍼(Pho)의 발원지인 북부 남딘 성 사람이고요. 선생은 열여섯 살 때부터 방직공장에서 일하며 연락원 활동 등 항불 독립운동에 참여하셨지요. 나중에 두 분은 하노이에서 쌀국수 장사를 했는데, 연락원 활동이 발각되어 장인이 감옥에 갇히고 맙니다. 이후 탈옥에 성공하지만 더 이상 하노이에 살 수 없었던 장인은 1951년 아내와 함께 사이공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사이공 외곽의 빈탄 군에서 쌀국수 장사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1966년부터 지금의 리찐탕 거리에 자리를 잡고 <퍼빈> 식당을 운영해왔죠. 사이공에서 “원조 쌀국수집”으로 불리는 식당이 세 곳 있는데요. 따우바이(Tau Bay)와 뜽라이(Tuong Lai), 그리고 <퍼빈>입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장인께서 쌀국수를 팔기 시작했으니까 <퍼빈> 쌀국수는 70년 이상의 역사를 품고 있다고 할 수 있죠.
<퍼빈>에서 1968년 구정대공세 역사의 장이 열리다
수정: 또아이 선생과는 언제부터 인연을 맺게 되었나요?
박: 저는 사이공 출신으로 전기공이었습니다. 1965년에 아내와 결혼하면서 장인어른과 운명을 함께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죠. 장인과 아내의 권유로 저도 베트콩 비밀조직 F100에서 활동하게 되었고요. 우리 가족 중에는 장인, 장모, 처남 록, 저와 아내, 이렇게 모두 다섯 명이 F100 요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수정: 베트남 전쟁 당시 사이공에서 <퍼빈>이 베트콩의 아지트로 사용되었다고 들었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떠한 장소였는지 궁금합니다.
박: 1966년 중반, 조직의 지령에 따라 장인어른은 지금의 <퍼빈> 식당이 들어서 있는 4층건물 한 채를 사들였어요. 1층에는 쌀국수집을 열었는데 장사가 잘되어서 늘 손님으로 붐볐지요. 베트남 사람들뿐만 아니라 미군들도 많이 찾았죠. 하지만 2층에서는 조직의 고위급 간부들과 비밀요원들이 모여 수시로 작전회의를 했어요. 쌀국수 가게라 낯선 사람들이 드나들어도 의심을 받지 않았지요.
1968년 1월 1일(음력) 새벽부터 전개될 구정대공세를 위해 베트콩들은 사이공 시내 곳곳에 전투에 사용할 비밀 무기창고를 만들었어요. 미대사관, 대통령궁, 라디오 방송국, 해군참모부, 경찰청 등의 점거하기 위한 비밀 무기창고가 사이공에만 13군데나 되었어요. <퍼빈>은 북쪽에서 온 무기들을 받아 각각의 장소로 보급하는 중간 지점이었지요.
5층에 있는 비밀 공간에 B-40 견착용 로켓포, AK-47 소총, 수류탄, 다이너마이트, 시한폭탄 C4 등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항상 가슴을 졸이며 소달구지에 무기를 숨겨서 운반해야 했는데, 식당에 워낙 많은 식재료가 들어왔기 때문에 다행히 의심을 사는 일은 없었어요.
구정대공세를 코앞에 두고 <퍼빈>은 ‘구정대공세 제6전투지구 전방지휘소’가 되었고, 구찌 땅굴, 하노이 등과 교신하며 구정대공세를 진두 지휘할 비밀 작전회의가 열렸어요. <퍼빈>의 좌우 옆집에는 미군 장교와 필리핀 장교가 집을 임대해 살고 있었는데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어요. <퍼빈> 아지트는 구정대공세 이틀 후에야 발각이 되지요.
▲ <퍼빈> 식당 2층에 마련된 역사관. © 아맙
수정: F100에서 선생과 장인어른은 어떤 역할을 담당하셨나요?
박: 저는 비밀 연락원이었습니다. F100은 점조직이었고 저와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은 가족을 제외하곤 단 한 사람뿐이었어요. 누군가 체포되더라도 조직이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죠. 저와 교신하는 사람은 때론 소쿠리를 옆에 낀 백발의 할머니, 때론 손에 지팡이를 쥔 맹인으로 변장해서 <퍼빈>에 찾아왔어요.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루는 식당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정보나 서신을 교환하고, 그를 통해 베트콩에게 자금을 조달했습니다.
장인어른은 조직의 재정 담당자였어요. 구정대공세를 한 달여 앞두고 상부로부터 ‘백 명의 병력이 한 달간 먹을 식량을 준비하라’는 지령을 받고, 엄청나게 많은 통조림과 건조식품, 닭고기, 오리고기 등의 음식을 <퍼빈>에 비축하기도 했습니다.
1973년 파리 평화협정 체결로 감옥에서 풀려나
수정: 구정대공세가 실패로 돌아가고 난 후 <퍼빈>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나요?
박: <퍼빈>의 정체가 탄로난 후, 다섯 명의 가족과 아홉 명의 조직원이 체포되었죠. <퍼빈> 건물 전체를 압수당하고, 식당도 영업 정지를 당했어요. 당시로선 엄청나게 큰 금액인 3천달러로 경찰청 관리를 매수해 장모와 아내를 빼낼 수 있었지만, 저와 장인어른은 경찰청에서 2개월간 조사를 받고 악명 높은 찌호아 감옥과 꼰다오 감옥에 수감되었어요.
거기서 극심한 구타와 물고문, 전기고문은 물론 손가락에 못을 박고 팔을 잡아당기고 비틀어 관절을 뽑는 끔찍한 고문도 당했습니다. 구정대공세 때 동지들과 함께 죽지 못한 제 자신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고통스러웠어요.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할 정도로 끔찍한 시간이었죠. 하지만 절대 입을 열지 않았어요. “그들에게 하나를 불면 둘, 셋, 넷을 다 말할 때까지 절대 고문을 멈추지 않는다”라는 감방 선배들의 충고를 기억하며 버텼어요.
고문경관은 ‘네 장인이 다 불었다’며 저를 협박하고, 또 장인에게 가서는 ‘당신 사위가 다 불었으니 모두 자백하라’고 을러댔지요. 한 번은 대질심문을 위해 장인어른과 재회를 하게 되었어요. 둘 다 고문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고 정신까지 혼미한 상태였지만, 서로의 눈빛을 보고 대번에 알 수 있었죠. 서로가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았다는 걸.
수정: 두 분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남은 가족들도 고생이 많았겠군요.
박: 가족들은 한동안 <퍼빈> 식당은 물론 집에도 들어갈 수가 없어서 길거리에서 지내야 했지요. 장모와 아내는 궁여지책으로 식당 앞에 쪼그리고 앉아 반꾸온(Banh Cuon, 다진 고기와 야채를 쌀종이에 말아서 찐 음식)을 만들어 팔았는데요. 그나마 장사가 좀 돼서 겨우겨우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어린 처남과 처제는 길거리를 배회하며 동냥을 하기도 했고요.
1973년에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저와 장인어른이 감옥에서 풀려난 후, 변호사를 선임해 다시 <퍼빈> 식당을 되찾고 쌀국수 장사도 재개했습니다.
잊지 못할, 미군 참전군인 어머니의 방문
수정: 또아이 선생은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퍼빈>을 지켰다고 들었습니다.
박: 그분은 2006년에 향년 94세의 나이로 돌아가셨죠. 그렇게 끔찍한 고문을 겪었음에도 장수하셨고, <퍼빈>을 진심으로 아끼셨어요. 장인어른은 아주 유쾌한 사람이었고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분이었습니다. 자식들에겐 엄격한 아버지이기도 했죠. 저도 선생을 친아버지처럼 따랐어요. 아침식사는 언제나 쌀국수였는데, 당신이 직접 매일 육수와 면발을 확인하셨죠. 맛에 대한 장인정신이 투철했어요.
▲ 마지막 순간까지 <퍼빈>을 지켰던 창립자 고(故) 응오 또아이. (가운데) © 아맙
쌀국수 장사로는 가족들이 겨우 먹고 살 정도였지 달리 재산을 모을 수는 없었어요. <퍼빈>이 장사는 잘됐지만, 호치민시 한복판에 4층 건물을 가지고 쌀국수집을 운영하는 건 여러 모로 타산이 맞지 않는 사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장인어른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퍼빈> 식당을 지키셨죠. 눈을 감는 순간에도 <퍼빈>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수정: <퍼빈>에 도착하자마자 금색 별과 함께 간판에 새겨진 ‘베트남 문화부가 지정한 역사 유적지’라는 문구가 눈에 띄더군요.
박: 구정대공세와 관련하여 오늘날까지 호치민시에 남아 있는 베트콩의 비밀 기지는 <퍼빈>과 두 개의 무기창고뿐입니다. 1988년 11월에 <퍼빈>의 역사유적지 지정 기념식이 있었는데요. 온 동네가 떠들썩할 정도로 성대한 예식이 진행되었습니다. 군악대의 연주와 함께 보반끼엣 베트남 전 총리가 직접 참석했어요. 가문의 영광이었죠.
처음에는 2층의 작은 방에 <퍼빈>에서 활동했던 전사들의 사진과 자료, 유물을 전시했는데요. 또아이 선생 부부가 모두 돌아가신 후, 2010년에 두 분이 쓰시던 방을 수리해서 지금의 역사관으로 사용하고 있어요. 미국, 유럽, 호주, 일본, 인도 등 다양한 국적의 여행자들이 <퍼빈>의 이야기를 듣고 이곳을 방문하며, 미국의 참전군인들이 가장 많이 찾고 있습니다.
베트남 학생들과 청년단도 이곳에 견학을 많이 오죠. 그리고 해마다 종전기념일(4월 30일), 독립기념일(9월 2일), 열사 상이군인의 날(7월 27일), 설 연휴 등에는 호치민시 3군의 인민위원회에서 찾아와 역사관에 마련된 또아이 선생의 영정에 참배를 하고 있어요.
수정: <퍼빈>을 방문한 사람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이는 누구인가요?
박: 2010년에 <LA타임즈> 등에 소개되면서 <퍼빈>을 찾는 미국인들이 부쩍 늘었어요. 하루는 미국의 한 참전군인이 백발이 성성한 어머니와 함께 이곳을 찾았어요. 나이가 여든은 훨씬 넘어 보였는데 아주 선한 인상을 하고 있었죠. 그 부인께서 제게 또아이 선생의 영정에 참배를 해도 되겠냐고 묻더군요.
참배를 마친 뒤 부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무의미하고 정의롭지 못했던 그 전쟁에서 만약 내 아들이 죽었다면 얼마나 원통했을까요. 내 아들은 운 좋게 살아 돌아왔지만 전쟁으로 자식을 잃은 수많은 어머니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라고 이야기를 하더군요. 당시 미국에도 전쟁으로 인해 우리처럼 고통 받은 사람들이 있었구나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 아들이 미국 휴스턴에 살고 있어서 몇 차례 미국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는데요, 의외로 <퍼빈> 쌀국수집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퍼빈>의 이름을 빌린 쌀국수 체인점도 있고요. 하지만 <퍼빈>에 얽힌 역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쌀국수 퍼(Pho)가 베트남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는데, 그 음식 속에 담긴 우리 베트남 사람들의 이야기도 함께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 기록 정리: 권현우 (아맙 공정여행 팀장)
<아맙> 카페: http://cafe.daum.net/doanhnhanxahoi 연락처: 070-7554-5670 (베트남 사무소)
<아맙> 후원 계좌: 신한은행 110-313-503660 (예금주: 김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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